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철학하기] ⑮ 무의식이 춤추는 생태적 사유

근대 의식이 억압한 무의식을 들여다 본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생각은 놀이를 하듯 춤을 추듯 뻗어 나가 생태적 사유로 이어진다.

Freud described the unconscious as a wilderness area. Wilderness areas are the unconscious of modern society, places we can go to keep our dreams undisturbed. The very form of modern consciousness is itself this dream.

p.9, Introduction: Critical Thinking, 『The Ecological Thought』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야생지대라고 표현했다. 야생지대는 근대 사회의 의식이자 우리의 꿈을 방해받지 않고 간직하기 위해 찾아 갈 수 있는 장소이다. 근대 의식의 형태 그 자체가 바로 이러한 꿈이다.

p.9, 「서론: 비판적 사고」, 『생태적 사유』 (국내 미출간)


근대 의식의 꿈

정치, 문화, 철학 분야에서 근대(modern)는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부터 20세기 중반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이며, 경제 분야에서는 18세기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본다. 근대의 특징이라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보여주듯 인간 이성 중심, 주체와 객체 이분법,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다. 근대 의식(modern consciousness)의 바탕에는 자연을 통제·정복·개발·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시선과 문명은 나날이 발전해 밝은 미래로 향한다는 진보와 낭만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야생지대라고 표현했지만 모튼은 야생지대=근대 의식의 산물로 해석했다. 프로이트의 개념을 따라간다면 ‘근대의 무의식’이라 했겠지만, 근대 의식은 알면서 무의식인 야생지대를 만들었다는 뜻이겠다. 왜? 방해받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꿈은 사회가 변하면서 생기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제거한 이상적인 상태이다. 공해로 오염된 도시가 아니라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순수한 야생으로 남겨두고 보호하는 것, 사람들이 자연의 경관을 누릴 수 있는 한적한 호숫가에 있는 별장 같이 아름다운 자연이다. 근대 의식이 애써 모른 척 억압한 무의식에는 ‘자연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런던 스모그’ 같은 인간이 만든 죽음의 공해, 『올리버 트위스트』 속 혹독한 아동노동, 조지 오웰의 산문에서 볼 수 있는 광부들의 삶, 식민지의 자원과 저렴한 노동력 착취 등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눈앞에서 치워버린 것들이 자리잡고 있다.

근대 의식의 선한 의도

이렇게 보면 근대 의식을 지닌 근대인은 발전을 위해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악당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대의 두려움이 무의식을 형성하고 의식으로 나타난다면 질병에 대한 두려움(중세의 흑사병, 스페인 독감), 빈곤에 대한 두려움(아일랜드 대기근), 열강들의 패권다툼 속에서 국가를 지켜야하는 두려움은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은 선한 의도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소시민들은 노동조합이나 노동법도 없는 상황에서 가혹한 환경을 견디며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지켜낸 위대한 사람이기도 하다.

모튼의 ‘생태적 사유’는 선한 의도가 가져온 역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한다. 인간만이 중심이 아니라 물, 공기, 미생물, 동식물, 미래 세대라는 비인간 존재도 있으며 이들은 국경 안에 있는 공동체를 넘어 훨씬 더 넓게 연결되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을 그리는 생태적 사유

보통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을 상상하며 수면 위는 의식, 바닷물에 잠긴 부분은 무의식으로 그린다. 익숙한 그림 대신 새로운 표현 방식을 고민해보았다.

