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뜻과 지혜 : 생명존중에서 기후행동까지

개발과 발전과 성장이 좋다는 패러다임 속에 자연은 인간의 편리를 위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이 곧 우리와 한몸 한생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인간중심적으로 질주해온 공업(共業)의 과보가 오늘의 기후위기 상황이다. 궁극적으로 불교환경운동은 해탈의 운동이어야 한다. 개인의 업장을 풀어헤치는 해탈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함께 받아야 하는 공업으로부터 해탈해야 한다.

부처님과의 아름다운 만남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게 무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부처님과의 인연을 꼽을 것이다. 20대 초반 삼수할 때 우연히 광주원각사 앞을 지나다 눈에 띈 것이 ‘원각사청년회법회’였다. 당시엔 절이 무엇인지도, 불교가 무엇인지도, 법회가 무언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막연한 끌림이 있었다. 아마도 이게 인연이지 싶다. 그렇게 아주 우연히 법회에 참석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내 삶이,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청년회법회엔 당시 120명 이상이 매주 참석했다. 좁디좁은 법당엔 앉을 자리도 부족한데 청년들로 가득했다. 매주 목요일엔 기초교리 공부를, 금요일엔 정기법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수련회나 야외법회 등의 일정이 계속 잡혔다. 1988년 8월에 원각사청년회와 첫 인연을 맺은 후 이후 모든 법회와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수행의 열기 또한 넘쳐나 참선모임, 절모임, 경전공부모임 등 다양한 모임들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했다.

이듬해 대학에 진학하고 곧바로 불교학생회에 들어갔다. 불교학생회는 개별 학교단위의 동아리가 아니라 전국조직으로 광주에만 당시 12개의 학교에 불교학생회가 꾸려졌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약칭 대불련)와의 인연은 이렇게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인지라 당시 대불련은 사회참여에 대한 깃발을 높이 치켜세웠다. 날마다 거리에서 대불련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여해야 했고, 법회는 집회의 형식을 띈 합법적인 공간이었다.

법회에서는 민중가요가 찬불가를 대신했고, 기도 대신 구호와 연설이 중심을 이루었다. 청년회 활동은 주로 신행을 통한 개인의 수행이 중심이었다면 대불련 활동은 개인의 수행보다는 사회참여가 대세를 이루었다. 가치관의 혼란이 찾아왔다. 당시 불교란 개인의 수행에 방점을 두고 배워왔는데 정반대의 논리로 불교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실천하는 상황에 놓이니 당연히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법회와 교육, 길거리투쟁에 꾸준히 함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수행과 사회적실천 이 두 가지로 압축된다. 자기수행은 상구보리(上求菩提), 사회적실천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일 터다. 당시엔 어느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나를 깨닫는 것이 먼저다, 아니다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먼저다.”라는 고민을 받아 안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 고민은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과 일치한다. 그래서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노래를 유독 자주 불렀다.

“세상에 태어나 생의 먼 길을 쉼 없이 걸어갈 때 인간에게서 한없이 소중한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조국에 바친 청춘이던가 나를 위한 안락이던가 동지들이여 생각해보라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그래도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결국 깨달은 게 있었다. 개인을 주체적으로 세우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과 이웃과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함께하는 것의 무게감 중 어느 것이 우선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청년회 활동만을 통해 불교를 이해하고 배우고 실천해왔다면 아마도 ‘불교주의자’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인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치열한 자기고민을 받아 안고 사회적 실천을 온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개인의 수행 못지않게 사회적 실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 함께 했던 대불련 선배들과 도반들의 경책이 없었다면 중도에 활동을 포기했을 것이다. 오로지 개인의 수행만을 위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사진 제공 :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사진 제공 :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상구보리 하화중생

