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생태] ① 밥상문화_공동체밥상에서 혼밥문화로

지금 우리는 먹을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공동체밥상은 ‘더불어 가난’에 기반하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가 탈성장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공동체밥상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나누어야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밥상, 이야기구조가 폭발하여 열정과 환희가 감돌던 밥상, 보이지 않는 미학과 윤리가 작동하던 밥상, 그런 밥상은 이제 현대적인 트랜드가 되어 다시 복원되고 재구성될 것이다. 그것도 젠더교차성 밥상살림의 주역들이 그것을 해낼 것이다. 그것이 오래된 미래, 탈성장 전환사회의 미래의 공동체밥상의 모습일 것이다.

들어가며 : 제 3세계 밥상과 어릴 적의 추억

얼마 전 유튜브에서 아프리카 적도기니 근방의 시골마을의 최근 정경을 영상으로 보았다. 밀가루 덩어리를 쪄서 커다란 소반에 올려놓고, 그 둘레에 앉은 아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한 아이가 냉큼 손으로 조그만 조각을 내서 입에 가져간다. 다음 아이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조그만 조각을 내서 입에 가져간다. 손이 부지런히 교차하여 움직이는 장면을 여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 앵글은 잡고 있다. 맙소사, 몇 순배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찐 밀가루 덩어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애초에 아이들의 수에 비해 턱없이 작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고, 그중에는 삐쩍 마른 아이들이 참 많았다.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식사시간이었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의식하고 배려하고 참고 거리조절과 힘 조절을 하고 있었다. 영상은 십여 분 동안 그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지루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장면은 우리의 어릴 적 공동체밥상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전통의 공동체밥상의 음식은 직접 텃밭에서 기르고 딴 반찬으로 만든 풀밭주의자, 채소주의자인 어머니들께서 요리하는 생태적 지혜의 산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출처 : rasmail
우리 전통의 공동체밥상의 음식은 직접 텃밭에서 기르고 딴 반찬으로 만든 풀밭주의자, 채소주의자인 어머니들께서 요리하는 생태적 지혜의 산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출처 : rasmail

배고픈 시절에는 나누어 먹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것도 동그란 원을 그리며 둘러싸고 앉아서 서로 나누어야 자신의 배도 채울 수 있었다. 자신의 것, 자신의 음식, 자신의 반찬 이런 개념이 없었다. 형제들과 가족들과 친구들과 나누고 또 나누었다. 그래서 관계가 풍요롭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 관계의 풍요는 상대방과 나누어야 나도 먹을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이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간혹 친구가 놀러 왔다가 밥때가 되면 자연스레 밥상머리 한쪽을 내주어서 함께 먹었고, 공동체밥상의 원리가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간혹 군식구가 생겨서 한 그릇 더 내올 때도 나눔의 밥상의 원리, 공동체 밥상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얼마나 따뜻한 우애와 환대의 장이었는가. 공동체밥상을 떠올릴 때면 끝없이 나누고 끝없이 같이 먹고, 끝없이 이야기했던 과거의 시절이 떠오른다.


밥을 먹다 보면 할 이야기가 참 많았다. 공생공락(共生共樂)의 밥상이 되어 먹을 것을 앞에 두니 상상력이 절로 발동했다. 수많은 이야기 구조가 생겼다. 학교에 있다는 귀신이야기, 자신의 친구이야기, 공장, 병원, 군대, 시설에서의 이야기 등 각종 이야기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어도 괜찮다는 관용 하에서 만들어졌다. 특히 아이들은 동그란 눈을 뜨고 이야기꽃을 가족과 함께 나누었다. 그 이야기꾼들은 다들 어디 갔을까? 만담처럼 만들어내던 전설, 설화, 신화, 종교, 가벼운 소재들의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고등어 반찬이 올라왔을 때

