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바틀비 혹은 상투어」 ③ :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삶, 그리고 소설

이 글은 1993년 『Critique et Clinique』에 실린 질 들뢰즈(Gille Deleuze)의 「Bartleby, ou Formule」(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93. Chapitre Ⅹ, pp. 89-114.)를 번역한 것으로, 2000년에 한국어판 「바틀비, 혹은 상투어」(김현수 옮김)라는 제목으로 『비평과 진단: 문학, 삶 그리고 철학』(인간사랑, P125-163)에 실린 적이 있다. 이번에 「바틀비 혹은 상투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앞으로 총 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펜테질레아와 아킬레우스가 그려진 식기(B.C.470-460). 출처: 독일 바이에른 주립 유물 박물관 소장. The Yorck Project (2002) 10.000 Meisterwerke der Malerei (DVD-ROM).
펜테질레아와 아킬레우스가 그려진 식기(B.C.470-460). 출처: 독일 바이에른 주립 유물 박물관 소장. The Yorck Project (2002) 10.000 Meisterwerke der Malerei (DVD-ROM).

우리는 에이해브와 바틀비만큼이나 서로 다른 인물들을 한데 뒤섞는 과정 중에 있다. 하지만 그렇기는커녕 모든 것이 그들을 서로 대립하게 하지 않는가? 멜빌의 정신의학은 끊임없이 다음 두 극에 호소한다. 편집증우울증, 악마들과 천사들, 고문하는 자들과 희생자들, 민첩한 자와 느린 자, 천둥같이 격렬한 자와 화석처럼 굳은 자, (모든 처벌을 넘어서 있는) 처벌할 수 없는 자와 (모든 책임을 넘어서 있는) 책임이 없는 자 등. 에이해브 선장이 그의 불같은 분노와 광기의 작살을 발사할 때, 그는 무엇을 한 것인가? 그는 계약을 깬 것이다. 그는 그가 다른 고래를 건너뛰고 한 고래를 선택하는 일 없이 맞닥뜨린 건강한 고래는 모두 사냥해야만 하는 포경선의 법을 배반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식별불가능한 ‘되기’에 던져진 에이해브는 어떤 선택을 한다. 즉 그는 자기 배의 선원을 죽음의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모비딕과 자신의 동일시를 추구한다. 바로 이것이 일등 항해사 스타벅이 격렬하게 반대한, 심지어 그로 하여금 배신한 선장을 죽이는 꿈을 꾸게 만든 괴물스러운 선호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저지른 가장 특별한 죄이다.1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레아’(그녀는 여자 에이해브이다)가 바로 이 사례에 해당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식별불가능한 분신인 아킬레스처럼, 다른 적을 놔두고 한 명의 적을 선택하는 일을 금지시킨 아마존 부족의 계율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스를 자기의 적으로 선택했다. 여사제와 아마존 부족은 이것을 광기로 하여금 식인적 동일시를 허용하게 하는 하나의 배신으로 간주한다. 그의 마지막 소설 『빌리 버드』에서 멜빌은 스스로 또 다른 편집증적 악마를 선임 위병 하사관인 존 클래가트의 상(像)으로 만들어낸다. 우리는 클래가트의 부수적 기능에 관해 어떠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 클래가트도 에이해브 선장도 심리적 사악함의 사례는 아니다. 자신의 사냥감을 고르는 일, 그에게 모든 이에게 동일한 규율을 적용할 것을 요구한 군함의 법을 준수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사랑으로 선택된 희생양을 선호한 일, 이것은 형이상학적 도착의 사례이다. 이것은 화자가 어떤 고대적이고 신비로운 이론을, 사드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폭로를 떠올리면서 제시한 것이다. 즉 감각적인 제2의 본성/자연이 법(혹은 계율)에 의해 지배되는 반면, 선천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은 무시무시한 초감각적인 제1의 본성(그것은 근원적이고 대양(大洋)적이다)에 참여한다. 제1의 본성은 어떠한 법도 알지 못한 채, 그들을 관통하는 그들 자신의 비합리적인 목적―무(無), 아무것도 아님―을 추구한다.2 에이해브는 비록 그 뒤에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벽을 깨부술 것이며, 무(無)를 그의 의지의 목표로 만들 것이다. “내게는 그 흰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3 멜빌에 따르면, 심리학자의 눈이 아니라 예언자의 눈만이 심연의 피조물들인 그러한 모호한 존재들, 그 “악의 신비”를 … (그것들이 벌이는 광적인 모험을 막을 수는 없지만) 식별하거나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멜빌의 중요 등장인물들을 분류하는 입장에 있다. 한쪽 극에는, 무에의 의지에 이끌려 괴물스러운 선택을 하는 편집증자 혹은 악마들(에이해브, 클래가트, 바보[『베니또 쎄레노』에서의 폭동주모자의 이름-옮긴이] 등)이 있다. 그러나 다른 극에는 비록 가장 어리석은 자이지만, 죄가 없고 순수한 피조물, 본질적으로 연약하지만 이상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는 천사 같거나 성인 같은 우울증자가 있다. 본성에 의해 화석처럼 굳어있는 그들은 어떠한 의지도 없으며, 무에의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무(우울증적 “부정주의”)를 … 선호한다. 그들은 돌-되기에 의해서만 의지를 부정하고, 그들 자신을 이러한 중지(中止)(suspension)로 정화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4 그러한 인물로는 쎄레노, 빌리 버드, 무엇보다도 바틀비가 있다. 그리고 이 두 유형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대립된다 하더라도—전자는 선천적인 배신자들이며 후자는 그들 자신의 본성상 배신당하는 자들이다. 전자가 그들의 자식을 먹어치우는 괴물스러운 아버지들이라면 후자는 아버지 없이 버려진 아들들이다—, 멜빌의 글쓰기가 그렇듯 그리고 클라이스트의 글쓰기처럼, 그들은 하나이면서 동일한 세계에 출몰한다. 그들은 정지하고 고정된 과정들과 광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절차들이 양자택일되는 그 세계 안에서 번갈아 나타난다. 즉 문체, 긴장증들(catatonia)과 가속도들이 연속하는 문체. 양극 즉 두 유형의 인물들인 에이해브와 바틀비가 이러한 제1의 본성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본성 속에 거주하고, 그 본성을 구성한다. 모든 것이 그들을 대립하게 하지만, 그들은 동일한 피조물(양쪽에 모두 사로잡힌, 그저 “+”와 “-” 기호로, 즉 에이해브와 바틀비로 표시될 뿐인, 제1의 근본적이고 완고한 피조물)일지 모른다. 또는 클라이스트에게 있어서는 무시무시한 펜테질레아와 작고 사랑스러운 케트헨이 있는데, 전자가 양심을 넘어서 있다면, 후자는 양심 이전에 자리한다. 선택하는 그녀와 선택하지 않는 그녀, 암늑대처럼 울부짖는 그녀와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하고 싶은 그녀로서 말이다.5