그러면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단순히 상구보리는 개인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인가, 하화중생은 이웃과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받아 안고 정토의 세상을 일구어가는 깨달음인가. 이 둘은 서로 분리된 것인가. 이런 물음과 질문을 계속 던져왔던 게 사실이다. 사실 20대부터 혈기왕성한 때는 막연하게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담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런 신념이 있었다. 사회변화와 불교개혁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계속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선후가 있는가, 상구보리는 자기 안으로, 하화중생은 자기 밖으로 향하는 분리된 수행인가. 이런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부처님 법은 중도요 연기법인데 그 어떤 가르침도 따로 분리독립된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상구보리와 하화중생도 결국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자신과 이웃, 안과 밖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자. 상구보리는 자신을 올곧게 일으켜 세우는 수행이다. 이 자신을 올곧게 세워가는 그 과정이 곧 이웃과 세상을 맑음으로 향기로움으로 잔잔히 물들인다. 그래서 상구보리가 하화중생인 것이다. 그리고 하화중생은 이웃과 세상을 보듬는 수행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선 이타행의 과정이 곧 자신을 올곧게 세워가는 과정과 다름 아니다. 따라서 하화중생이 곧 상구보리가 된다. 이 둘은 분리독립된 채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여실히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어떤 것이 우선이고,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참된 수행자라면 중도와 연기적인 가르침에 따라 정진해가면 된다. 즉 상구보리도 중요하고 하화중생도 똑같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자신을 닦는 수행도 중요하고, 이웃과 세상을 보듬는 수행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둘은 현상적으로는 둘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참된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 자연을 한몸 한생명으로 받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진실되게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가족이라는 이기적인 울타리 속에 갇혀서 살아갈 수도 있다. 이웃과 세상이 고통 받든 말든, 자연과 지구가 아프든 말든, 오직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한 기도를 올린다면 이는 참된 수행자가 아니다. 실상(實相)은 나와 너가 한 몸이고,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는 허위이자 위선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종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혹시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이기적인 신행행태에 머무르지 않는가. 나 자신이 이웃과 세상과 자연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물에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가지 않는가. 옳다 그르다라는 분별심으로 편가르기를 하지 않는가. 개발과 발전과 성장은 좋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가. 여실히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진리의 가르침에서 멀어질 뿐이다.

생명존중의 가르침

지난 1990년대 중후반 북한에 식량난이 밀려왔다. 그 당시 정토회를 중심으로 북한식량난 지원 모금운동을 2000년대 초반까지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정토회 모금활동에 간헐적으로 함께 참여하다 지난 2002년 가을 초입부터 100일 동안 북한어린이돕기를 위한 모금활동을 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후 7시부터 한 시간 동안 100일기도를 한다는 마음으로 진행했다. 광주 충장로에서 2명이서 했는데 100일간 450여만 원을 모금했다.

모금된 기금은 정토회 JTS를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초겨울까지 진행된 100일 거리모금, 100일 동안 모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큰 공부의 시간이었다. 지난 2003년에는 ‘평화실천광주전남불교연대’를 지역의 불교활동가들과 함께 설립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파병 반대를 위한 종교간 연대를 통해 천막농성을 벌이고 108일간 1인 시위를 진행했다. 평화를 위해 이라크에 군인을 파병한다는 것은 실은 제국주의 첨병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부처님 가르침에 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부를 걸고 파병반대를 외쳤다. 북한의 동포들이 식량난으로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일에 손을 내미는 것이나 이라크 파병반대를 외치는 일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 즈음 지율스님께서 천성산 터널반대를 위해 천성산에 서식하는 도롱뇽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 앞에서 100일 동안 목숨을 내건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단식농성뿐 아니라 ‘도롱뇽의 친구들’ 이름으로 도롱뇽소송을 진행했다.

고속철도관통반대천성산비상대책위원회는 원고 도롱뇽을 대리하여 ‘도롱뇽의 친구들’의 이름으로 공사착공금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도룡뇽을 원고로 내세운 ‘자연의 권리’ 소송은 패소했다. “도롱뇽은 현행법의 해석상 당사자 능력을 인정할 근거가 없다”며 신청인인 ‘도롱뇽’부분을 각하하고, 나머지도 모두 기각했다. 그럼에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며 생태계 모든 구성원의 동등한 가치와 존중을 일깨우는 시금석이 되었다.

도롱뇽 소송인단 모집을 위해 광주에서도 몇 달 동안 무등산 등산로에서 서명운동을 진행했었다. 또한 북한어린이돕기 모금운동 또한 활발하게 진행했다. 이라크 파병반대, 도농룡 소송인단 모집, 북한어린이돕기 모금활동은 결국 생명운동이자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 자연은 한몸 한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현장 속에서 실천한 아름다운 길거리 수행이었다. 이후 이런 노력이 이어져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를 창립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살리기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앞세워 전국의 강을 파헤치는 대규모 토목사업을 진행했다. 22조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4대강에 16개의 보를 설치하는 프로젝트였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가로막고 수십조원의 돈을 들여 보를 설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환경시민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하고 반대하며 또는 죽음으로서 맞서도 이에 아랑곳없이 4대강사업을 밀어붙였다.

자연과 조화로운 삶 세상과 함께하는 삶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탄생되었다. 2008년 4월 19일 창립 때 수경스님께서 남기신 불교환경운동의 지향점은 우리의 활동좌표가 되고 있다. “생명평화 운동이어야 합니다. 미래세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정상적인 조건에서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인권운동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의 가치를 인정하는 공생운동이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불교환경운동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해탈의 운동이어야 합니다.”