공동체밥상에는 고기반찬이 거의 없었다. 간혹 동네에서 가축을 잡아 나누어주면 운 좋게 고기를 먹는 일도 있었지만,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과도한 육식이 없다 보니, 요즘처럼 고기반찬이 중앙에 떡 놓이는 중앙집중식 반찬의 구성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된장찌개든 나물무침이든 김치든 간에 반찬 각각은 서열과 위계가 없이 늘 동급이었다. 반찬의 맛의 차이는 울림에 공명하는 떨림처럼 공동체의 화음의 맛이었다. 공동체밥상의 이야기와 느낌과 정동(affect)의 강렬도가 만들어낸 화음은 맛의 풍미와 향미와 뒤섞여 여러 기억의 블록(Bloc)들을 넘나들게 하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고기반찬은 모든 반찬의 화음을 동질화한다. 그래서 중앙에 딱 자리 잡고 나머지 반찬을 하위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배고픈 시절에는 채식 위주의 식사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전통의 공동체밥상의 음식은 직접 텃밭에서 기르고 딴 반찬으로 만든 풀밭주의자, 채소주의자인 어머니들께서 요리하는 생태적 지혜의 산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드물게 어느 날 고등어반찬이 중앙에 자리 잡으면 그때부터 생각이 복잡해진다. 상대방이 얼마나 떼어먹나 유심히 관찰한 다음에 다음 순서인 나도 젓가락을 대고 크기를 결정한다. 고등어 살점을 뗄 때마다 윤리학모델, 철학모델, 경제학모델, 기하학모델, 수학모델, 경제학모델, 정치학모델 이 모든 학문모델들이 동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이 아주 복잡하지만 행동은 비교적 단순했다. 순서를 기다리고 욕심을 내지 않으며 천천히 자신의 몫을 기다리는 것이다. 숟가락이나 젓가락이 부딪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식사의 과정은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은 상태를 맞추기 위해서 횟수, 크기, 양 등을 조절하였다. 나는 좋은데 상대방은 슬프다면, 공동체밥상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만이 독식한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신중하게 여러 학문의 모델이 다 섞여 있는 메타모델(meta-model)을 염두에 두고 젓가락질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동체밥상의 반찬 구성은 중앙집중식이 되기 어려웠다. 야채와 푸성귀, 된장찌개, 나물 등 정성과 맛으로 승부를 거는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중앙에 자리 잡는 것은 단연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였다. 찌개에 여러 숟가락 넣어 같이 먹던 반찬은 식사가 마칠 때 즈음이면 빈 그릇이 되었다. 반찬이나 밥을 남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배고픈 시절이다 보니 반찬과 밥의 양과 횟수 등을 조절하여 딱 밥을 다 먹을 때 즈음 반찬도 다 먹게 되게끔 차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의 기법이었다. 맛있다고 더 먹어도 안 되고, 맛없다고 덜 먹어도 안 되는 딱 적정수준을 조절하면서 먹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편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간혹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어른들은 그 앞으로 밀어주곤 하면서 아이들의 욕망에 대해서 배려했다. 그리고 맛있게 먹는 모습에 대해서 기뻐했다. 이렇듯 거리조절, 힘 조절, 초점조절에 따라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한 판 공동체의 난장(亂場)이 우리의 공동체밥상의 모습이었다.

밥상머리 예절과 젠더불평등

물론 전통적인 공동체밥상에 빛과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손이 많이 가는 반찬을 하기 위해서 어머니들은 새벽부터 온갖 고생을 다 하셨고, 부족한 재료로 최상의 맛을 만들기 위해서 온갖 생태적 지혜를 총동원했다. 동시에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직접 밭에 나가 일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 수고스러움과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밥상살림은 부수적인 그림자노동으로 간주되었고 밥상살림에는 젠더불평등의 요소가 뿌리박혀있었다. 심지어는 남성과 여성의 겸상을 금하는 지역마저도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위계와 차별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밥은 하늘이다.”라는 말처럼 밥상살림의 중요성은 너무도 큰 것이었다. 그것을 기성사회와 제도가 외면하면서 마치 당연한 것처럼 간주한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먹은 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뱃살로 갔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똥으로 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은 음식 대부분은 우리의 몸을 자기생산(autopoiesis)하는 데 쓰인다. 다시 말해서 피부는 2주일이면 모두 세포를 교체하고, 간은 2달, 뼈는 6개월이면 모든 세포를 교체한다. 우리가 먹는 것은 고귀한 생명이고, 곧바로 그것을 먹어 우리의 고귀한 몸을 구성하는 셈이다. 이를 동학에서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말하는데, 다시 말해서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공동체의 밥상살림 역시도 공동체를 재생산하거나 타자생산하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생산하고 재생하기 위해서 이루어져 왔다. 밥상살림은 가족공동체의 몸과 삶을 만드는 원천이다.