이 양자택일 속에서 변호사는 바틀비가 아닌 너무나도 인간적인 계율을 선택해야 했다. 
사진 출처: Sang Hyun Cho
이 양자택일 속에서 변호사는 바틀비가 아닌 너무나도 인간적인 계율을 선택해야 했다.
사진 출처: Sang Hyun Cho

마지막으로 멜빌에게는 세 번째 유형의 인물이 존재한다. 법의 편에 있는 자, 제2의 본성을 지닌 신과 인간의 계율의 수호자, 즉 예언자가 존재한다. 『베니또 쎄레노』(1855)6의 데라노 선장은 예언자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모비딕』의 이슈메일과 『빌리 버드』의 베레 선장, 그리고 『바틀비』의 변호사 등은 모두 이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즉 이들은 제1의 본성의 존재인 거대한 편집증적 악마들이나 아니면 성인 같은 죄 없는 자들, 그리고 때로는 양자 모두를 가능한 한 많이 파악하고 이해할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들 자신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매함을 지닌다. 비록 이들이 자신들을 너무나도 매혹하는 제1의 본성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제2의 본성 및 규율을 대의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부성(父性)의 이미지를 견지한다. 즉 이들은 좋은 아버지들, 자애로운 아버지들(혹은 적어도 이슈메일이 퀴퀘크를 대할 때와 같은 보살피는 큰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악마들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악마들은 법에 있어서 너무나 빠르고, 또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다. 이들 중 누구도 죄 없는 자, 책임질 수 없는 자를 구할 수 없다. 이들은 법의 이름으로 죄 없는 자들을 제물로 바치고, 아브라함의 번제물로 만든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성적 가면 뒤에, 일종의 이중적 동일시를 가지고 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사랑을 느끼는 죄 없는 자와 동일시하지만,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사랑하는 죄 없는 자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기 때문에 악마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이들은 배반하지만 에이해브나 클래가트가 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배반한다. 에이해브와 클래가트가 법을 어기는 반면 베레 선장이나 변호사는 대체로는 공표할 수 없는 암묵적 협약을 법의 이름으로 깬다. (심지어 이슈메일조차도 자신의 야만적인 형제인 퀴퀘크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유죄판결을 내린 죄 없는 자들을 계속해서 소중히 여긴다. 베레 선장은 빌리 버드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죽으며, 화자인 변호사의 마지막 말은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이다. 이 말은 어떤 연결관계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지시한다. 이 양자택일 속에서 변호사는 바틀비가 아닌 너무나도 인간적인 계율을 선택해야 했다. 자신들이 지닌 모든 모순들과 더불어 두 개의 본성들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은 이 인물들은 지극히 중요하지만, 다른 두 유형의 인물들이 누린 명성을 얻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들은 증인들이자, 화자들, 해석자들이다. 이 세 번째 유형의 인물을 벗어나는 것, 그리고 다른 두 유형의 인물들 사이에 정착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사기꾼』(1857)(누군가는 치료제-인간(Medicine-Man)이라고 말할 법하다)에는 소설에 대한 멜빌의 성찰들이 간간이 섞여 있다. 이 성찰들 중 첫 번째는 우월한 비합리주의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14장) 삶이 자기에 관한 한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고 또 명료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무시하는 너무나도 많은 모호하고 식별불가능한 비결정의 지대들을 자신의 피조물들 속에 남겨두는 반면에, 왜 소설가는 자기 인물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그 인물들에 근거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고 여겨야만 하는가? 정당화하는 것은 삶이다. 즉 삶은 정당화될 필요가 없다. 영국 소설, 그리고 더 나아가 프랑스 소설은, 비록 마지막 부분에서만 일지라도, 합리화할 필요를 느끼며, 또한 심리학이 합리주의의 최후의 형태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양의 독자는 이 최종적인 말을 기다린다. 이 점과 관련해 정신분석학은 이성의 요청을 되살려 놓았다. 그러나 비록 정신분석학이 위대한 소설가의 작품들을 거의 논한 적이 없다고는 하더라도, 정신분석학과 동시대를 산 위대한 소설가 중 누구도 정신분석학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국 소설의 기본 방침은 러시아 소설과 마찬가지로, 소설을 이성의 질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으며, 무(無) 속에 존재하고 진공 속에서만 살아가며 논리와 심리학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비를 최후까지 유지하는 그런 인물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멜빌에 따르면, 그들의 영혼조차도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진공”이며, 에이해브의 신체는 “텅 빈 조개껍질”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의 상투어를 가진다면, 그것은 분명 설명할 만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러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히브리 신화의 상투어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상투어로 남아 있다. 