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동조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빗나간 믿음
김현우는 2022년에 쓴 글 「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1에 기후 환경 위기의 해법은 결국 “지구와 국가 그리고 지역이 ‘살림’의 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김현우는 “주류적 소비문화와 시장으로부터의 소비자의 작은, 상대적인 탈동조화”2가 ‘죽임’을 멈추고 살림을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방법이자 첫 걸음이라고 적었다.
지금, 다른 동네의 자연을 수단으로 삼고 파괴하여 만든 물건을 소비하는 것을 통하여 내 살림을 편하게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의 일상이 되어있다. 이런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성장을 하면서도 환경을 지킬 수 있다”3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생각을 탈동조화(de-coupling)라고 한다. 김현우는 탈동조화를 “경제 성장의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외부 효과가 동조화되지 않는 현상”4이라고 설명한다. 김현우는, 탈동조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현실에서 탈동조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보며, 작동하지도 않는 탈동조화가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유럽과 미국의 오염 산업은 중국과 제3세계로 옮겨졌을 테고, 지금은 효율이 향상되고 오염이 줄어든 것처럼 보여도 부담은 미래 세대와 미래의 지구로 전가되었을지 모른다.”5
김현우는 “상대적 탈동조화 정도가 아니라 지구의 행성적 한계를 넘어서지 않을 절대적 탈동조화 또는 절대적 유지와 감축”6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가 보는 지금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은 탈동조화와 절대적 감축 모두를 보장하기는커녕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7
의도적 진부화 vs. 의도적 게토화

사진 출처: Brian Phetmeuangmay
탈동조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빗나간 믿음에 더하여, 녹색 성장 · 녹색 자본주의 · 생태적 현대화 등등의 이론과 관념들이, 성장을 하면서도 환경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되어 유포되면서 사람들을 안심하게 하는 가운데, 끝없는 확장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과 이윤을 위한 경쟁은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이 낳는 폐해 중 대표적인 현상 또는 전략이 ‘의도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8이다. 이는 이미 192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 신제품 판매 증진을 위해, 제품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제한하거나, 수리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광고를 통해 기존 제품이 유행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소비자가 제품을 새로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판매 촉진 책략이다. 이는 과시적 소비, 자원 낭비, 환경 오염으로 이어지곤 하였다.
세르주 라투슈는 『낭비 사회를 넘어서』9에서 의도적 진부화가 단지 자원 소비를 부추길 뿐 아니라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는 문화적 병리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의도적 진부화가 유발하는 경제 현상이 인간이 소비를 할 때만 존엄과 가치를 확인하게 되는 본말전도를 극명히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10 제이슨 히켈은 『적을수록 풍요롭다』11에서 “포스트 자본주의 세계”로 가는 길의 첫 단계로 의도적 진부화 끝내기를 꼽고, 두 번째 단계로 광고 줄이기를 말한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는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 입법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12
이러한 비판과 대안들에 더하여 김현우는, 의도적 진부화에 대응하는 작은 반란이라면서 ‘어쩌면 자발적인 게토13화14, 달리 말하자면 탈성장의 실천을 제안했다. 이는 “의도적으로 적게 소비하고 오래 이용하며 나눠쓰고 고쳐쓰는 실천”15이다. 김현우가 이것을 근본적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구매력을 가진 경제 집단이 최신 승용차 · 스마트폰 · 공기청정기를 구매하기를 늦춘다면 자원은 그만큼 덜 소모될 것이다. 시민의 일정 비율이 의도적으로 적게 소비하고 오래 이용하며 나눠쓰고 고쳐쓰는 소비 태도를 지속한다면 자원은 훨씬 덜 소모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예로 든 물건들이 없이도 아주 오랫동안 인류가 지속되어왔던 점을 감안하면, 그 물건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원 소모가 불필요한 것은 아닌가 조금이라도 의심하여보게 된다. 이러한 의심을 피할 수 없음에도, 덜 소모하려는 의지는 중요하다. 볼프강 M. 헤클은 『리페어 컬처』16에 수리할 권리 같은 제도적 해법에 대한 기대도 적어놓았지만, “나를 둘러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곧 인간으로서의 나를 말해준다”는 생각도 적어놓았다. 이는 자원 소모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만으로도 삶의 방식이 변화되어 스스로 자신을 재규정하게 될 것이고 우주라는 환경이 이러한 재규정의 영향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이는 추상적이지만 의미 있으며, 의미 있지만 추상적이라 평할 수 있겠다. 이에 비하면 좀 더 구체적으로, 김현우는 의도적 게토화를 일종의 출발점으로 본다. 그는 의도적 게토화와 수리와 순환 등등을 개개 인간이 의도적 진부화를 거부하는 길로 접어드는 첫 걸음들로 보고, 이들을 “주류적 소비문화와 시장으로부터의 소비자의 작은, 상대적인 탈동조화”17라고 표현하였다.