밥상살림의 젠더불평등의 요소는 산업사회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여성들은 밖에서 노동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여전히 가사노동을 담당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상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습은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젠더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는 젠더교차성, 다시 말해 평등밥상을 마련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공공급식으로 모든 먹거리를 배치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사례로 중국의 문화혁명의 비극적인 사례가 있다. 문화혁명 시기 동안 부엌이나 조리도구, 조리법 등을 구습이라고 간주하고 공공급식을 만들기 위해서 사회주의를 따르는 중국당국이 부엌이며 그릇이며 조리도구를 모두 없앴던 적이 있다. 그러자 기아사망자가 6,0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파국이 전개되었다. 이는 공공급식 위주로 가면서 식생활탄력성을 사라지게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밥상살림의 지혜는 식생활탄력성의 원천인 셈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젠더교차성에 따라 공동체밥상을 재건하고 복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밥상에서도 분명히 버려야 할 것도 있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는 위계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어른이 “밥 먹자”라고 하면서 숟가락을 들어야 밥 먹기를 시작할 수 있으며, 어른이 먼저 한술 뜬 반찬만을 먹을 수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 밥상 하에서는 이야기구조나 상상력이 발휘되기 어려웠다. 먹다 체할 정도의 정적과 어르신들의 말씀만 난무했다. 그래서 이러한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훈육과 규율은 사라져야 할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밥상머리 교육한다고, 젓가락질이라고 제대로 못 하면 혼을 내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상당히 곤혹스럽게 어려운 자리가 밥상이었다. 얼마나 힘든 자리였던가? 밥상을 앞에 두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그 냄새, 색채, 맛, 이미지 등에 미혹(迷惑)되어 침이 고이고 손이 먼저 가는 것을 말릴 수 있을까? 음식을 앞에 두고 꼭 훈육과 절도, 도덕을 얘기하는 것은 상당히 우리의 상상력을 마비시킨다. 그렇다고 미디어에서 방영되는 먹방과 쿡방은 자연스러운 식욕에 대한 해방과도 같지만, 과도한 육식과 풍요의 밥상은 지구 건너편 제 3세계 아이들의 굶주림이나 지구환경을 외면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전통적인 공동체밥상만이 꼭 정답은 아니지만, 우리 시대에 다시 취해야 할 장점과 생각할 거리들이 있다.

펜데믹과 혼밥 문화의 가속화

이제 음식은 ‘끼니를 때운다.’라는 말의 소재가 되었다. 공동체의 급속한 와해와 해체는 결국 홀로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혼자 먹다 보니 맛있을 리 없고, 서로 밀고 땡기는 거리조절, 힘 조절, 초점조절의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이 동원될 필요도 없다. 음식에 이야기구조도 없다. 그렇다 보니 음식 자체의 맛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나트륨과 MSG, 지나친 양념 등이 들어간 배달음식을 먹게 되었다. 관계로부터 멀어진 음식은 덩그러니 놓인 끼니를 때우는 수단에 불과하게 되었다. 오늘 밥 한 끼를 혼밥으로 먹는 도시의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하고, 서럽고, 배고프다. 관계가 없으며, 더 많이 먹는데도 배고픔과 갈애는 사라지지 않는다. 더 많이 먹게 되고 그 외로움을 달려줄 소재를 식탐에서 찾게 된다.

