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임 조직화 사례] 생활나눔모임 〈마라나다〉

필자는 1982년부터 1987년도까지 6년간의 마라나다 소모임의 경험을 전한다. 가톨릭 수사님과 영어성경교실로 출발한 소모임은 내면의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소모임은 자연스럽게 삶을 나누고 모두의 성장과 행복을 추구하는 목표로 전환된다. 특히 ‘I-Message 중심의 3인조 대화’를 모든 모임에서도 시도해보기를 강력히 권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꼭 남겨놓아야 한다. 첫사랑처럼 내게 늘 설레임으로 남아 있으면서, 나를 크게 성장시켜준 모임의 이야기를. 물론 실화이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모임에서 맺은 우정은 계속되며 내 삶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한다.

마라나다 야유회. 왼쪽 맨 뒷줄에서 다섯번째가 알퐁소 위머 수사님. 사진제공 : 고재섭
마라나다 야유회. 왼쪽 맨 뒷줄에서 다섯번째가 알퐁소 위머 수사님. 사진제공 : 고재섭

1982년 서울 합정동의 한 가톨릭 수도원에서, 세상엔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회장도, 회원도, 회칙도, 회비도 없는, 특이한 모임이었다. 원할 땐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고 나오기 싫으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무방하였다. 모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자유 의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소는 수도원에서 무상으로 제공하였으며, 강의와 진행도 자발적이었다. 때로 모임에 필요한 다과나 복사비 등이 필요하였으나 이 또한 자발적인 성금에 의해 조달되었다. 아무런 조건도 요구도 없는 이 모임에 참여자들은 생경해 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 자유로운 모임은 놀랍게도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자신을 개방하게 하고,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해주었다. 모임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의 기쁨을 알게 된 사람들은 신이 나 자신의 친구들, 선후배들, 가족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이 글은 수백 명이 다녀간 〈마라나다〉라는 이름의 한 생활공동체 모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라나다 모임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을 바꿀 수 있었는지에 대한 보고서이다.

1. 우리는 서로 알고 싶었다

마라나다 모임 마지막 순서에서는 함께 노래를 부른다. 바이올린 든 분은 한국에 부임하면서 모임에 함께한 아우구스티노회 오부길 신부님. 사진제공 : 고재섭
마라나다 모임 마지막 순서에서는 함께 노래를 부른다. 바이올린 든 분은 한국에 부임하면서 모임에 함께한 아우구스티노회 오부길 신부님. 사진제공 : 고재섭

마라나다 모임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 합정동 마리스타수도원에서 시작된 생활공동체 모임이다. 이 수도원의 알퐁소 위머(Alfonso Wimer) 수사님은 당시 예순여섯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계셨다. 땅딸막한 키에 두 볼이 빵빵하고 발그스레한, 영락없는 산타할아버지를 닮은 모습이었다. 멕시코 국적의 알퐁소 수사님은 영어성경을 매개로 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셨다. 수도원 안에 영어성경교실을 만들고는 학교 교정에서나 길에서 또는 버스나 전철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영어성경교실에 오라고 초대하였다.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귀여우면서도 푸근한 인상의 이 할아버지 수사님 꾐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영어성경 교실에 참여하였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영어성경교실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열렸다. 늘 10~20여 명의 학생, 직장인 등이 참여했다. 알퐁소 수사님은 영어로 된 성경 본문을 복사해 나누어 주고는 한국말과 영어로 유머를 섞어가며 재미있게 수업을 이끌어 나갔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들은, 마치 쉬는 시간 우르르 교실 밖을 나서는 학생들처럼 수도원을 빠져나갔다. 우린 서로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알퐁소 수사님이 3개월 동안 미국을 다녀와야 한다고 해서 우리끼리 모임을 갖기 전까지는.

알퐁소 수사님의 말씀에 우리는 논의 끝에 우리끼리라도 영어성경 공부를 계속하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고, 그 다음 주에 우리는 첫 모임을 가졌다. 모임 진행은 연대 대학원 다니는 분이 이끌어주었다. 모임이 끝난 후,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리는 처음으로 영어성경 공부를 마치고 합정동 로터리 인근 카페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한 여성분이 친구와 겪고 갈등을 겪고 있다면서 조언을 구했다. 이 대화가 기폭제가 되어 우리는 피상적인 얘기들이 아닌 더욱 깊은 내면의 얘기들을 꺼내게 되었다. 대화의 마무리는 실로 엉뚱하면서도 놀라운 결과로 나타났다. 우리는 눈인사 정도로 스쳐 알며 지내왔지만 진심으로는 서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가까워지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어성경 공부보다도 서로의 삶을 나누는 이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얘기 결론이 여기에 다다르자, 모임의 방향을 잡는 것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을 수가! 우리 모두 신이 났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조직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성장이며 행복이다. 그러므로 회원이란 부담을 줘선 안 된다. 따라서 회장도 회비도 회칙도 필요 없다. 누구든지 나오고 싶을 때 나오면 된다. 모임은 진정한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모임을 이끄는 것은 누구나 희망하는 사람이 자원하면 한 달 동안 모임을 이끌어가도록 하자는 등의 원칙이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임이 〈마라나다〉다. 마라나다(Maranatha)는 예수님 사시던 지역의 말로서, “주여 오소서!”라는 뜻이다.