‘작은, 상대적인 탈동조화’에서 시작하여, ‘절대적인 탈동조화’를 거쳐
김현우는 탈동조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이 근거없는 것임을 지적하였으나, 그것이 포기할 수 없는 지향성이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그는 ‘작은, 상대적인 탈동조화’를 가벼이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보지도 않았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가 절대적인 탈동조화를 언급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글의 앞부분에서도 인용한 바와 같이, 김현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핵심은 상대적 탈동조화 정도가 아니라 지구의 행성적 한계를 넘어서지 않을 절대적 탈동조화 또는 절대적 유지와 감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장은 탈동조화와 절대적 감축 모두를 보장하기는커녕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18
그런데 절대적인 탈동조화 또한 일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타는 아니다. 절대적인 탈동조화(absolute de-coupling)는, 경제가 성장함에도, 그것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절대적인 수치로 감소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말일 뿐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경제 성장의 속도보다 환경 파괴 요인의 감소 속도가 더 빠른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상대적인 탈동조화를 경제 성장이 환경 파괴량 증가보다 빨라 환경 부하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환경 파괴량은 증가하는 상태로 정의하고 이와 비교한다면, 논리상에서는 절대적인 탈동조화와 상대적인 탈동조화의 차이가 선명하게 대비될 수 있겠지만, 실제적으로는 양자 모두 추상적 목표 내지는 희망사항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김현우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진다.
“생태위기 상황의 해법은 결국 지구와 국가 그리고 지역이 ‘살림’의 원리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데에 있다”19
이 화두는 그의 다음과 같은 상상과 연결시켜 보아야 할 듯하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구매력을 갖고 시장 흐름을 좌우할 능력이 있는 경제 집단이 최신 승용차, 스마트폰, 공기청정기를 구매하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절대로 안 사는 것이 아니라 최신품이 출시된 후 바로 구매하지 않고 6개월 또는 1년을 기다려 구매하게 된다면? 아마도 시장이 급속히 얼어붙고 관련 주가가 폭락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기업과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위협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안달복달하며 소비를 자극하는 광고의 매력도 줄어들 것이고 결국 자원과 에너지 소비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어떤 용도와 내구성을 지닌 제품을 어떤 공정으로 얼마만큼 만들어 판매 또는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정부와 시민, 기업 대표들이 모인 위원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참여적 계획경제 같은 게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자원 소모를 대하는 태도와 인본주의
기후 환경 위기, 좁혀 말하면 자원 소모에 대처하기 위한 여러 모색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전개에 어떤 방식으로든 엇박자를 놓는 ‘몸짓’ 같아 보인다고 할 만한 것들이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을 전면화한 대표적 이데올로기라고 할만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전개에 어떤 방식으로든 엇박자를 놓는 몸짓들은 각기 다른 방식과 강도로 욕망 긍정의 태도와 충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탈성장을 선택하여 자원 소모에 대처하고자 하는 몸짓은 욕망 긍정의 태도와 가장 강하게 충돌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욕망 긍정의 태도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유교 문화를 꼽을 수 있다. 유교라고 하면 보편 도덕 법칙[천리(天理)]와 욕망[인욕(人欲)]을 선명하게 대립시키면서 정치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을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로 하는 정치론 내지는 도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가 욕망 긍정의 태도를 강하게 보여준다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며 인륜적 세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정치론 내지는 도덕론 즉 인본주의적 정치론 내지는 도덕론이기 때문이다.