팬데믹은 이러한 1인 가구와 혼밥 문화의 확산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에서 친구나 이웃과 밥 한 끼 같이 하자고 권하기 마땅찮은 상황이 되었다. 배달음식을 시켜서 혼자 먹으면서 인터넷으로 업무와 교육, 놀이 등을 다 하다 보니 밥상에서의 관계가 주는 풍요와 그 다양한 이야기구조에 대해서 망각하게 되었다. 대면접촉이 거의 없다 보니 관계를 어떻게 맺고 유지하고 공동체밥상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지 오래다. 엄청난 일회용품을 남기는 배달음식을 통해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사람들은 먹거리를 소재로 한 공동체밥상의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구조가 갖는 풍요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펜데믹 상황은 밥상살림을 하는 여성들의 젠더불평등을 확장하기도 했다. 남편도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고, 아이들도 온라인 교육이다 보니 삼시 세끼를 다 챙겨야 하는 가정주부의 삶은 더 팍팍하고 고달파졌다. 아래층 위층으로 마실 다니며 또래 주부들과 나눴던 차 한잔의 여유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간혹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나누는 이웃과의 수다와 잡담도 부담스러워졌다. 그것은 가정주부들로서는 과도한 밥상살림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상살림의 지혜를 동원하고 가사분담을 하면서 근근이 펜데믹 상황을 대응하였다. 오히려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으니, 이야기구조 역시도 다양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다. 밥때가 되면 아이들이 “오늘 메뉴가 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남편도 슬쩍 가사 일을 도우러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막대한 가사노동의 순간에서 여성들의 힘듦과 애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순간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엄청난 일회용품을 남기는 배달음식을 통해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사람들은 먹거리를 소재로 한 공동체밥상의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구조가 갖는 풍요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사진 출저 : KaiPilger
엄청난 일회용품을 남기는 배달음식을 통해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사람들은 먹거리를 소재로 한 공동체밥상의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구조가 갖는 풍요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사진 출저 : KaiPilger

여기서 “경제가 있고 살림이 있느냐? 살림이 있고 경제가 있느냐?”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경제와 살림의 분열은 문명사적 비극인 자본주의의 출발점이다. 원래 인류학적으로 사냥과 채취를 하는 남성과, 텃밭을 가꾸고 요리를 하는 여성 간의 약간의 성별분업이 경제와 살림의 분열로 비화된 것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상황에서는 경제가 있고 살림이 있다는 것이 주된 레퍼토리이다. 반면 팬데믹 상황은 살림이 있고 경제가 있게 된 분명한 순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외부 경제활동이 완벽히 마비된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굳건한 살림으로 엄청난 팬데믹의 상황에 꿋꿋이 버텨나갔다. 여기서 살림이 활력이라면, 경제는 자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밥상살림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활력이 필요했으며, 그 활력을 찾지 못하여 힘들고 고단하고 소진된 주부들도 많았다.

신배려사회에서의 밥상문화

신배려사회는 일본에서 최근 널리 퍼져있는 관계의 풍속도를 그린 개념이다. 만약 내가 우연히 모르는 사람 옆에 앉아서 우동을 같이 먹고 있다면, 그쪽으로 단무지를 밀어주는 배려를 할 수 있다. 관계가 주는 접촉, 대면, 개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배려사회는 단무지를 밀어주면 상대방이 부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 속에서의 배려는 부담이고 마음의 빚이기 때문에 아예 배려 자체를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배려라는 생각은 관계없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반면 공동체밥상은 배려로 가득 찬 밥상이다.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서 먹는 속도를 조절하고, 얼굴표정을 살피고, 이야기들을 의식하고, 관계로 향하는 것이 공동체밥상이다. 배려사회는 전통적인 공동체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대목이었다. 왜냐하면 너와 나 사이에 흐릿한 혼재면이 발생되어 ‘너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모호한 경계면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것은 모호한 경계면 속에서 먼저 행동에 나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군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커먼즈가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 물론 이러한 배려에 나서는 사람이 있기 전에 밥상살림을 하는 판 짜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배려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따로 또 같이 공동체’라고 불리는 최근의 색다른 공동체는 너와 나를 분명히 구분하면서도 서로가 커먼즈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양상을 의미한다. 프라이버시(privacy)를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최근의 젊은이들의 상황 속에서 너와 나 구분이 불명확한 상태에서의 배려는 때로는 과도한 개입이나 간섭으로 여겨질 소지도 있다. 따로 또 같이 공동체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다시 말해 화합하되 같아지지 않는 그런 개념과도 통한다. 문제는 신배려사회는 ‘따로 또 같이’ 공동체와 쉽게 결합된다는 점에 있다.

