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철 1주기 추모(축)제 특집] ⑤ 국지적 절대성 : 지금, 여기, 가까이

얼핏 보면 그는 자신이 만든 루틴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누구보다 풍부하게 색다름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고, 방구석에 앉아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늘 전화통화를 하며 세상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규칙적이고 국지적이었지만, 단조롭고 동일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 신승철의 삶을, 그가 각별히 사랑했던 개념어 ‘국지적 절대성’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집에서 문래동 연구실까지는, 산책하듯 걸어서 편도 45분 거리였습니다. 도착하면 콧등에 땀이 살짝 났던 그 길을 우리 부부는 아침저녁으로 손을 잡고 걸으며, 골목에서 만나는 나무들과 길냥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어제 저녁 세미나 때 했던 발언들에 대해 하나하나 복기하기도 하고, 연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네 마리 고양이들의 최신 근황을 서로 나누며 깔깔깔 냥이들 뒷담화를 하다가 즉석에서 새로운 고양이송을 만들어 녹음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함께 걷는 길은 짧지만 늘 흥미진진한 여행이었고, 가끔 루트를 벗어나 새로운 골목길을 개척하는 날은 신나는 모험이었습니다.

“규칙적이고 국지적이었지만, 단조롭고 동일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 신승철의 삶을 ‘국지적 절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본다. 사진 : 철학공방 별난

이 시계추처럼 반복된 산책 속에서 15년 동안 신승철은 약 40권의 책들과 논문, 연구보고서, 기획서 등을 세상에 내놓았고, 그것들은 생태주의, 자율주의, 구성주의, 도표주의, 창발주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배경에는 늘 펠릭스 가타리가 전면에 질 들뢰즈가 비스듬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주로 연구한 것은 가타리지만 일상은 꼭 들뢰즈처럼 살았다고 얘기하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최애였던 가타리를 젖혀두고, 너무나도 들뢰즈스럽기만 한 이 ‘국지적 절대성’ 개념에 대한 그의 애정은 유별났습니다. ‘국지적인 영역인 지금-여기-가까이에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한 삶과 신체가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하면 촉매하고 고무하여 색다름을 생산하고 창조할 것인가’(『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P.187)라는 삶의 태도에 대한 작은 문제제기로부터, 크게는 이 사회를 지속가능성과 성숙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탈성장 사상의 논리적 근거로까지 제시하기에 이릅니다.

“규칙적이고 국지적이었지만, 단조롭고 동일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 신승철의 삶을, 그가 각별히 사랑했던 개념어 ‘국지적 절대성’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촉지적 감각으로 깊이와 잠재성을 들여다보다

펠릭스 가타리는 젊은 시절 히치하이킹으로 전 유럽을 여행했고 이후에도 강연을 위해 세계 각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닌 반면, 질 들뢰즈는 평생 아카데미를 벗어나지 않고 같은 대학에서 30년 넘게 강의했다고 합니다. 가타리는 이런 들뢰즈를 보고 “염소를 묶어두면, 한자리를 뱅뱅 돌며 풀을 뜯는다”면서 놀려댔다는데, 만약 故신승철이 가타리와 친구로 지냈다면 아마 들뢰즈보다 더 혹독한 놀림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집과 연구실을 걸어서 오가며, 매일 A4 10페이지 분량의 글을 쓰고, 세미나를 하고, 고양이들 밥을 주고,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은 신승철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했으니까요. 물론 그에 상응하는 별명들도 이미 여럿 가지고 있었지요. 예를 들면, 살아있을 때에도 이미 ‘영등포 지박령’이었고,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라야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방구석 철학자’였고, 아내인 저로부터는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받아먹는 ‘삼식이’ 취급을 받곤 했으니까요. 이런 비난을 어찌나 자주 들었던지 그는 이에 대한 변명을 몇 차례 책에 쓰기까지 했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매일 연구실에 콕 박혀 있다며 걱정합니다. ‘여행 좀 가서 놀다 와라’라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가족과 고양이들과 이웃들에게서 색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이 저에게는 일상의 효모이자 촉매제입니다. 그들을 사랑할 때 나타나는 작은 변화를 느끼는 것이 내 삶의 큰 의미입니다. 겉으로는 작은 변화일지 모르지만 내면에서는 삶의 이유까지도 바꿔놓을 엄청난 혁명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국지적인 영역에서 아주 조용하게 진행되지만 우리 신체의 표면에 흐르고 있는 잠재성을 촉발하고 변용시켜 삶의 자기원인을 구성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은둔자에게는 모든 삶의 과정이 사건이라고 했던가요? 사소한 것에서도 심원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이지만,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지금 막 발견했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알아채지 못할 비밀이 평범한 일상의 주름들 속에 숨어 있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사랑할수록 차이가 풍부해진다고 했던가요? 사랑이 깊어질수록 세밀한 차이는 더 많아지는 것만 같고, 더 많이 발견됩니다.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사우, 2019) P.35-36