사진 제공 :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사진 제공 :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생명평화운동은 이분법적이고 분리배제하는 것을 지양한다. 뭇 생명이 인드라망의 연결된 구슬처럼 서로 깃대어 의지하고 있다는 중도와 연기의 가르침이 녹아있다. 네편 내편 편가르기식의 주의주장과 싸움은 끝이 없는 진부한 다툼과 분쟁의 논리로 생명평화와는 배치된다. 우리는 이제껏 이런 삶에 익숙해 있고 이런 편가르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우리 모두는 편가르기 대신 생명평화를 보듬어 안아야 한다.

미래세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정상적인 조건에서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인권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권리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인권을 넘어서 동물권, 자연권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생태계의 모든 구성원의 가치를 인정하는 공생운동은 곧 인간중심적인 삶의 모습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작금의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 상황은 자연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고 타자화해 온 모습의 결과물이다.

개발과 발전과 성장이 좋다는 패러다임 속에 자연은 인간의 편리를 위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맘껏 파헤치고 파괴하며, 그 위에서 풍요로움을 구가해 왔다. 자연이 곧 우리와 한몸 한생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인간중심적으로 질주해온 공업(共業)의 과보가 오늘의 기후위기 상황이다. 궁극적으로 불교환경운동은 해탈의 운동이어야 한다. 개인의 업장을 풀어헤치는 해탈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함께 받아야 하는 공업으로부터 해탈해야 한다.

기후위기, 이제 행동이 필요한 때

불교환경연대에서는 지난 해 정기총회에서 ‘기후위기대응 문명의대전환’ 특별위원회를 꾸렸다. 기후위기는 이제 어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어느 한 국가만의 문제도 아니다. 전 세계적인 공업의 문제에 이제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고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현황은 2018년 727.6백만톤으로 1990년 대비 149%나 증가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 악당국가의 반열에 올라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2018년 온실가스 배출량 순위는 세계 11위, 배출 비중은 1.51%이며, 누적배출량 역시 세계 13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배출량 순위는 중국, 미국, 인도, 러시아, 일본, 인도네시아, 이란, 브라질, 독일, 캐나다 다음으로 우리나라다. 부문별 온실가스 배출량을 살펴보면, 에너지전환부문, 산업부문, 수송부문, 건물부문, 농축산부문, 폐기물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에너지전환과 산업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 다음이 수송부문이다.

이 내용은 2050탄소중립위원회를 꾸려서 한 달 남짓 탄소중립 초안을 만들어서 지난 8월 5일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환경단체를 비롯한 기후위기비상행동에서는 이번 정부의 발표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형국이다. 기 제출된 탄소중립위원회의 초안은 전 세계적 탄소중립의 정책과 방향에 부합하지 못하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보다 온실가스 총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함에도 이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은 늘어만 가고, 이 때문에 지구의 온도는 지속적으로 상승해가고 있다. 가뭄, 폭우, 폭염, 폭설, 산불 등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우리는 무책임하게 기존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참으로 암담하다. 개발과 발전과 성장이 좋다는 믿음 속에서 쉼 없이 내달려온 결과 그 성적표는 바로 오늘의 ‘기후위기’다. 지금도 문제지만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지구온난화의 결과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새로운 변화의 시스템을 받아 안아야 하고 대전환을 모색해야 함에도 언젠간 좋아지겠지 하는 안일한 대응과 대책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지 성찰할 일이다. 2020년 2월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기후위기 금요행동’을 진행해 오고 있다. 어느덧 2년째 길거리에 서고 있다. 함께 금요행동을 하는 이들은 20대 청년들이다. 매주 청년들과 함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땡볕 아래서 금요행동 피켓을 들고 있다. 이들 청년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다.

정부가 밝힌 대로 기후위기대응은 더 이상 장기적인 과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는 당장의 시급한 현안, 구체적이고 신속한 행동이 긴요한 상황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앙이 연일 계속되고 있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해수면은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경고 메시지를 넘어섰다. 회복불능의 상황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노력을 곳곳에서 실천해야 한다. 정부에 대해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서 제대로 된 2050 탄소중립 정책 안이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 작금의 기후위기는 공업(共業)의 과보이기에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냥 작은 생활 속 환경실천을 하는 것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러려면 공부해야 한다.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실천해야 한다. 대전환을 해야 한다. 그래야 공업의 고삐가 풀린다.

이해모

지난 2008년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를 창립한 이후 현재 사무총장 소임을 맡고 있으며,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참여를 고민하면서 광주전남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반한 평화, 환경 등 다양한 공익적 활동을 해가고 있다.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는 불교환경활동, 불교의 사회참여활동,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환경교육활동, 회원 및 소모임 활동, 시민사회연대활동 등의 역할을 모색하고 실천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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