지하생활자는 2×2를 4로 만드는 것을 막지 못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을 체념하고 따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2×2가 4로 만들어지지 않기를 선호한다.)7 위대한 소설가(멜빌,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무질 등)에게 중요한 것은 사태들이 수수께끼이지만 임의적이지 않게 남겨놓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논리, 분명한 하나의 논리, 하지만 우리를 이성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지 않으면서, 삶과 죽음의 가장 내밀한 깊이를 파악하는 논리이다. 소설가는 심리학자의 시선이 아니라, 예언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 멜빌에게 있어서, 세 가지의 인물 범주들은 이러한 새로운 논리에 속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이 논리는 그러한 인물 범주에 속해 있다. 일단 이 논리가 온대 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모두가 선망하는 지대, 극한(極寒)의 지대에 도달했다면, 삶처럼 소설 역시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8 사실상 이성과 같은 그런 것은 없다. 즉 이성은 조각들과 파편들로만 존재한다. 『빌리 버드』에서, 멜빌은 편집증자들을 이성의 주인으로 규정하는데, 바로 이것이 그들이 놀라움을 느끼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이다. 하지만 또한 이것은 그들의 이성이 행동에 있어 정신착란을 겪는 이유이며, 그들이 이성을 이용하고 그것을 그들 자신의 주권적 목적, 사실은 고도로 비합리적인 목적에 복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울증자들은 이성의 추방자이다. 이성이 그들에게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획득하려고 그들 자신을 이성으로부터 배제했는지 아닌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들은 식별불가능한 자, 이름붙일 수 없는 자와 합쳐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예언자들조차 그저 이성의 표류자일 뿐이다. 만일 베레 선장, 이슈메일, 변호사 등이 너무나 단단히 이성의 잔해에 매달려 있다면, 그들이 너무나 열심히 그들의 도덕성을 회복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보았던 것이 그들에게 영원히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멜빌이 두 번째로 소설에 대해 언급하는 것(44장)은 한 소설의 등장인물들 간에 본질적인 차이를 도입한다는 점이다. 멜빌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참된 근원적/원초적인 자들을, 단순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나 특이하고 특수한 인물들과 혼동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한 소설에서 아주 많이 있을 수 있는 특수한 인물들이 그들의 형태를 규정하는 특성들을, 그들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속성들을 갖기 때문이다. 즉 특수한 인물들은 그들이 놓인 환경에 의해 그리고 서로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그래서 그들이 보이는 행위들과 반응들은 비록 각각의 경우에 그것들이 어떤 특수한 가치를 보유한다 할지라도 일반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읊조리는 문장들은 그들의 고유한 언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들은 언어의 일반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태곳적 신의 존재는 차치하더라도, 어떤 근원적인 자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근원적인 자를 마주한다면, 그것은 이미 예외적인 어떤 일인 것이다. 멜빌은 어떻게 한 소설이 여러 근원적인 자들을 포함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각각의 근원적인 자들은 어떤 설명할 수 있는 형태를 초과하는 강력하고 고독한 인물이다. 즉 그 인물은 이미지 없는 사유, 대답 없는 질문, 극단적이고 비합리적인 논리 등등의 고집스러움을 표시하는, 특색있는 화려한 표현을 투사한다. 삶과 앎의 형상들, 그것들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알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것을 살아간다. 그 인물들은 자신들에 관한 일반적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특별하지도 않다. 그 인물들은 앎을 회피하며, 심리학을 거부한다. 심지어 그들이 읊조리는 말들조차 발화의 단순한 특수성뿐만 아니라, 또한 언어의 일반법칙(전제들) 역시도 넘어선다. 왜냐하면 그 말들은 독특하고, 근원적인 언어의 흔적 혹은 투사 같은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언어를 침묵과 음악의 한계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바틀비에게는 어떠한 특수한 것도, 일반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근원적인 자이다.

