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으로 이해하는 선사의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아니다. 그렇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존재를 인식하고,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물은 물이, 산은 산이 되었다. 그 안의 담긴 수많은 생명을 포함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스님께서 인용하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법어는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청원 유신(靑d原惟信) 선사의 법어이다.

“이 노승이 30년 전 아직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곧 산이고 물을 보면 곧 물이었다. (看見山就是山 看見水就是水), 그 후 어진 스님을 만나 선법(禪法)을 깨치고 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더욱 정진해 불법도리를 확철대오하고 난 지금은, 그전처럼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依前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마음이 청정하면 세상도 청정해진다는 심청정 국토청정(心淸淨 國土淸淨)의 말씀은 반대로 마음이 어지러우면 자연과 생명도 오염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환경, 생명 위기는 결국 인간 정신의 오염이 자연에 투영된 것이다. 돈만을 벌려고 하니, 비료, 농약, 제초제, 착색제, 발색제 등 온갖 첨가물과 유해한 화학약품으로 농산물과 식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생명과 자연, 환경을 실제 그 자체로 보지 않는 것이다.

건설업자들은 아름다운 산과 계곡을 보면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대상으로 보일 뿐이다. 사진출처 : PhotoMIX Company
건설업자들은 아름다운 산과 계곡을 보면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대상으로 보일 뿐이다.
사진출처 : PhotoMIX Company

도로와 다리, 터널을 많이 뚫어야 건설해야 돈을 버는 토건업자는 끊임없이 도로 건설과 개발의 논리를 만들도록 정치인과 학자, 언론인들을 매수한다. 건설업자들은 아름다운 산과 계곡을 보면 그냥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어떻게 개발하여 리조트와 케이블카, 관광시설을 지어 돈을 벌까를 궁리한다. 강을 보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수변개발과 4대강 토목건설을 통해 토건의 이익을 생각한다. 그들에겐 산이 그냥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을 그냥 물로 보이지 않는다. 산과 강은 돈벌이를 위한 대상으로 보일 뿐이다. 사람을 인격체로서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내 이익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집을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보지 않고 투기의 대상으로 본다. 모든 것이 돈이고 상품이다. 산을 산으로 봐야 한다. 강을 강으로 봐야 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산은 산이 아니다. 물은 물이 아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산에는 흙과 바위뿐 아니라 수많은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수십수억 마리의 풀벌레들도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짐승들과 새들이 살고 있는 터전이다. 산은 그냥 흙들의 집합이나 바윗덩어리가 아니다. 등산을 갈 때 산 위에 올라가 밑의 산맥들을 보라. 비가 내리면 수많은 풀과 나무들이 환희의 노래를 부르며 피어오르고 살아 꿈틀거리며 하루가 다르게 하늘로 자라며 새파란 입을 파랗게 물들이며 올라오는 장면을 보면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산은 산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물은 물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뿐 아니다. 산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쌓인 수많은 문화와 역사가 있는 곳이다. 산은 역사 이래 수 많은 선사들의 깨달음을 이루었던 곳이며, 그 많은 사찰에서 스님들과 불자들이 수행했던 곳이다. 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탈과 탄압을 피하거나 맞서기 위해 민중들이 찾아든 곳이 산이었다.

산과 물은 수많은 짐승과 물고기들의 생명의 터전이며, 인간들의 정신과 문화의 근원이다. 흙 한 줌 작은 돌맹이와 바위 하나 모두 수천 년의 역사 두께를 간직하고 있는 엄청난 것을 어찌 함부로 파헤치고 개발할 수 있겠는가.

항상 발우공양을 할 때 〈정식게〉 〈오관일적수 팔만사천충 약불염차주 여식중생육 (吾觀一滴水八萬四千蟲 若不念此呪 如食衆生肉)〉를 염송한다. “물 한 방울을 살펴봐도 팔만 사천 마리의 벌레들이 살고 있구나. 내가 이 주문을 외지 않고 먹는다면 얼마나 많은 중생을 먹게 되는 것인가”란 뜻이다. 물과 밥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박테리아. 미생물, 세균 등의 생명까지 헤아리고 살피는 경지이다. 그래서 이들 생명인 공양물을 어쩔 수 없이 먹지만, 맛에 탐닉해서 먹는 게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약으로 먹으며, 악을 끊고 선을 행하여 부처를 이루겠다는 발원의 가르침은 정말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물이 화학기호인 순수한 H2O만 되어 있을까? 과연 자연계의 물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물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한 물은 실험실에서 만든 물일 뿐이다. 자연계에는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그 속에는 수많은 박테리아와 세균, 플랑크톤과 미생물과 미네랄 등, 각종 화학물질도 포함되어 있다. 좋은 물맛을 결정하고 몸에도 좋은 것이다. 계곡이나 냇물, 강물에는 당연히도 물만 있는 게 아니라 물고기와 물벌레, 물풀 등이 함께 살고 있는 생태계이다. 이들 물은 물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발우공양의 정식게를 통해 물과 밥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박테리아. 미생물, 세균 등의 생명까지 헤아리게 된다. 
사진 출처 : Magicbowls 
https://www.pexels.com/ko-kr/photo/3544322/
발우공양의 정식게를 통해 물과 밥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박테리아. 미생물, 세균 등의 생명까지 헤아리게 된다.
사진 출처 : Magicbowls

산은 수많은 산 아닌 것들의 연기적 관계 속에 만들어진 존재이며, 물도 물이 아닌 것들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존재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있던가? 나라는 존재 또한 나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존재이다. 내 이름은 내 고유의 이름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위해 방편적으로 만들어진 명칭일 뿐이다. 의자는 의자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 다른 곳에서는 체어(Chair)라거나, 이수(いす)라고 부르는 존재이다. 명칭은 그저 그것의 이름일 뿐 본질은 아닌 것이다. 본질은 결국 어떤 이름을 부르든 관계없이 거기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산은 산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름하여 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설령 ‘바다’라고 부른다고 해도 실제는 변함없다. 그러나 우리는 명칭이라는 방편에 내둘린다. 산이라는 고정된 이미지, 바다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 있게 되면서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산은 이름하여 그냥 ‘산’이라고 붙여도 물을 그냥 ‘물’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름과 방편에 속고 끄달려 진실의 실제가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방편에 매여 담마를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환경과 생명의 가르침은 바로 그 실체를 보는 안목이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이자 녹색불교연구소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행공동체 정토회에서 25년 살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개발협력활동을, 평화재단에서남북문제를 위한 활동을, 고양시에서 지혜공유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을 했습니다.

댓글 1

  1. 깨치움을 깨닳음을 참선해 가겠습니다 좋은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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