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힘을 길어 올리는 ‘인내’의 신화 – 〈성조씨 안심국〉 독후기

하늘과 땅의 결합을 통해 가택신(家宅神)인 성주신(城主神)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무가(巫歌) ‘성주풀이’는 〈성조씨 안심국〉이라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주풀이라고 하면 흔히 가족의 기초인 부부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보고 가부장으로서의 ‘성주신’의 영웅서사에 주목해온 경향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그동안 부차적으로 다뤄져온 혁신가로서의 한 인간의 인내와 주도면밀함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성주풀이 집의 신과 집터의 신의 이야기

성주풀이는 가택신(家宅神)인 성주신(城主神)과 그 부인인 터주신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무속신화이다. 사진출처 : 공유마당(강형원)

성주풀이는 가택신(家宅神)인 성주신(城主神)과 그 부인인 터주신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무가(巫歌) 또는 무속신화로,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하고, 집의 신인 성주신을 모시는 굿을 하거나 독경(讀經)을 할 때 부르거나 읽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성주신은 집의 주인인 남성을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집의 신이 된다. 이 신의 부인은 터주신 즉 집터의 신이 된다. 성주신은 대청의 대들보 위에 모셔진다. 지역에 따라 성조푸리, 성조풀이, 성주본가, 성조신가 등의 이칭이 있다.1

성주풀이에는 경기도 남부 지역에서 전승되는 황우양씨 유형과 부산 동래 지역에서 전승되는 성조씨 안심국 유형이 있다고 한다. 이 두 유형 외에도 경북 안동 지역에서 성주를 봉안할 때 부르는 성주풀이가 따로 있다고 한다. 이것은 민요적 성격이 강하고 무속신화적 성격은 약하다고 한다. 앞의 둘 가운데 성조씨 안심국 유형의 성주풀이가, 1925년 12월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에 살고 있던 최순도가 제공한 무가 책에 실려 있었는데, 이것을 손진태가 베껴서 《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에 넣었다고 한다.2

두 가지 유형 모두 하늘과 땅의 결합을 통해 성주신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이들 가운데 안심국 유형은 고전소설의 도입부처럼 시작된다. 이를 조현설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천궁대왕과 옥진부인은 늙도록 자식이 없어 아들을 얻기 위한 기도[기자치성(祈子致誠)]를 드린 뒤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는다. 관상객에게 아들을 보이니 부인을 소박하고 18세 때 무인도 황토섬에 3년 동안 귀양을 갈 관상이라고 한다. 이름은 태몽대로 안심국, 별호는 성조씨라고 짓는데 자라는 동안 일취월장하여 나이 15세가 되자 무불통지(無不通知)한 인물이 된다. 그때 성조씨가 지하궁에 집이 없는 것을 보고 집을 지으려고 내려간다. 그러나 쓸 나무가 없자 옥황에게 고하여 솔씨를 받아 뿌린 뒤 천궁으로 돌아온다. 18세에 계화부인과 결혼했으나 부인을 박대한다. 성조씨가 주색방탕(酒色放蕩)에 빠져 있다고 간신들이 주달하자 천궁대왕은 그를 황토섬에 귀양을 보낸다. 황토섬에서 짐승처럼 살다가 계화부인에게 혈서를 써서 청조(靑鳥)를 통해 전한다. 이에 귀양에서 해제되어 3년 만에 입궐, 다시 계화부인을 만나 5남 5녀를 낳는다. 그 뒤 나이 70세, 솔씨를 심은 지 49년 만에 자식들을 거느리고 지하궁에 내려와 쇠를 마련하여 각종 연장을 만든 후 나무를 베어 집을 짓는다. 집을 다 지은 후 성조씨는 입주 성조, 계화부인은 몸주 성조, 성조 아들은 오토지신(五土地神), 딸은 오방부인(五方婦人)의 신직을 각각 차지한다.’3

시련을 이긴 가부장

조현설은 성주풀이를 근본적으로 가족의 기초인 부부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보았다. 시련을 이긴 부부가 각각 성주신과 터주신이 되었으니, 옛 사람들은 이들을 잘 모시면 가정의 평안도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를 가졌을 것이라는 것이다.4 신동흔도 안심국의 사연이 가정 파괴의 위기를 서사의 축으로 삼고 있다고 보았다.5 성조씨 안심국은 탁월한 인물로 태어났지만 결혼 뒤에 주색방탕에 빠져 계화부인을 박대하다 황토섬에 유배된다. 조현설은 이를 통과의례라고 본다. 이 과정을 거친 뒤 안심국은 주색방탕을 잊고, 나이 일흔이 될 때까지 5남 5녀를 둘 정도로 부인과 원만하게 산다. 조현설에 따르면, 통과의례 이전에는 지하궁에 집을 지으러 내려갔어도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쓸 나무가 없었다는 것은 가부장의 자질을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통과의례 이후에는 소나무를 재목 삼아 집을 잘 짓는다. 조현설이 보기에, 이 같은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은 단연 안심국이다. 철을 마련하여 연장을 만드는 존재도 안심국이고 집을 짓는 것도 안심국이다. 계화부인은 그저 울거나 청조가 물고 온 안심국의 편지를 시아버지 천궁대왕에게 전달하는 수동적인 역할만 수행한다.6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때로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 인내