2. ‘진정한 나’를 만나는 조건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누구나 따뜻하게 환대받고 존중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자.’ 우리는 모임 틀을 짜면서, 처음 참여하는 분들이 서먹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머리를 모았다.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건네고 누가 신참이고 고참인지 모르게 참가자 모두가 똑같이 이름표를 달았다. 그리고 신참만 아니라 모두가 처음 참가한 것처럼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의사에 대한 존중이었다. 모임이 전하는 메시지는 늘 한결같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욕구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행복해 하는 당신입니다.” 이를테면, 모임 참여를 권유하는 것도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형제(자매)님이 다음주 토요일에도 저희와 함께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님이 그보다 더 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이 있다면 아쉽지만 이곳은 괘념치 마시고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 알려줍니다. 때로 야유회 갈 때면 “모월 모일 몇 시에 야유회가 있습니다. 장소는 000입니다. 여기 오신 모든 분들이 야유회에 참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희의 바람이고, 여러분이 어디 가시든 원하시는 곳에서 기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두세 사람이 참가해도 기쁘게 다녀올 것입니다.”고 공지하는 식이다.

학교와 가정 또는 직장에서 지시와 명령에 의해 주로 생활하다가 내게 주어지는 이러한 온전한 자유 의사는 하나의 도전이면서 또한 궁금증을 낳게 만든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모임은 ‘내가 원하는 나’가 될 수 있도록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그런 나를 신뢰해 줌으로써 참여자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모임은 ‘꾸며진 나’가 아니라 ‘진정한 나’를 원하는 것이다.

3. 변화의 핵심, 3인조 대화

마라나다 모임의 진행은 정해진 틀이 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대략 영어성경 공부 30분, 3인조 대화 60분, 전체 나눔 30분, 소개 및 친교 30분 등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형식은 “I-Message”를 중심으로 한 “3인조 대화”이다.
“3인조 대화”는, 참가자들이 세 명씩 무릎을 맞대고 둘러앉아 진행자로부터 주어진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자신의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말한다. 이 질문은 당일 공부하게 되는 영어성경 텍스트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나눌 수 있도록 구성한 질문이다. 그래서 모두 “나는….” 하고 답하도록 만들어진 질문이다. 즉 “I-Message” 답을 유도하는 질문인 것이다.

I-Message의 예
I-Message의 예

“I-Message”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40년 전에도 우리는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 나 자신의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보고 듣고 읽고 아는 것, 농담 등은 마구 떠들어도 정작 내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슬펐는지 아팠는지 말하기가 쑥스럽기도 하고, 상대방이 하찮게 여길까봐 감히 꺼내지를 못했다.

그러나 모임에서는 나 자신에 대한 얘기만을 하도록 장려된다. “I-Message” 대화에서는 학식도 재산도 나이도 전혀 중요치 않다. “나”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임 참여자가 학력이 다양하고 나이 차가 많은데도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나”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I-Message” 대화를 하면서 저절로 우리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 모두가 자유롭고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이 “I-Message”로 답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이나 주변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얘기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모임의 전체 분위기 속에서 곧 자신의 얘기가 본질에서 벗어났음을 깨닫고 점차 자신의 얘기로 돌아가게 된다.

“I-Message”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세 명으로 구성된 대화형식이다. 반드시 세 명이어야 한다. 셋이란 숫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약 30명의 참가자가 모두 같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나누게 하면 한 사람에게 말할 수 있도록 부여된 시간은 2분에 불과할 것이다. 나머지 58분은 나머지 29명의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이렇게 되면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가기 어렵다. 그러나 한 시간 동안에 세 명이 대화를 나누게 하면 20분은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40분 동안 나머지 두 사람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시간 분배라면 넉넉히 자신의 얘기를 나누고 상대방을 공감해 줄 수 있을 것이.

함께 나누어야 할 글이 있으면 모아서 이렇게 회보도 발간하곤 했다. 사진제공 : 고재섭
함께 나누어야 할 글이 있으면 모아서 이렇게 회보도 발간하곤 했다. 사진제공 : 고재섭

3인조 대화가 끝나면 전체 나눔이 이루어진다. 진행자(매달 자원하여 정해짐)가 알림종을 울리면 모두 둥그렇게 앉아 3인조 대화를 통해 느꼈던 점이나 깨달았던 점을 나눈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이 참가 못한 다른 3인조에서 오간 의미있는 내용들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모임 참가자는 대략 가톨릭 1/3, 개신교 1/3, 불교 또는 무교 1/3로 구성되었다. 노동자, 학생, 직장인, 교수 등 하는 일도 다양했고 연령대는 10대에서 60대에 이르렀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모임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으면서 오는 사람들의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치 삶의 비밀을 알게 된 듯 행복해 했다. 이 모임이 주는 깊은 내적 교감으로 5년 동안 무려 13쌍의 부부가 탄생할 정도였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진심으로 행복을 기원하는 마라나다 모임을 보면 다락방 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전체 나눔을 할 때 이단 모임이 생겼다는 얘기에 조사하러 왔다고 실토하는 분도 있었다.

마라나다 모임은 중추 역할을 하던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과 직장 생활에 전념하면서 1987년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후 많은 분들이 모임의 복원을 바랐지만 기대뿐 실현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마라나다 모임을 그때와 똑같이 복원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꼭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나다 모임에서 참고할 몇 가지 원칙은 있다. 어떤 모임이든지 자유 의사에 대한 철저한 존중과 배려. 조직(또는 일)이 아닌 사람 중심의 운영, “I-Message 중심의 3인조 대화”를 도입하면 모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 원칙들은 대면 관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기 힘든 사이버 시대에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고재섭

(주)김정문알로에 자연의학연구원장, (사)팔당생명살림 상임이사,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상임이사를 역임하였다. 슬로푸드운동에 힘쓰면서 농업, 음식, 의학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사람과 사회, 생태계가 좀 더 평화로이 소통하고 공존하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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