유교는 정치체의 안정을 추구하는 동시에 욕망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군자의 도는 쉽게 드러나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꼭꼭 숨어 누구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시에 “솔개 날아 하늘로 치솟아가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팔딱 뛰어오르네.”라고 했으니, 도라는 것이 위아래에서 관찰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부부로부터 시작되며 극진함에 이르러선 천지에서 살펴진다.”20

이 글귀는 『중용(中庸)』 제12장 전체이다. 자사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부부(夫婦)’는 넓은 의미로는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부부관계’ 즉 성교를 의미한다. 이 글에는 이 ‘부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다. 이 고전에 대한 주요한 해설서에도 이 부부라는 말에 대한 이렇다 할 해설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이 글이 널리 읽혔던 문화권에서 부부관계 즉 남녀 사이의 성교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여겨졌음에 대한 방증(傍證)이라 할 수 있다. 남녀가 성교하는 것이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해야만 하는 일이어야 하는 정치체. 서로 다른 집안 출신의 남녀가 합쳐서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것[이성지합(異姓之合)]을 최소단위로 하고 거기에서 농업노동력을 재생산함으로써 유지가 가능하여지는 정치체. 『중용』은 이러한 정치체를 정당화하는 정치론과 도덕론을 담고있는 텍스트로 그 정치체 내에서 유통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부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 위의 인용문을 다음과 같이 읽어볼 수 있다.
“이 정치체를 이끌고 가야 할 사람이 지켜야 할 바[군자의 도]는 널리 적용될 수 있는 것[비(費)]21이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는 것[은(隱)]22이다. 그래서 그것이 내 속에도 있음을 자각하려면 약간의 수양이 필요하다. 수양을 통하여 그 도가 내 내면에 내재함을 알고 그것을 굳건한 상태로 길러내고 나면, 그 도에 입각하여 하늘 높은 곳부터 물속 깊은 곳까지 온 천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물(事物)23]을 꿰뚫어 보고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수양하는 일이 시작부터 너무 어려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수양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수양은 성교처럼, 누구나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고, 하고 싶어 하며, 정치체의 유지를 위하여 해야만 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하늘 높은 곳부터 물속 깊은 곳까지 온 천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꿰뚫어 보고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 제12장은 “군자의 도는 쉽게 드러나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꼭꼭 숨어 누구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君子之道, 費而隱]”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누구나 수양할 수 있음[보편수양가능성]을 내비치면서 꼭꼭 숨어있는 것을 키워 드러내는 수양을 모두에게 권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평등을 중시하는 텍스트라고 할 만하다. 여기에 제시한 의역(意譯)에 따라 이 텍스트가 성교를 들먹인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모두가 좋아하며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니만치, 그 또한 평등을 옹호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기에서의 보편과 수양과 가능성은 ‘주어진 자연 속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자리매김된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보편이든 수양이든 가능성이든, 유교문화에서 그것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라는 한계 속에서의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뒤집어서 보면, 그 주어진 세계에서 주인공은 인간이 되는 것 같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유교 문화는 인본주의적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니 유교는 평등을 중시하고 보편성 적용 가능한 규범이나 도덕성을 중시하되 먼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적어 놓은 바와 같이, 유교라고 하면 보편 도덕 법칙[천리(天理)]와 욕망[인욕(人欲)]을 선명하게 대립시키면서 정치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을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로 하는 정치론 내지는 도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유교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이기도 하다. ‘산수를 즐긴다’는 뜻의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중국 문화 특히 유교문화는 주어진 것[산수(山水)]에서 만족[요(樂)] 혹은 즐거움[락(樂)]을 찾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문화에서는 주어진 세계를 넘어서는 것을 격하게 찬양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 비하면, 모두의 내면에 이미 값진 것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 하고 그것을 드러내려 노력하길 권하는 모습은 쉽게 눈에 뜨인다. 그런데 이 ‘겸손한’ 도의문화(道義文化)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이들이 말하는 천하가 광대무변(廣大無邊)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그 천하에 대하여 사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유교문화는 가까운 곳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하면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도덕심리론의 체계 같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있는 능근취비(能近取譬)라는 말은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비유(이치)를 취한다’는 뜻의 말이다. 이는 공자가 그의 제자 자공에게 ‘어짊(仁)’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입장을 통해 남의 입장을 미루어 헤아리고[(이기급인[以己及人]), 내 주변의 작은 일부터 실천하여 그 실천의 범위를 넓혀 나가라는 권고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내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내가 이루고 싶으면 남을 이루게 하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논어(論語)』 「옹야(雍也)]” 라는 권고가 이어지는데 이를 보면 그 뜻을 더 선명히 이해할 수 있다.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여 즐기는[낙명(樂命)] 태도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지만, 이 겸손한 도의문화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매김하기에 그의 욕망 또한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는 듯하다. 유교적 교양인들은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듯 죽음도 받아들이는데, 그러면서도 성교를 통하여 자신을 복제(複製)함으로써 영생(永生)한다는 강력한 느낌을 간직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 같다. 이 또한 하나의 강력한 욕망의 분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영생은 문화 계승이라는 규정에 의하여 설명되고 정당화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보편 도덕 법칙[천리(天理)]와 욕망[인욕(人欲)]을 선명하게 대립시키면서 정치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을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로 하고 있음에도,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매김하기에 그의 욕망 또한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 유교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한 사회에서 기후 환경 위기 혹은 자원 소모에 대처하기 위하여 탈성장을 모색하는 사유와 행동은, 자본주의의 전개에 어떤 방식으로든 엇박자를 놓는 ‘몸짓’인 동시에, 유교적 인본주의의 저변에 깔려있는 특이하면서도 강고한 욕망 긍정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한 긴장(緊張)과 함께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아 선호를 타파하려 하지만 삶의 과정에서 내면화된 남아선호를 문득문득 확인하는 남한 사람이라면, 그 남아 선호와 관련된 문화 계승 의식 즉 자신의 복제로써의 자손을 남기려는 욕망과 그에 수반하는 가족애와 교육열 등등,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억제하려는 ‘표면(表面)’과는 또 다른 한국 유교의 ‘이면(裏面)’으로부터 자신이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듯하다. 남한에서 탈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정에 더더욱 민감해야 할 듯하다.
