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화폐화’에 대한 단상

가족 혹은 지인을 돌보는 데 임금 혹은 수당이 주어지면 어떨까? 무엇보다 가족 돌봄과 가족 외 돌봄의 위계를 벗어나야 한다. 그를 위해 참여소득을 곱씹어볼 만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돌봄 제공자의 책임과 권한이 아니라 돌봄 수혜자의 관점이 필요하다.

아픈 가족 혹은 지인을 돌보는 데 임금 혹은 수당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할 듯하다. 넉넉하지 못한 액수여도 돈을 받아 생활에 보탬이 된다는 점에서 좋다. 잘 보이지 않던 가족 돌봄을 사회가 인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반대로 내가 하는 돌봄의 가치가 매개진다는 점에서 반발심이 들 수도 있을 듯하다. 내가 이거 받자고 이렇게 하는 줄 아나, 하는 마음이 드려나 싶다. 한 발 더 나아가, 돌봄에 돈을 주면 돌봄을 하던 사람이 계속 돌봄을 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시작되는 건 아닐지 의문이다. 돌봄이 모든 시민의 몫이자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돈을 받은 몇몇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되면 어쩌나.

누군가 돌보는 행위에 돈이 주어진다는 건 비단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양육수당’을 들 수 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보호자에게 월 10~20만원 지급되는 수당이다. 비슷한 성격의 수당이 노인 돌봄 분야에도 있다. 노인장기요양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가족에게 지급되는 ‘가족요양비’가 그것이다. 월 15만원의 금액이다. 가족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아픈 가족을 돌보며 임금을 받는 방법도 있다. 산재보험에서는 간병 등급에 따라 하루당 간병비 혹은 간병급여를 받을 수 있는데, 거기에서도 ‘가족간병’이 포함되어 있다.

돌봄이란 행위가, 가족이 으레 해야 하는 책임을 넘어 이 세상에 어떤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by Matthew Bennett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78hTqvjYMS4
돌봄이란 행위가, 가족이 으레 해야 하는 책임을 넘어 이 세상에 어떤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 Matthew Bennett

이와 같은 제도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 하나 있다. 가족 돌봄이 다른 서비스나 가족 외 돌봄에 비해 차등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양육수당이나 가족요양비는 실제 받을 수 있는 서비스 금액으로 환산한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고, 가족요양보호사 또한 타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보다 적은 임금이 책정된다. 산재보험의 간병 등급 또한 전문 간병인보다 가족 간병인의 급여가 더 적다. 사회적으로 가족 돌봄을 인정하더라도 공적 돌봄 노동과 구별되는 셈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우리가 커뮤니티 케어라고 부르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에서는 돌보는 사람을 ‘가족 돌보미’와 ‘이웃 돌보미’로 구분해서 경제적 지원 방안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부를 재분배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떠오르는 ‘참여소득’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참여소득은 사회적 가치가 있는 활동에 소득을 보장하자는 제안이다. 4차 산업 혁명으로 일자리 지형이 변하고, 기후 위기로 인해 지금까지의 인간의 활동을 제고해야 하는 시기다. 무엇이 사회적 가치를 담보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이런 시대적 상황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돌봄은 참여소득의 대상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하다. 공동체를 유지해왔지만, 이제까지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탄소를 배출하지도 않는다. 더불어 돌봄에 참여소득을 보장하게 된다면 가족을 돌보는 일과 타인을 돌보는 일의 경계를 생각해보는 계기도 될 듯하다. 돌봄이 가족이 으레 해야 하는 책임을 넘어, 이 세상에 어떤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는지 따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문제를 두고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 즉 돌봄 제공자의 관점만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돈이 얽히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뉴스에서 자주 보게 된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 즉 돌봄 수혜자가 돌봄 제공자에게 재산, 연금, 수급비 등이 빼앗기는 모습 말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책임과 권한을 무작정 꾸겨 넣은 결과다. 그런 책임과 권한을 가족이 아니라 개인에게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가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 돌봄 수혜자의 관점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은 돌봄 수혜자의 ‘선택권’을 늘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적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고, 돌봄 노동자에게 돌봄을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에게 돌봄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논의는 우리 모두가 ‘돌봄 수혜자’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조기현

무언가 읽고 보는 시간이 삶의 동력이 됐다. 누군가 삶의 연료가 되고 싶어서 무언가 찍기도 했고 쓰기도 했다. 책 , 영화 , 공연 등이 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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