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는 왜 강하고 사나운 생명이 드물까?

우리는 과도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경쟁은 학교 또는 직장 내 폭력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경쟁이 자연스러운 듯 이야기하지만, 실제 자연 속 생명들은 경쟁하기보다 협력하며 살아간다. 포식동물 역시 생존을 위해서는 경쟁을 피한다. 가장 강하고 사나운 포식동물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쳤다. 많은 사람이 이 드라마를 봐서 알겠지만 이 드라마는 학교 폭력을 다룬 드라마이다. 사실 필자는 이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워낙 오래 전에 집에서 TV를 치운 탓도 있지만 《더 글로리》를 소개하는 영상이 처음 유튜브에 떴을 때 그 장면이 너무나 폭력적이어서 더 이상 드라마를 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잔인한 폭력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져 그런 드라마는 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가 아는 《더 글로리》에 대한 내용은 흘려들은 단편적인 이야기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드라마 내용과 다를 수도 있다.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심각하고도 고통스러운 폭력은 성적에 대한 압박이다. 사진 출처: kyo azuma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심각하고도 고통스러운 폭력은 성적에 대한 압박이다.
사진 출처: kyo azuma

《더 글로리》의 대략적인 내용은 주인공이 학창 시절에 학폭을 당했고 훗날 사회에 나가서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시청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학폭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훗날의 용서 없는 복수에 통쾌함을 느꼈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느꼈을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겪은 학창 시절 다양한 폭력과 상황들도 폭력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복수를 하는 행위 자체도 폭력임에는 다를 것이 없다. 폭력적 상황이 또 다른 폭력을 부른 것이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학창 시절 학교 풍경은 2004년 개봉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은 소위 ‘문제아’라는 학생들을 학생부실로 데려가 복날 개 패듯이 팼고, 교실에서는 싸움 좀 한다는 학생들이 다른 학우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로부터 4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학교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폭력이 단지 일진에 의해 이루어지는 폭력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심각하고도 고통스러운 폭력은 일진의 폭력이 아니라 성적에 대한 압박이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성적의 압박으로 고통 받고 심지어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일진들의 육체적 폭력과 성적에 대한 압박을 동일선 상에 놓고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 규정하는 것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육체적 폭력은 선량한 학생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지만 성적에 대한 압박은 그 학생의 앞날을 위한 투자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하지만 육체적 폭력이 힘이 약한 학우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면 성적순으로 학생들을 등급 매기는 것은 학업 성적이 뒤쳐지는 학우들에게 더 오랫동안 가해지고 지속되는 폭력이다. 그들은 평생을 학력에 의해, 학창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의 삶에서도 차별받고 부당한 대우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회는 그런 차별 받는 상황에 처하기 싫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소위 유명 대학이나 부유한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선택된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선택된 학생의 디딤돌 역할을 강요받고 있다. 이것은 그 학생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소수만 소위 성공할 수 있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왜 다양한 성격과 특성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를 받고 대우받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세상은 끝없는 경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에 경쟁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금할 수 없으며 그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필자가 육체적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이기에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라면, 학교 내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은 그들이 육체적 경쟁력을 가졌다는 것인데 왜 그런 경쟁력은 비난받고 처벌받아야 하는 것인가? 육체적 폭력은 안 되고 성적에 의한 폭력은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왜 다양한 성격과 특성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를 받고 대우받아야 하는가? 
사진 출처: Jeswin Thomas
왜 다양한 성격과 특성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를 받고 대우받아야 하는가?
사진 출처: Jeswin Thomas

오늘날 우리 사회는, 아니 현 인류는 너무나 폭력적이다. 그렇다보니 스스로 폭력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폭력인지 모른다. 우리 사회가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경쟁이다. 이 경쟁은 삶의 모든 순간을 관통한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경쟁을 받아들인다. 경쟁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자연이 그러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자연의 생명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약한 자는 잡아먹히고 강한 자가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기 때문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또 내가 잡아먹히기 전에 더 강해져서 먼저 잡아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냉혹한 자연의 법칙이고 생명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생명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다.

소위 강하고 큰 포식동물이 피식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쉬운 일 같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포식동물이 피식동물을 잡아먹기 위해서는 포식동물의 몸집이 피식동물보다 더 커야 한다. 그리고 강한 근육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어야 한다. 피식동물은 그런 포식동물을 피하기 위해 경계하는 능력이 진화되었으며 날렵한 몸과 다리 근육으로 포식동물로부터 빠르게 도망친다. 육중한 몸을 가진 포식동물이 무거운 몸으로 날렵하게 도망가는 피식동물을 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포식동물은 짧은 거리는 전력 질주를 할 수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근육 내에 다량의 젖산이 누적되어 고통 속에 숨을 헐떡이며 장거리 추적을 포기하고 만다. 또 덩치가 큰 피식동물을 공격하는 것은 목숨을 내건 도박과 다를 것이 없다. 한창 때의 건장한 무스가 도망치기보다는 반격의 태세를 갖추고 싸울 태세로 버티면 늑대들은 이내 포기하고 돌아서서 떠난다. 만약 매우 용맹한 포식동물이라 하여도 반항하는 피식동물을 공격하는 경우 반격으로 부상을 당할 가능성도 높고 결국은 이후 사냥이 불가능해져 죽음에 이르게 될 가능성도 높다. 그 결과 가장 강하고 사나운 포식동물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지 못하게 된다. 늑대 떼가 끝까지 추적하여 잡아먹는 무스는 언제나 태어난 지 채 두 해도 되지 않은 새끼거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거나 병든 개체들이다.1 늑대들은 극도의 굶주림에 내몰리지 않는 한 필사적인 대결은 결단코 피한다. 그리고 대체로 늙거나 병들었거나 나이 어린 사냥감동물만을 골라서 잡아먹는다.2