김현우, 「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기획),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3-06-05, 31~68쪽. ↩
위의 글, 68쪽. ↩
위의 글, 62쪽. ↩
위의 글, 62쪽. ↩
위의 글, 63쪽. ↩
위의 글, 64쪽. ↩
위의 글, 64쪽. ↩
계획적 진부화, 계획적 노후화, 고의적 진부화, 고의적 노후화 등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옮김), 『낭비 사회를 넘어서;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민음사, 2014-04-11. [Serge Latouche, Bon pour la casse! Les deraisons de l’obsolescence programmee, 2012] ↩
김현우, 「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 64쪽 참조. ↩
제이슨 히켈 (지음), 김현우•민정희 (옮김), 『적을수록 풍요롭다;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창비, 2021-09-24 [Jason Hickel, Less is More: How Degrowth Will Save The World] ↩
김현우, 「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 65쪽 참조. ↩
게토(Ghetto)는 역사적으로 소수 인종•민족•종교 집단이 강제로 격리되어 살던 도시 내 특정 구역을 말한다. 16세기 베네치아에서 강제로 유대인을 특정 지역에 거주하도록 제한한 것이 첫 번째 게토인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나치 독일이 유럽 곳곳 특히 폴란드 바르샤바에 만들었던 유대인 격리 구역의 이름으로 유명하여졌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의 자연사 및 절멸을 유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을 몰아넣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한한 폐쇄적 거주지로 기능하였던 게토는 의도적 게토(Intentional Ghetto)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말은 노숙인 등 특정 집단을 도시의 특정 공간에 의도적으로 모이게 하는 정책을 비판할 때 사용된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이 말은 미국 등에서 소수 인종이 주로 거주하는 빈민가•슬럼 등을 뜻하는 명사로 쓰이기도 하고, 품위 없는 • 교양 없는 • 질 낮은 등의 의미를 담은 형용사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비유적 표현으로, ‘정신의 게토’라는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공간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위험한 상태를 지칭한다 ↩
김현우, 「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 66쪽 참조. ↩
김현우, 「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 66쪽. ↩
볼프강 M. 헤클 (지음), 조연주 (옮김), 『리페어 컬처; 쓰고 버리는 시대,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는 삶』, 양철북, 2021-05-03. [Wolfgang M. Heckl, Die Kultur der Reparatur, 2013] ↩
김현우, 「의도적 진부화와 의도적 게토화」,68쪽. ↩
위의 글, 63쪽. ↩
위의 글, 68쪽. ↩
『中庸』 제12장: “君子之道, 費而隱.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
비(費)는 쓰임이 넓음[用之廣(용지광)] 혹은 쓰임이 넓은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
은(隱)은 핵심이 미미함[體之微(체지미)] 혹은 수양 가능성은 숨겨져 있고 미약하지만 분명히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
유교경전의 문맥과 해설들을 보면 유교적 교양인들은 물(物)을 물질[matter]로 이해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그들에게 사물(事物)이라는 말은 대개 정치적 사회적 사건[event]을 의미한다. 이는 아마도 유교문화가 주어진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적정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하는 목적의식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생성되고 전개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