근원적인 자들은 제1의 본성의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세계나 제2의 본성과 분리불가능한데, 그들이 이 제2의 본성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세계나 제2의 본성의 텅 빔, 그것들이 가진 법칙의 불완전성, 특수한 피조물들의 평범성, 가장무도회로서의 세계(바로 이것이 무질이 자신의 입장에서 “평행운동”이라고 부른 바의 것이다) 등을 폭로한다. 근원적인 자들이 아닌, 예언자들의 역할은 근원적인 자들이 세계에 남겨놓은 흔적과 그들이 세계에 야기한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괴로움을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되는 것이다. 멜빌에 따르면, 근원적인 자는 그의 환경의 영향에 종속되지 않으며 반대로 그의 환경들에 창백한 흰 빛을 비추는데, 그 빛은 “창세기에서 만물의 시작과 함께 나타나는” 빛과 상당히 닮아있다. 근원적인 자들은 때로는 이 빛의 부동의 원천—돛대 위로 올라가 있는 망루병처럼, 여명의 희미한 빛과 함께 “올라가는” 묶여서 매달린 빌리 버드처럼, 변호사 사무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바틀비처럼—이며, 또 때로는 그 빛의 눈부신 이동, 보통의 눈이 쫓아가기에는 너무나 빠른 운동, 에이해브와 클라가트의 번개(lightning)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멜빌의 작품 전체에서 발견하는 두 개의 거대한 근원적/원초적 인물/형상들, 즉 파노라마 쇼트(panoramic shot)와 트래킹 쇼트(tracking shot)9, 정지과정과 무한 속도이다. 그리고 비록 이것들이 음악의 두 요소들일지라도, 그리고 정지가 운동에 리듬을 제공하고, 번개가 부동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근원적인 자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할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장-뤽 고다르가 영화의 이름으로 트래킹 쇼트와 파노라마 쇼트 사이에는 “도덕적 문제”가 놓여있다고 주장할 때,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소설이 왜 두 명 이상의 근원적인 자를 (포함하는 듯 보이지만) 포함할 수 없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에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평범한 소설들은 결코 최소한의 근원적인 인물도 창조해낼 수 없다. 하지만 비록 가장 위대한 소설들일지라도, 어떻게 한 번에 하나 이상의 근원적인 인물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에이해브 혹은 바틀비 등은 자신이 아직 하나의 그림에 두 인물을 한꺼번에 그리는 방식을 발견하지 못했음을 인정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위대한 인물들과도 같다.10 그렇지만 멜빌은 한 가지 방법을 발견할 것이다. 그가 결국 최후에 『빌리 버드』를 쓰는 것으로 자신의 침묵을 깼다면, 그것은 이 마지막 소설이, 베레 선장의 꿰뚫어보는 눈 아래에서, 두 명의 근원적인 자를, 악마 같은 자와 화석처럼 굳은 자를 모아놓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하나의 줄거리를 통해 그들을 함께 연결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하는 것은 손 쉽고도 사소한 일이다. 한 명이 다른 이의 희생물이 되기에 충분할 법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한 장면에서 함께 작용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베니또 쎄레노』가 이러한 방향에서 해본 시도였다면, 그것은 데라노 선장의 근시안적이고 흐릿한 시선 아래에서 행한 결함이 있는 시도였다.)