한편 신동흔은 〈성조씨 안심국〉이라는 이야기의 요약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세월이 훌훌 흘러 성조씨 안심국이 백발노인이 되어 지난 일을 생각하니 허무하고 슬픈 인생사였다. 문득 소년시절에 하늘에 올라 옥황상제를 뵙고 솔씨를 얻어 심은 일을 생각하고 햇수를 헤아려본즉 사십구 년이었다. 성조가 아들 다섯 딸 다섯 열 자식을 거느리고 길을 나서 나무를 살펴보니 그 사이에 장성해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성조가 열 자식을 거느리고 시냇가에 내려가 왼손에 함박 들고 오른손에 쪽박 들고 쇠를 일기 시작하는데 첫 철은 사철(絲鐵)이라 못쓰고 두 번째로 다시 일어 좋은 쇠 닷 말, 중간 쇠 닷 말, 거친 쇠 닷 말을 얻어낸 다음 풀무 세 채 차려놓고 온갖 연장을 장만했다. 큰 도끼 작은 도끼, 큰 자귀 작은 자귀, 큰톱 작은 톱, 큰 집게 작은 집게, 큰 끌 작은 끌, 큰 칼 작은 칼, 큰 대패 작은 대패, 큰 송곳 작은 송곳, 큰 자 작은 자와 괭이, 호미, 낫과 큰 못 작은 못까지 온갖 연장을 차곡차곡 마련한 후 서른세 명 목수를 골라서 집짓기를 마련하니, 비로소 인간세상 수많은 백성들이 집을 얻어서 살기 시작했다.”7

솔씨를 심는 일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홍익인간(弘益人間)] 행위이다. 열다섯 나이8에 안심국은 그런 행위를 결심하였다. 그렇게 솔씨를 심어놓고는, 안심국은 사십구 년 만에 나무를 살피러 갔다. 이는 너무 늦은 것이었나? 아닐 수 있다. 매년 살피러 다닌다 해도 매년 그 나무들을 집 짓는 데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칠 곱하기 칠. 사십구는 긴 시간이라기보다는 알맞은 때를 에둘러 표현한 것일 것이다. 안심국이 난봉꾼으로 산 세월은 ‘때로다[時乎]’ 라고 외칠 날을 견디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난봉꾼으로 보였던 안심국은,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존재로 보인다. 신동흔이 요약에 포함시킨 이런 화소에 따르면,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존재가 신이 되고 인내심은 신성이 된 것이다.

온갖 연장 열거, 간략한 집짓기 묘사

온갖 연장을 차곡차곡 마련한 후 서른세 명 목수를 골라서 집짓기를 마련하니, 비로소 인간세상 수많은 백성들이 집을 얻어서 살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 Randy Fath

또한, 신동흔의 요약에는 “큰 도끼 작은 도끼, 큰 자귀 작은 자귀, 큰 톱 작은 톱, 큰 집게 작은 집게, 큰 끌 작은 끌, 큰 칼 작은 칼, 큰 대패 작은 대패, 큰 송곳 작은 송곳, 큰 자 작은 자와 괭이, 호미, 낫과 큰 못 작은 못까지 온갖 연장을 차곡차곡 마련한 후 서른세 명 목수를 골라서 집짓기를 마련하니, 비로소 인간세상 수많은 백성들이 집을 얻어서 살기 시작했다”9 라는 부분이 있다. 씨 뿌린 지 사십구 년 만에 아들 다섯 딸 다섯 열 자식을 거느리고 숲으로 간 성조가 쇠를 일어 온갖 연장을 장만하고, 서른세 명 목수를 골라서 집짓기를 하도록 하고, 인간들이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일부다. 이야기는, 그 온갖 연장의 이름을 열거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각각의 쓰임새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안심국의 건축술에 대해서는 “집짓기를 마련하니”라고만 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목(大木)[대목수(大木手)/대목장(大木匠)]을 모셨는데, 아침 일찍 왔지만 대목은 일은 시작하지 않고 연장만 만지작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부른 사람은 조바심이 났지만, 점심도 먹고 오후도 꽤 지난 후까지 대목의 행동거지를 꾹 참아주고 있던 차, 대목이 연장을 집어들더니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더라는 것이다.10 연장만 만지작거리는 것은 행동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을 꼼꼼히 점검하고, 선결과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과정인 듯하다.