1. 의식이 무의식을 포함하는지 무의식이 의식을 포함하는지 확실하게 모르겠다.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2. 의식이 무의식을 우연히 알아차릴 때가 있다. 말실수를 할 때,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말이나 행동 등이니 다양한 무늬로 표현해본다,
3. 무의식의 무는 없다(無)는 의미보다 무늬(紋)가 있는 의식, 춤추는(舞) 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4. 어쩌면 무리(無理-이치가 존재하지 않는 혹은 이치를 넘어선)의 영역이 아닐까?
5. 생각이 춤을 추며 뻗어가는 것이 놀이 같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인가!
5. 무의식의 무늬들은 구멍이 뚫려 의식할 수 있다. 의식마저 넘어서는 게 무리는 아니다.
6. 그렇다면 무의식(無-意識)의 무(無)는 무늬와 춤과 말이 안 되는 것을 모두 받아들인다.
7. 굳이 선을 그어 영역을 표시했지만 의식과 무의식의 바깥, 이치를 넘어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는 뭐라고 해야할까? ‘무한’이 어떨까? ‘생태적 사유’ 책 맨 앞에서 모튼이 레비나스1를 인용한 구절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8. 테두리를 점선으로 바꾸면 경계가 흐려진다.
9. 사각형에서 동심원으로 바꾸고 의식과 무의식의 자리도 바꾸고 무의식을 색깔로 표시하나 의식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이 표현된다.
10. 무한에도 점선으로 원을 그리고 점선 바깥에도 무한이라고 쓴다.
11. 알아보기 쉽게 무의식은 하늘색으로 표시했지만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색을 상상한다.
12. 점선의 점과 점 사이는 비어있어 통로가 된다.
13. 글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며 그림을 보니 그림2에 무늬로 나타난 무의식은 저렇게 멀쩡한 모양이 아니라 군데군데 바늘로 꿰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 의식이든 지금 시대의 의식이든 감추고 싶은 것은 억지로 가려버릴 테니 꿰맨 자리가 터져 누더기일 것이다.
14. 누더기 그림은 아무래도 손으로 그려야할 것 같은데 일단은 다음으로 미룰 테다.
(좌) 무의식을 전면에 표현했다. / (우) 의식과 무의식을 재배치하고 무의식의 드러남과 무한과의 연결을 표현했다.

근대, 후기 근대, 현대(modern, post-modern, contemporary)

정치사, 경제사 등에 따른 분류가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준으로 크게 근대와 현대를 나눈다. 또 현대는 68혁명을 기점으로 시작된 ‘탈근대’와 1990년대 후반(한국은 IMF 시기이후) 글로벌화 이후의 ‘동시대’인 현대로 구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2036년쯤 되돌아보면 2026년부터 AI 본격화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표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까지 한눈에 담아내고 싶었지만 생태적 사유의 범주는 네모난 표를 흘러넘쳐 잡을 수가 없었다.

이니스프리는 의식일까, 무의식일까

근대 의식과 무의식을 사유하며 예이츠2의 시가 떠올랐다. 이니스프리가 단순한 낭만이나 도피처라고 생각했는데 전문과 참고자료를 찾으며 읽어보니 다른 느낌이었다. 런던의 회색 도로라는 현실 위에서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인의 영혼이 느낀 시대의 고통이 읽혔다. 호수의 물소리가 예이츠의 내면 깊은 곳을 울리며 무한의 영역으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The Lake Isle of Innisfree
– W. B. Yeats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e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나 이제 일어나 가야지, 이니스프리로 가야지
그곳에 진흙과 가지로 작은 오두막 지어야지

콩밭은 아홉 이랑 일구고 꿀벌 집도 두고
벌이 시끄러이 왱왱 우는 숲속에서 혼자 살아야지

그러면 그곳에서 평화를 맛보겠지, 평화는 천천히 드리우니까
귀뚜라미 노래하는 곳 아침의 장막에서 드리워지지 
한밤엔 모든 것이 흐릿하고 한낮엔 보랏빛으로 반짝이고
저녁엔 홍방울새 날갯짓이 가득하지

나 이제 일어나 가야지, 낮에도 밤에도 늘
호숫가에 나지막이 찰랑대는 호수의 물소리가 들리지
차도 위에서, 회색 보도 위에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리지

조약돌 열 셋

무의식과 무한의 ‘무’를 조약돌로 놓는다.

무(無)에서 느낀 아름다움(紋), 에너지(舞), 자유(無限, 無理)이다. 마을에서 철학하기 9번째 글인 ‘너와 나의 이 정도, 자연스러운 거리두기’에서는 조약돌을 찾을 수 없어 ‘조약돌 없음’이라고 썼는데 이제 ‘없음’이 조약돌이 되었다. 보일 듯 말 듯 멀게 느껴지던 생태적 사유는 내가 애써 외면하며 꿰매어 놓은 자리를 들여다보라고 한다.


  1. “Infinity overflows the thought that thinks it.(무한은 그것을 생각하는 사유를 흘러넘친다.)”↩

  2.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치가로도 활약했으며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다음 백과에서 발췌) 덧붙이자면, 지금은 과거 파시즘의 폐해를 알 수 있지만 그 때는 영웅의 출현을 고대했을 테니 시대적 한계를 아쉬워할 뿐이다.↩

김진희

만화리 비조마을에 살며 만가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마을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