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枯死木) 쓰다듬기 – 『오독(誤讀) 풍경』 중

이 팩션은 탈성장을 적정성장으로 이해하고, 그 번역된 말을 알기 전 수행에서 시작했습니다. 안전과 위험의 경계, 도시의 나무와 풀, 인간과 식물 존재의 죽음을 이야기로 엮었습니다. 최근 『식물의 사유』 중 저자 마이클 마더의 파트가 지난한 작업 과정에 영감과 힘을 주었습니다.

2021.XX.XX

1.5미터가 넘는 강아지풀을 본 적 있어?
에이, 갈대겠지.
아니야, 강아지풀이야. 강아지풀이 이렇게까지 길게 자랄 수 있다니, 새삼스러워.
그대로 들고 가서 전시하면 어때?

네가 말한다.

그럴까?
응. 새삼스러운 감정이 들면 오래오래 꽉 잡아. 알고 있었지만 흘려버린 중요한 단서였거나, 실수를 만회할 기회거나 다짐이 될 수도 있어.

뿌리째 뽑혀 바싹 말랐지만, 최선을 다하고 죽은 1.5미터가 넘는 강아지풀을 전시해서, 지난 실패를 바로 잡고 싶다는 내용1으로 기획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2022.XX.XX

나무 기둥에 안전제일, 위험이라고 프린트된 테이프가 묶여 있는 걸 발견했다. 사진제공 : 봄로야
나무 기둥에 안전제일, 위험이라고 프린트된 테이프가 묶여 있는 걸 발견했다. 사진제공 : 봄로야

아침 일찍 한강길을 걸었다. 세 그루의 나무 기둥에 안전제일, 위험이라고 프린트된 테이프가 묶여 있는 걸 발견했다. 병든 나무이니 만지지 말라는 건지, 사람의 안전 때문인지, 혹은 공사 중인 부지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나무가 포박되었어.
그러게.
다음에 올 때 똑같으면 관리사무소에 연락해보자.
그러자.

우리의 약속을 나무에 묶었다.

2022.XX.XX

망원 한강공원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걸었다. 20대로 추정되는 목소리의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말씀 좀 여쭐게요.”
“네, 말씀하세요.”
“제가 그…산책하다가 나무에 그…안전제일 띠…”
“네? 어떤 띠요?”
“제가 합정에서 망원 방향으로 한강을 따라 걷다가 나무에 그, 안전제일이라고 쓰여 있는 빨간색 테이프 있잖아요. 그거를 나무 기둥마다 붙여놨던데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공사 중인 것도 아니었고요. 제, 제가 음…… 생태 쪽 관련 작업을 하기도 하고 궁금해서요.”

너는 말을 더듬는 나를 보며 킥킥 웃고, 네가 하도 궁금해하니까 내가 물어보는 거잖아 하고 말을 담아 눈을 흘겼다.

“……아, 담당 부서로 연결하겠습니다.”

짧은 정적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진다. 애꿎이 테이핑 된 나무일지 아직은 모르기에 그들을 비난하거나, 민원을 넣으려는 건 아닌데, 그들이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봐 굳이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담당자가 전화를 이어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어떤 일로 그러시죠.”

이번에는 한강을 이용하는 시민 모드가 되어 물어보았다.

“말씀 좀 여쭐게요. 제가 합정에서 망원 방향으로 한강을 따라 걷다가 나무 기둥들에 위험이라고 쓰여 있는 빨간색 테이프가 둘러있는 걸 봤어요. 벤치 뒤에 있는 나무도 그렇고 나무 기둥마다 붙여놨던데요. 벤치에 앉아도 되는 건가요?”
“송전탑 근처에 있는 나무들 맞나요?”
“어디요?”
“송전탑이요.”
“네. 맞아요. 열 배선표지 있는 곳이요.”
“네, 위험한 거 아니고요. 고사목입니다. 베어야 할 나무들에 표시해둔 겁니다. 저희 담당은 아니고요, 곧 제거될 예정입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친절하고, 담담했다. 벤치에 앉아도 되는지 에둘러 말하는 내 심보가 이상하다며 너는 또 쿡쿡 웃었다. 고사목이라서 표시했대. 이 세 그루의 나무만 잎사귀 없이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음을, 담당자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주변은 이미 여린 녹음이 우거지고, 하얗고 노란 꽃가루가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2023.XX.XX

도시의 고사목은 자연재해 외에 파열, 폭발, 염화칼슘, 교통사고, 유지 관리상의 부주의, 입주민의 요청으로 발생한다.

조경공사 표준시방서(2019)
식재 공통 KCS 34 40 05 : 2019
(14) 고사 식물의 하자보수
① 수목은 수관부 가지의2/3 이상이 마르거나, 지엽(枝葉) 등의 생육상태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량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고사된 것으로 간주한다.
식생 유지관리 KCS 34 99 10 : 2019 / 3.2.1 식재 후 관리
(8) 고사목의 처리
① 고사목의 발생 위치와 상태를 점검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사후 대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② 고사의 우려가 있는 대형수목은 하자 기간 종료 후에도 관리주체는 책임 있게 관리하여야 한다.

