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돌봄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버티고 있는 모양이 사람 인(人)자라고 하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상상력이 내일엔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 되어, 각자도생의 삶을 가로지르는 피로사회를 넘어 서로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는 안전 사회에 살고 싶다.

2022년에 재밌게 봤던 유튜브 채널이 있다. “자취남”이란 프로그램은 한 청년이 자신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을 시작하여 짧은 시간에 큰 인기를 얻으며 현재는 거의 60만 구독자를 가진 유명 채널이 되었다. 한번 틀면 몇 편을 금방 보게 된다, 유튜브의 특성을 잘 살려 짧은 시간에 재밌게 볼 수 있는 만든 짜임새가 좋은 까닭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것은 이제는 호기심이 아닌 정보가 된 시대가 아닌가도 싶다.

옆집의 이웃은 몰라도 온라인 이웃의 생활은 볼 수 있는 시대. 사진 출처: USA-Reiseblogger
https://pixabay.com/images/id-1719926/
옆집의 이웃은 몰라도 온라인 이웃의 생활은 볼 수 있는 시대.
사진 출처: USA-Reiseblogger

한국 사회는 공동주택인 아파트에서의 거주 형태를 주요 생활방식으로 택하였으나 도리어 공동살이라는 생활양식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하고 있다. 정작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고 살면서도 도리어 이렇게 ‘온라인 이웃’들의 삶을 보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이 시대에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가족도 이웃도 모두 흩어져 버린 이 시대에 나는 과연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돌봄 의제의 출발이 될 수 있다. 이젠 가족도 친구도 모두 개개인이 되어버린 사회시스템, 혈연으로 우정으로 서로를 돌보고 돌봄이 요청되던 구조는 이제 민폐가 되었고, 마치 각자도생이 정석처럼 되어 버린 사회에서 공공시스템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는 오늘, 과연 우리 사회는 서로돌봄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까?

숫자를 좋아하다보니 존재조차 숫자로 표현되는 시대인데도, 현재 돌봄 시스템은 수치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저 뉴스에서 삶을 비관하여 일가족이 죽이고 죽었다, 란 뉴스에 기함하기를 반복할 뿐… 현실이란 게 그렇다. 그 안에 존재는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하는 생각마저 사치처럼 느껴야 하는, 그런 오늘이란 시스템 속에 살고 있다.

사회시스템은 대상을 비용으로 치환하는 특성이 있다. 개개인들에게 지급되는 비용을 모두 더하고 곱하여 1년 예산이란 거대비용으로 발표되다 보니, 무의미한 혹은 불필요한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도 된다. 누구는 받아서, 누구는 덜 받아서, 또는 누구는 못 받아서… 돌봄 문제 또한 그렇게 숫자화 되어가며 본질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자취남이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큰 요인 중 하나는 비용에 대해 솔직하게 거론한 점이다. ‘이 정도의 삶을 유지하려면 이 정도의 비용이 든다’라고 설명한다. 그 영상을 보다 보면 정말 각자도생 시대에 용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영상에선 별일 없어 보이지만, 시스템적으로 보면 개개인에게 너무나 큰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또한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더 이상 돈벌이를 못하게 되면, 그 생활비용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서로돌봄이 필요한 시대를 준비하며.
사진출처: KIMDAEJEUNG
서로돌봄이 필요한 시대를 준비하며.
사진출처: KIMDAEJEUNG

자유주의란 미명 아래 각자도생의 대표적인 사회인 미국은, 개인들의 대부분의 삶을 리스(대여)로 살게 해서 직장을 잃으면 이내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급여의 대부분을 리스화 된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 비용으로 소진하니, 직장을 잃고 구직을 못하면 이내 사회구성원이 될 수 없고, 사회시스템에서 배제되는 구조다. 더구나 의료보험 체계조차 미약해서 병으로 인한 통증을 줄이기 위해 병원이 아닌 마약을 찾음으로써 더욱 배제된 존재가 된다. 그렇게 존재들은 돌봄을 받기는커녕 돌봄 바깥으로 내몰리는데, 앞으로 우리의 현실이 이와 크게 다를까? 자살과 고독사가 이제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게 된 시대, 너무 잦고 흔해져서 오늘도 ‘또’를 말하게 되는 시대.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대안을 만들 수는 없을까,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은 기본적으로 비용의 문제지만, 꼭 돈만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비인간 동물들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듯, 아니 도리어 인간들의 삶이 좀 더 유기적 연결의 총합일 수밖에 없듯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돌봄 의제의 키워드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또 연결의 주체는 누구인지, 주민센터 공무원 몇 명이 마을 전부를 관리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확장해 나갈 건지, 돌봄의 단위는 세부적으로, 시스템의 속도는 높아져야 할 지금 그 시작과 배치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준비의 첫 단추가 아닐까. 이미 공동체를 이룬 아파트라는 거주지를 왜 활용하지 못하는지 궁금하다. 물론 각종 커뮤니티를 결성해 연결은 되어있지만, 그 시스템을 활용해 돌봄의 문제까지 이어줄 가치들은 존재하는지 고민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생활은 보장되고 도움은 용이한 시스템 만들기를 구체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돌봄, 개인은 물론 사회 시스템도 준비를 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의 준비가 내일의 복지시스템을 만든다고 볼 때, 비용도 중요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가치의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준비가, 그 마음의 태도가 돌봄 시대의 키워드가 되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를 버티고 있는 모양이 사람 인(人)자라고 하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 절대 각자도생할 수 없다. 마음의 준비란 열린 상상력이, 조금은 더 긍정적인, 조금은 더 존재에 가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도 그것을 불평등이라고 비꼬지 않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 도리어 그것이 공정이라고 인식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오늘의 상상력이 내일엔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 되어, 각자도생의 삶을 가로지르는 피로사회를 넘어 서로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는 안전 사회에 살고 싶다.

오영주

천주교인이고 녹색당원으로의 정체성으로, 생명평화 관련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