많은 포식동물들은 가급적이면 싸움을 피해 병든 동물을 사냥하거나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어치우는 청소동물로 살아간다. 
사진 출처: Richard Lee
많은 포식동물들은 가급적이면 싸움을 피해 병든 동물을 사냥하거나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어치우는 청소동물로 살아간다.
사진 출처: Richard Lee

사람들은 피식동물이 항상 포식동물의 위협에 쫓기며 불안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식동물은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삶을 영위할 뿐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살해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크게 시달리지 않으며 살아간다.3 세계적 생물학자인 베른트 하인리히가 언급했듯이 포식동물 또한 “꼭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다른 동물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지 않으려고 한다.”4 많은 포식동물들은 목숨을 걸고 다른 동물을 사냥하기보다는 가급적이면 싸움을 피해 병든 동물을 사냥하거나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어치우는 청소동물로 살아간다. 하물며 우리가 하늘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독수리도 사냥을 하기보다는 주로 다른 동물의 사체를 청소하며 살아간다.5 그래서 자연에는 크고 사나운 동물은 항상 드물고 많은 동물들은 풀을 뜯어먹거나 다른 동물의 사체를 처리하는 청소동물로 살아간다.

이는 식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식물은 자신의 적소(niche)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식물과 경쟁하고 또 곤충이나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2세를 퍼뜨려야 한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다른 식물을 죽이거나 초식동물이 자신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기 위해서 식물은 가시를 만들거나 독을 만들어 자신을 독하게 만들어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영양분을 소모하여 가시와 독을 만들어야 한다. 많은 “식물은 이렇게 경쟁에 노력을 허비하지 않는다. 이 종은 모든 칼로리를 오롯이 씨앗 만드는 데 퍼부으며, 경쟁자나 겨울 같은 물리적 역경이 다가오면 곧바로 손을 들고 사라진다.”6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은 경쟁을 하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간다. 쓸데없는 또는 지나친 경쟁과 투쟁은 서로에게 심각한 손실만을 가져다주고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속 대부분의 생명은 웬만하면 목숨 걸고 다투지 않는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그저 각자가 살아가는 길을 다양하게 찾아갈 뿐이다. 동물의 왕국과 같은 TV에서 볼 수 있는 포식동물이 피식동물을 잡아먹는 장면은 자연에서 생명의 관계의 모든 것이 아니다. 자연의 모습은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광경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생명들은 평화롭게 살아간다. 어느 생명도 한평생을 쫓기듯이 살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이 투쟁이고 쫓기듯이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우리 인류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왔던 방식은 아니다. 과거 많은 문화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지 않았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를 보면 서양문화에 잠식되기 전에 라다크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볼 수 있다. 라다크의 아이들은 주변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사랑 속에서 “라다크의 아이들은 사람들 사이의 주고받는 관계의 사슬 속에서 자신이 그 한 부분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성장”7한다. 이 아이들은 낯선 사람에게도 호기심을 갖고 친절히 대하며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자기가 가진 비스킷을 쪼개서 친구나 형제와 나누어 먹으려 한다. 이런 행동은 강제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천진난만하고 친절한 아이들의 모습은 라다크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의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왜 집단으로 학우를 왕따시키고 집단으로 학폭을 가하는 학생이 되었을까? 이것은 단지 어린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픈 환자를 돌본다는 병원에서조차 동료 간호사를 ‘태움’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왜 어린아이에서부터 성인까지 이런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것일까? 개인의 문제거나 혹은 한국인의 유전자의 문제 때문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상처받은 영혼들일 뿐이다.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거의 모든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존중 받지 못하고 상처 받으며 성장한다. 그렇게 이 사회는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영혼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만 그 경쟁이라는 것이 폭력인지 모른다. 이 사회와 국가는 경쟁력을 키우고 강해져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곧 폭력의 이데올로기이다. 자연에서 강하고 사나운 동물만이 살아남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동물은 희귀하다. 많은 생명들은 경쟁하고 싸우기보다는 서로 협력하며 살아간다. 사람이 사는 사회 또한 그러했다. 오늘날 국가와 사회는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지만 우리는 왜 그런 경쟁을 해야만 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국제적 차원에서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과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고 또 우리의 행위로 어떤 결과가 야기되고 있는지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누군가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함께 협력하여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때에만 해법을 찾을 수 있다.


  1. 폴 콜린보, 『왜 크고 사나운 동물은 희귀한가』, 김홍욱 옮김, 에코리브르, 2018, 207쪽.

  2. 폴 콜린보, 앞의 책, 210쪽.

  3. 폴 콜린보, 앞의 책, 211쪽.

  4. 베른트 하인리히, 『생명에서 생명으로』, 김명남 옮김, 궁리, 2015, 12쪽.

  5. 베른트 하인리히, 앞의 책, 124쪽.

  6. 폴 콜린보, 앞의 책, 173쪽.

  7.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양희승 옮김, 중앙books, 2007, 145쪽.

박종무

지구 생명의 근원은 해님이라고 믿는 생태주의자. 해님의 에너지를 받는 지구 모든 생태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희망한다. 특히 동물들이 생태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픈 동물을 치료하고 동물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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