문제는 관계없음에 있다.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의 소식과 정보를 접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과 벽을 맞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신배려사회는 관계없음으로 통하는 첩경일 수도 있다는 점이 맹점이다. 그런 점에서 배려든 신배려든 서로를 의식하고 초점조절, 힘조절, 거리조절을 하는 상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립무원의 외로운 현대인들은 관계 자체의 풍요에 있던 공동체를 갈망하지만, 늘 혼자이고 공허한 메아리 속에 있고, 늘 돌봄의 빈곤 속에 처해 있다. 그런 상황에 대한 타계책으로는 신배려사회의 밥상문화는 적합하지 않다.

신배려사회에서의 밥상문화는 고독하고 외롭고 우울하다. 따로 떨어진 채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서 회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밥상문화는 거리조절의 미학과 초점조절의 윤리가 관철될 수 없다. 그저 그 역시도 혼밥 문화로 향하는 관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신배려사회는 관계없음에 대한 자조 섞인 푸념과 한탄 대신 이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의 신화이다. 공동체 사람들과의 이야기구조도 없이 스마트폰을 멍하니 보며 혼밥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관계도 두절되어 버린 고립무원의 밥상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트랜드나 문화현상이라고 보기에도 힘들고 지치고 외로운 인간군상에 대한 미디어의 미화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오며 : 젊은 세대의 교차성 밥상살림과 공동체밥상의 전망

젊은 세대들의 공동체밥상문화는 새로운 트랜드로 무장되어 있다. 비거니즘과 비혼주의, 퀴어, 젠더 교차성 밥상살림이 그것이다. 기성세대와 달리,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쇼핑하는 남성들이 많아진 것은 젊은 세대 특유의 밥상의 문화이다. 이제 젠더불평등의 소지를 가진 밥상문화는 많은 부분 척결되거나 사라지는 중이다. 젠더교차성 밥상살림은 젠더 역할분담보다 살림의 관점에서 모든 부부가 함께 바라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물론 젊은 세대들 중에서는 근본적으로 밥상살림 자체를 거부하는 문화 역시도 상존하고 있다. 함께 밥상살림을 하니 좋은 일이 참 많아졌다. 식생활탄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이다. 동시에 여성들의 전유물로 알려졌던 생태적 지혜 다시 말해 요리, 식생, 종자, 저장, 벌레퇴치 등의 영역 역시도 남성들에게 스며들어 갔다. 이제 적어도 20-30대 젊은 남성들은 밥상살림, 육아, 쇼핑, 청소, 설거지 등 대부분의 살림에 대해서 함께 한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 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핵가족이거나 비혼이거나 미혼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공동체 밥상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더욱이 가난보다 풍요가 익숙했던 세대들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아직도 공동체 밥상문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익숙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팬데믹 상황은 각 도시에서 불던 공유부엌운동을 해체시켜 버렸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따로 또 같이 공동체조차도 위기에 직면했다. 관계없음의 1인 가구문화와 혼밥문화는 배달문화와 결합되어 정점을 찍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일말의 가능성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교차성 밥상살림이 재건하고 복원하고 있는 공동체밥상이라는 판도라 상자 속에서 속삭이는 희망의 목소리이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 밥상살림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아니, 도처에서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젠더교차성 밥상살림의 전망을 가진 가족공동체가 공동체 밥상을 다시 복원해내고 현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키워드는 탈성장 가난한 밥상이 될 수도 있다. 더욱이 비거니즘은 오래된 전통이었던 풀밭주의와 채소주의를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채식문화를 계승하고 현대화한 새로운 채식문화가 밥상살림에서 속속들이 채택되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적도기니 인근의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들이 먹는 찐 밀가루 덩어리에 비해 우리는 너무도 먹을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공동체밥상도 얼마나 ‘더불어 가난’에 기반하고 있는지 잘 안다. 우리는 탈성장으로 향하기 위해서 공동체밥상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나누어야 자신이 먹을 수 있는 밥상, 이야기구조가 폭발하여 열정과 환희가 감돌던 밥상, 보이지 않는 미학과 윤리가 작동하던 밥상 그런 밥상은 이제 현대적인 트랜드가 되어 다시 복원되고 재구성될 것이다. 그것도 젠더교차성 밥상살림의 주역들이 그것을 해낼 것이다. 그것이 오래된 미래, 탈성장 전환사회의 미래의 공동체밥상의 모습일 것이다.

이 글은 『신생』 2022년 봄호 ‘전통과 생태’ 기획시리즈로 실렸습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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