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 ③

김포를 오가며 돌봄과 노동을 병행하는 동안 나 역시 돌봄이 필요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정서적・관계적・문화적 돌봄이 필요했던 것. 돌아보면 일터였던 청년협동조합은 임금 외에도 내게 필요했던 그런 돌봄을 제공해 주었다. 나아가 근로계약서에는 없는, 거래가 아닌 방식의 돌봄을 청년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 직원들과 서로 주고받았다.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이면서 돌봄이 필요한 청년으로서 나 스스로를 이른바 ‘돌봄청년’으로 정체화 하게 된 일터였다.

※ 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②에서 이어집니다.

Ⅳ. 돌봄과 노동의 커리어

애인과 함께 살게 되면서 1인 가구에서 2인 가구가 되었고 김포에서 군포로 거처를 옮긴 나는 ‘직주근접’에 ‘반상근’ 등 조건에 맞는 직장을 구했다.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만든 협동조합이었다. 저임금이었고 계약직이었으나 조직 문화나 업무 성격이 맞아 근무하는 동안 만족도는 높았다. 아버지가 다치기 전 다니던 직장 역시 임금이나 직업 안정성보다는 신념이나 가치에 따라 선택했던 곳이어서 조직 문화, 업무 내용, 신념과 가치 등은 일 선택에 있어 내게 주요한 기준들이기도 하다.

퇴근한 아버지는 시골집에서 홀로 약주 한잔 마시며 피로를 덜어내곤 하셨다. ⓒ고미랑
퇴근한 아버지는 시골집에서 홀로 약주 한잔 마시며 피로를 덜어내곤 하셨다. ⓒ고미랑

흔히 돌봄청년이 당면하는 문제 중 하나로 꼽는 것이 학업이나 취업 등 진로 이행의 어려움, 즉 ‘커리어 단절’이다. 아버지 돌봄을 이유로 상근직을 그만두고 얼마간의 백수 생활과 아르바이트와 반상근을 전전했으므로 ‘커리어 단절’은 돌봄청년인 내게도 해당되는 문제긴 했으나 지난 6년여의 일 경험을 되돌아보면 꼭 그렇게 해석하고만 싶지는 않다.

그보다 전, 그러니까 아버지의 산재 직후 당장 노동과 돌봄을 병행할 수 없었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얼마간 백수 생활과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 물론 반상근이었지만 – 출근했던 첫 번째 직장은 지역 사회(김포)에서 학령기 이후 발달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장애인을 직장 동료로 이웃으로 시민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 경험은 이후 아버지를 돌보는 데에도,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설(요양병원) 아닌 당신의 고향, 지내던 동네(순천 황학마을)에서 지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 물론 이를 위한 현실적 조건과 환경이 갖춰져야 하지만 그런 상상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일 경험의 맥락은, 커리어는 단절되지 않을 수 있었다.

혼인 후 김포에서 군포로 이사 오면서 이직한 청년협동조합의 성탄절 모임 중. ⓒ청년협동조합 뒷북
혼인 후 김포에서 군포로 이사 오면서 이직한 청년협동조합의 성탄절 모임 중. ⓒ청년협동조합 뒷북

혼인과 이사를 이유로 비록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 경력과 경험은 앞서 말한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만든 협동조합으로 이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같은 이유로 반상근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격주 주말마다 연휴 때마다 혹은 수시로 호출되는 아버지 돌봄을 지속할 수 있었다.

김포를 오가며 돌봄과 노동을 병행하는 동안 나 역시 돌봄이 필요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정서적・관계적・문화적 돌봄이 필요했던 것. 돌아보면 일터였던 청년협동조합은 임금 외에도 내게 필요했던 그런 돌봄을 제공해 주었다. 나아가 근로계약서에는 없는, 거래가 아닌 방식의 돌봄을 청년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 직원들과 서로 주고받았다.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이면서 돌봄이 필요한 청년으로서 나 스스로를 이른바 ‘돌봄청년’으로 정체화 하게 된 일터였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동그랑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시인-되기'는 여전히 요원하고 문단에 등단한 적 역시 없다. 대학 졸업 후 개신교 선교단체 간사로 3년 간 일하다 2016년, 목수로 일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상시 간병과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자 하던 일을 관두고 격주 주말과 명절 연휴 때마다 병원에 들어가 그를 돌보게 된다(최근 3년간은 Covid-19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한 인연으로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일상을 지원하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사무국장으로 1년, 이후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모여 만든 청년협동조합으로 이직해 커뮤니티 매니저로 3년을 일했다. 2021년, 기술을 배워봐야겠다 싶어 한옥목수 일을 배우고 실제 문화재 복원 및 보수 현장에서 초보 한옥목수로 일을 하다 열악한 근무여건(근로기준법 미준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결국 그만두게 된다. 짧게라도 배운 기술과 일 경험이 아쉬워 비록 목수는 아니지만 2022년엔 수원 화성행궁 복원 현장에서 인턴 공무로 6개월 간 일했다. 2023년 현재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활동가로, 프리랜서 작가 및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 필명 ‘동그랑’은 강화도에 딸린, 동검도에 딸린, 무인도 동그랑섬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섬 안의 섬 안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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