그렇다면 멜빌의 작품 전체에 등장하는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인가? 이미 감지된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두 근원적인 자들을 화해시키는 데에, 하지만 그에 따라 또한 근원적인 자와 제2의 인간성을 즉 비인간적인 자와 인간적인 자를 화해시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베레 선장과 변호사가 증명하는 것은 어떠한 좋은 아버지들도 없다는 점이다. 오로지 괴물스럽고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아버지들과 화석처럼 굳어버린 아버지 없는 아들들만 있을 뿐이다. 만일 인간성이 구조되고, 근원적인 자들이 화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부권 기능의 분해나 해체를 통해서일 뿐이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은 에이해브 선장이, ‘성 엘모의 불’11을 불러일으키면서, 아버지 자신이야말로 잃어버린 한 명의 아들이자 고아이며, 반면 그 아들은 누구의 아들도 아닌 혹은 모든 이의 아들, 즉 형제임을 발견할 때이다.12 이후 몇 년 뒤에 제임스 조이스가 말했듯이, 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텅 빔이며, 무이다. 아니 오히려 불확실성의 지대가 형제들에 의해, 형제자매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가면은 제1의 본성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벗겨져야만 한다. 또한 에이해브와 클래가트로 하여금 바틀비와 빌리 버드를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벗겨져야만 한다. 즉 전자의 폭력과 후자의 감각마비를 통해 그들이 짊어지게 된 결과물인 순수하고 단순한 형제애의 관계를 드러나게 하면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멜빌은 결코 형제애와, 기독교적 “자비”나 부성적 “박애” 사이의 근본적 대립을 구체적으로 상술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아버지 기능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인간 혹은 특수성 없는 인간을 탄생시키며, 형제들의 사회를 새로운 보편성으로 구성함으로써 근원적인 자와 인간성을 재통합시키는 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형제들의 사회에서는 연합이 친자관계를 대체하며 피로 맺어진 계약이 혈족관계를 대체한다. 인간은 실제로 그의 동료 남성과 피로 맺어진 형제이며 그의 동료 여성과 피로 맺어진 자매인 것이다. 멜빌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자신의 구성원들을 한계 없는 되기로 끌어당기는 독신자들의 공동체이다. 더욱이 한 명의 형제나 자매는 더 이상 “그의” 존재나 “그녀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 진실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모든 “속성”, 모든 “소유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불타는 열정은 사랑보다 더 깊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실체나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별불가능성의 지대를 더듬거리기 때문이다. 그 지대 안에서 불타는 열정은 형제들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를 도처에 확장하고 남매 사이의 근친상간적 관계에 스며들면서 사방에서 모든 강렬도들에 스며든다. 바로 이것이 가장 신비로운 관계, 즉 피에르와 이사벨을 휩쓸고 간 관계, 『폭풍의 언덕』(1847)으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끌고 간 관계, 에이해브가 모비딕이 되고, 모비딕이 에이해브가 되게 한 관계이다.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그의 영혼과 나의 영혼은 같아. … 히스클리프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무아래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있어. 기쁨으로서가 아니야.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 속에 있는 거야.”13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1. George Dumézil, preface to Georges Charachidzé, Prométhée ou le Caucase: Essai de mythologie contrastive, Paris: Flammarion 1986.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수 세기를 거치면서 여전히 성찰과 참조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이 신은 자신의 형제들이 사촌 제우스에 맞서 벌인 왕권투쟁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바로 그 동일한 제우스에게 도전하고 그를 조롱한다. … 이 아나키스트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둡고 감각적인 지대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휘저어놓는다.”