지극히 당연한 것 바로 아래에 있는 것

신동흔은 〈성조씨 안심국〉 이야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생각해보면 부부 가운데 특별히 남편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를 귀양 보낸 이 신화의 서사는 좀 각별한 데가 있다. 우리의 삶에서 부부간 화목의 열쇠를 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남성이었다. 낯모르는 남녀의 결혼과 첫날밤, 거기 불화는 또 오죽이나 많았을까. 모르긴 해도 제 뜻에 맞는 짝을 만나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을 터이다. 그래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어우러져 사랑을 찾아내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여성은 어쩔 수 없이 그 숙명을 받아들이며 험난한 삶을 온몸으로 감수하는 것인데, 이와 달리 밖으로 겉돌 수 있는, 겉돌곤 하던 존재가 남성이었다. 그가 아내를 팽개치고 밖으로 나갈 때, 짐승이 되어 나돌 때, 가정이라는 배는 검은 안개 속에서 암초에 걸리게 된다. 아내를 박대하는 죄란 이렇게 무겁다는 것, 그것이 성조씨 안심국 귀양에 얽힌 하나의 신성한 의미다.”11

이 비평은 힘 있는 자의 일방적 정복과 지배를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성찰을 통한 성숙의 기회를 열어 주는 문화가 있으며 〈성조씨 안심국〉 이야기를 공유하였던 사람들의 문화가 바로 그러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또한 신동흔은 다음과 같이 비평을 이어갔다.

“최악의 갈등과 고통을 겪어본 자, 그가 신의 자격을 지닌다는 것, 더할 바 없이 존귀한 자리에서 처절한 외로움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방황에 몸서리친 존재가 안심국이다.”12

신동흔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신성을 가지게 되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신성을 가진 것이라고 믿어주는, 한국 문화의 특성을, 〈성조씨 안심국〉 이야기에 대한 비평을 통하여 보여주려 한 듯하다.

다 읽고 나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은 신동흔의 이러한 비평의 가치에 비하면, 성조씨 안심국의 인내심과 성조씨 안심국이 온갖 연장을 마련하는 행태에 주목해보는 것은, 하위적이고 지엽말단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초보적인 독해행위라고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옛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하위적이고 지엽말단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독해 방식에도 의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 듯하다. 성조씨 안심국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야 했던 존재였고, 그가 하는 일을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고 가정하면, 성조씨 안심국이 이야기 속에서 살짝 보여준 인내심 그리고 연장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의 주도면밀함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 나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오늘날 기존의 생활방식에 의문을 품고 생활방식의 혁신을 모색하거나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사람에게도, 이 이야기의 지극히 당연한 교훈의 바닥 밑에 깔려있는 성조씨 안심국의 ‘자잘한 행동거지’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해롭지 않은 일일 듯하다.


  1. [네이버 지식백과] ‘성주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조현설] 참조.

  2. [네이버 지식백과] ‘성주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조현설] 참조. 최순도는 당시 경상남도 맹인조합장이었다고 한다.

  3. [네이버 지식백과] ‘성주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조현설] 참조.

  4. [네이버 지식백과] ‘성주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조현설] 참조.

  5. 신동흔,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살아 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출판, 2004, 287쪽.

  6. [네이버 지식백과] ‘성주풀이’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10. 11. 11.)[집필: 조현설] 참조.

  7. [네이버 지식백과] ‘성조씨 안심국’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다음 자료에도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성조씨 안심국’과 똑같은 성조풀이 요약이 실려있다. 신동흔,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살아 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출판, 2004, 279~299쪽.

  8. 이 나이는 다음 기록에 따른 것이다. “성조는 솔씨를 받아 인간세상 내려와서 무주공산에 다다라 여기저기 심어놓고 제 나라로 돌아와다. / 어느덧 삼 년이 흘러 성조 나이 열여덟이 되자 천궁대왕 옥진부인이 ……. 성조의 아내를 간태하도록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조씨 안심국’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신동흔,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살아 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출판, 2004, 282쪽.

  9. [네이버 지식백과] ‘성조씨 안심국’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신동흔,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살아 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출판, 2004, 286쪽.

  10. 고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인 듯하다.

  11. 신동흔,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살아 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출판, 2004, 288쪽.

  12. 신동흔,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살아 있는 우리 신화》, 한겨레출판, 2004, 289쪽.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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