2020.XX.XX

살아있어도 죽은 기분이야.
언제 죽었는데?
살아있어. 나보고 죽었다니.
죽은 기분이라면서.
아.

2022.XX.XX

우리는 나무가 죽은 줄 모르고 그 아래 벤치에 앉곤 했다. 이미 죽은 몸 아래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스쳐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나무들의 겨울이었나 봐. 너희를 잘못 이해했어. 봄이 온 지 몰랐어.

방향과 목적을 찾지 못한 연민은 어리석을 정도로 감정의 안쪽만 훑다가 질척한 미래를 불러온다. 고개를 힘차게 흔들었다. 맞잡은 네 손에서 땀이 난다. 축축하고 따뜻하다. 우리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고 안전하게 죽은 나무를 손끝으로 살살 건드려보다가, 이내 손바닥 전체로 쓰다듬었다. 두텁고 우툴두툴하다. 나무껍질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네 손바닥에 내 손등을 포갠다.

맹목적 슬픔은 이만 거둬.

너는 말라 죽은 나무를 두 팔 둘러 힘껏 움켜쥐었다가 놓는다. 덩어리진 민들레 씨가 자전거 길가를 따라 흐른다.

2023.XX.XX

죽은 ‘모든’ 나무를 위한 기도.

어떤 아보리스트(Arborist)는 죽은 나무를 베기 전 기둥 아래 막걸리를 뿌리며 나무의 넋을 꽤 길게 위로한다. 그는 2300여 년 전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설파한 철학가의 말을 곱씹으며 여전히 너끈한 줄기를 쓰다듬는다. 끝까지 버틴 뿌리, 풍성했을 잎, 부지런히 피우고 떨궜을 꽃과 열매의 모양을 상상한다. 140년째 논쟁 중인 속씨식물의 기원이 백악기 이전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는 기사도 떠올린다. 닭발 모양으로 잘려 속이 텅 빈 채 썩어 문드러져 넘어진 건물 앞 플라타너스, 미관을 해친다며 시들자마자 폐기 처리된 생태 공원의 해바라기 수 만 송이, 냄새나는 암나무라서 제거될 예정인 찻길 옆 은행나무의 고통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가, 금세 밖으로 팔을 뻗어 죽은 나무를 딛고 오른다. 죽은 모든 나무를 위한 고사(告祀)인 셈이다. 나무에 오를 자신의 안전도 빈다. 죽은 줄도 모른 채 죽지 말자고 중얼거린다. 죽기 전까지 힘껏 뒤틀리고, 웃자라고, 삐죽삐죽 비집고 나온 식물의 몸을 움켜쥐고, 쓰다듬고, 베어내며, 죽기 전까지 죽지 말라고 되뇐다. 갈라진 껍질 틈에서 비정형의, 무방비한 성장의 냄새가 난다.

2022.XX.XX

전시중인 마른 강아지풀. 사진제공 : 봄로야
전시중인 마른 강아지풀. 사진제공 : 봄로야

(전시를 마치고 돌아온) 깡마른 강아지풀은 우리 곁에서 조금씩 바스러진다. 더불어 산다는 건, 부스러진 몸의 조각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치우는 게 아무렇지 않을, 바람에 요동치고 흔들리는 감정을 가지 치지 않고 무성하게 둘 용기다.2

2023.XX.XX

우리는 다시 심긴 한강길의 나무가 조금이라도 이상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구청에 연락하기로 다짐했다.

친절한 말투로 이전 나무의 사인을 묻고, 돌아오는 답을 듣고 벤치를 없애는 건 어떨 지 물어볼 거야. 송전탑이 우리 몸에 좋을 리 없고, 나무에도 유해한 건 아닌지 물어보고, 돌아오는 답을 또 듣고, 한강 미화 따위 집어치우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조금 단호하게 빈터로 두자고 제안할 거야. 흉하지 않을까요? 라고 담당자가 되묻는다면 메일 주소를 물어보고, 공터를 꽉 채운 들꽃과 들풀 사진을 보내줘야지. 음, 그 다음은 예상하기가 어렵네?
응, 미루지 말고 내일 그 나무 보러 가자. 다녀와서 일기를 쓸 거야. 나무였던 종이를 비워 두지 않을 거야.
죽은 나무의 그루터기만 남아있으면 참 좋겠다. 송전탑 아래, 그 나무 옆을 지나가면서 매일, 새삼스럽게 살고 싶다.

너는 오늘 일기를 썼다.


  1. 관련 글: 계란꽃 파오기, 봄로야, 『생태적지혜 매거진』, 2022년 6월 11일 발행

  2. 제9회 아마도전시기획상,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아마도예술공간, 2022.3.11~2022.4.7, 전시 전경 (사진 촬영: 이재욱)

이 글을 읽는 분에게: 사람은 식물처럼 살아야 사람이 된다고 믿는 허구의 아보리스트-되기

봄로야

떠나보내거나 상실해야 하는 상념을 붙잡아 드로잉, 텍스트, 흥얼거림 등의 ‘멜랑콜리아적 해프닝’으로 기록한다.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2016-2018)과 〈다독풍경〉(2019)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사적 경험이 미술가, 작가, 음악가 등과의 대화 및 협업으로 통과되어 다른 사건이 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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