  2. 사드의 (『새로운 쥐스튄느 혹은 미덕의 불운』에서는 교황의 이론으로 나타나는) 이 두 가지 본성들의 개념에 대해서는, Pierre Klossowski, Sade My Neighbor, trans. Alphonso Lingis, Evanston, Ⅲ.: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1, p. 99 이하를 참고하라. [옮긴이주] 사드의 해당 책은 다음을 보라. D. A. F. 드 사드, 『미덕의 불운』, 이형식 옮김, 열린책들, 2011.

  3. Herman Melville, Moby-Dick; or, the Whale, New York: Penguin Classics, 1992, p. 178. [한글본] 허먼 멜빌, 『모비딕』, 36장, 217쪽.

  4. 이에 대해서는 의지가 모든 특수성의 억제(suppression) 속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작용인 쇼펜하우어의 성인(sainthood) 개념을 참고하라. 피에르 레리스(Pierre Leyris)는 『빌리 버드』의 프랑스어 번역본 2판(Pars: Gallimard, 1980) 서문에서 멜빌의 쇼펜하우어에 대한 깊은 관심을 상기시킨다. 니체는 파르지팔을 쇼펜하우어의 성인의 전형으로, 일종의 바틀비로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이후 저작에서 인간은 성인이 되기보다는 악마가 되기를 선호했다고 말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Friedrich Nietzsche, On the Genealogy of Morals, trans. Walter Kaufmann and R. J. Hollingdale (New York: Random House, 1967), p. 163. [한글본]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제 3논문, 28절, 541쪽.

  5. 이에 대해서는 Heinrich Kleist’s letter to H. J. von Collin, December 1808, in An Abyss Deep Enough: The Letters of Heinrich Von Kleist, ed. Philip B. Miller, New York: Dutton, 1982을 참고하라. 하일브론의 케트헨은 바틀비의 상투어와 상당히 가까운 그녀 자신만의 상투어를 갖고 있다. “나는 모릅니다.” 혹은 간단히 “몰라요.” [한글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하일브론의 케트헨』, 배중환 옮김, 부북스, 2022.

  6. [한글본] 허먼 멜빌, 『베니또 쎄레노』, 황문수 옮김, 이담, 2009.

  7. [옮긴이주] “그들이 당신에게 소리칠 것이다. 〈당치도 않은 소리! 당신은 반대할 수 없을걸. 2×2=4일 뿐이야! 자연은 당신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들이 당신 맘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 당신의 욕구에 개의치 않는다. 당신은 자연의 법칙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따라서 그것의 모든 결과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의 벽은, 따라서 벽이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법칙들과 2×2=4가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데, 정말이지 자연의 법칙들과 산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물론 나는 이마로 그 같은 벽을 들이받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실제로 그것을 뚫고 나갈 힘이 없다면. 그러나 나는 단지 내 앞에 돌벽이 있으며 그리고 내게 힘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돌벽 앞에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계동준 옮김, 열린 책들, 2000, 27-28쪽.

  8. 무질과 멜빌의 유사점을 비교하는 일은 다음 네 가지 점에 속해 있다. 첫째, 이성에 대한 비판(“불충분한 이성의 원리”), 둘째, 심리학에 대한 고발(“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구멍”), 셋째, 새로운 논리(“다른 상황(state)”), 넷째, 극한(極寒)의 지대(“가능한 것”)

  9. [옮긴이주] 영화촬영에서 파노라마 쇼트는 카메라를 고정하고 촬영하는 기법을, 트랙킹 쇼트는 이동수단을 이용해 카메라를 움직이며 촬영하는 이동촬영 기법을 지시한다.

  10. 이에 대해서는 Francis Bacon and David Sylvester, The Brutality of Fact: Interviews with Francis Bacon, New York: Thames and Hudson, 1975, p. 22를 참고하라. 그리고 멜빌에 따르면, “하나의 궤도에 하나의 행성만 도는 것과 같은 이유로, 하나의 작품이나 창작품에는 그러한 하나의 근원적 인물만 있을 수 있다. 두 인물이 있다면 혼돈으로 충돌할 것이다.” Herman Melville, The Confidence-Man, ed. Stephen Matterson, London: Penguin Classics, 1990, p. 282. [한글본] 허먼 멜빌, 『사기꾼, 그의 가면무도회』, 이용학 옮김, 지식의날개, 2019, 44장, 390쪽.

  11. [옮긴이주] ‘성 엘모의 불’(Saint Elmo’s fire)은 폭풍우가 치는 날 밤에 돛대나 비행기 날개 따위에 나타나는 방전 현상을 말한다. “[성 엘모의 불이여] 그대는 빛이기는 하지만 어둠에서 뛰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빛에서 뛰어나온 어둠이다. 그대에게서 뛰어나온 어둠이다! 창 같은 번갯불이 멈춘다. 눈을 떠라.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 저기서 불길이 타오른다! 오오, 그대는 고결하다. 이제 나는 내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그대는 격렬한 성질을 가진 내 아버지일 뿐, 상냥한 내 어머니를 나는 모른다. 오, 잔인한 그대여! 내 어머니는 어떻게 했는가? 그게 의문이다. 하지만 그대에 대한 의문은 더 크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대를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 전능한 그대여. 그대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을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그대 맑은 정령이여, 그대 너머에는 넓게 퍼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에 비하면 그대의 영원은 유한한 시간일 뿐이고, 그대의 창조성도 기계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비딕』, 119장, 603쪽.

  12. 이에 대해서는 R. Durant, Melville, signes et métaphores, Paris: L’Age d’Homme, 1980) p. 153을 보라. 그리고 마이유는 이렇게 쓴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아버지의 문제는 그것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순간적으로 연기된다. … 그러나 그것은 단지 아버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고아들이다. 지금은 형제애의 시대이다.” Jean-Jacques Mayoux, Melville, trans. John Ashbery, New York: Grove, 1960, p. 109.

  13. Emily Brontë, Wuthering Heights, London: Penguin, 1985, p. 122. [한글본] 에밀리 브론테, 『위더링 하이츠』, 유명숙 옮김, 을유문화사, 2013, 129-132쪽.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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