평소에 저는 그로부터 “상대방을 뻔하게 보지 말고 그의 깊이와 잠재성을 들여다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인지 과거의 좁았던 제 시각이 이제 꽤 많이 개선되었다고 자부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 아닌 정작 신승철을 볼 때는 그렇게 뻔한 시선으로 대한 것은 아닌지 지금에야 미안하고 후회가 됩니다. 그는 얼핏 보면 자신이 만든 루틴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 누구보다 풍부하게 색다름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고, 방구석에 앉아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많은 사람들과 늘 전화통화를 하며 세상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위 인용문 중 ‘은둔자에게는 모든 삶의 과정이 사건’이라는 말처럼 그는 ‘철학공방 별난’ 안에서 가장 부지런한 모험가이자 발명가였습니다. 미세한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보는 듯이 아주 작은 삶의 틈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색다른 면을 끄집어내곤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하던 역량과 잠재성을 이끌어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도록 만드는 ‘촉진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촉진자와 같이 한 존재의 깊이와 잠재성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아마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미세해지고 더 미학적이어야 하는 일이기에 ‘지극함’을 넘어서는 돌봄의 경지가 필요하며, 동시에 ‘현미경과 같은 눈’ 혹은 시각 이상의 특이한 감각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승철은 그것을 들뢰즈의 ‘촉지적 감각’이라는 개념을 빌려와서 설명했으며, 이는 가타리가 말년에 제기한 ‘윤리-미학적 패러다임’과 맞닿는 개념입니다. 지금 여기의 상황에 비추어서 가장 윤리적인 대응방식이 어떤 것인지 찾아나가는 과정의 미세한 결은, 마치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미학적인 과정일 것입니다. 이러한 촉지적 감각을 통해서만이 한 존재가 그 내면에 품고 있는 촘촘한 주름 속에서 더욱 밀도있고 강렬하고 입체적인 진실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신승철은 그 대표적인 예로 소농을 들곤 했습니다. 국지적 영역에 머무르면서도 둘레환경에 대한 촉지적 감각을 갖고 있으며 생명이 스스로 발아하고 꽃피울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하고 양육하고 부추기는 자, 생명과 자연에 대한 사랑과 지혜가 가득한 존재로서 소농에 대한 존경심을 기회 있을 때마다 피력하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는 농부였습니다. 우리는 한때 생태적지혜연구소라는 아직은 척박한 논밭에서 자라나던 싹이었음을 기억합니다.

차이 생산도 중요하지만, 반복의 설립도 중요하다

우리 사이의 다양함들이 만나서 특이성을 창조하고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고 더 다양한 차이의 스펙트럼을 창조해낸다는 것이 가타리식 창발주의라면, 이미 가지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잠재성의 영역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해낸다는 것이 들뢰즈식의 발견주의입니다. 신승철은 이 두 가지 방향성을 모두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차이에 주목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신승철 철학의 주된 골자이지만, 그는 차이 못지않게 ‘반복의 설립’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들뢰즈・가타리식으로 말하자면, ‘욕망의 반복이 기계를 만든다’라고 할 수 있지요. 반복은 생명의 구성주의에서는 개체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며, 공동체이론에서는 ‘자기생산’의 기반으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이 반복을 설립하여 직업적인 화가로까지 전개될 수 있듯이, 욕망하는 힘들이 반복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개체 혹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나는 반복이며, 강렬도 충만한 욕망의 반복입니다. ‘강렬도는 정동의 힘과 에너지의 온도, 속도, 밀도, 강도를 통칭하는 말이며, 강렬도가 커지면 문턱을 넘어서 색다른 반복의 양상으로 향한다’고 신승철은 그의 책 『정동의 재발견』(모시는 사람들, 2022)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 깜냥으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이론적인 이야기들을 이처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유는, 국지적 절대성은 바로 이러한 반복이 만들어놓은 ‘영토성’ 위에 설립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철학공방 별난의 고양이들이 좁은 문래동 사무실에서 10년 동안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며 자신들만의 작은 영토를 만들어 살아온 방식을, 신승철은 『묘한 철학』(흐름, 2021)에서 ‘범위한정기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국경을 넘나드는 무한 속도와 정보의 세계에서 늘 ‘저기 저편’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여기까지가 ‘내가 발 닦고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집’이라고 금을 그어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차별사회와의 분리를 통한 생활세계의 복원’이라 설명되는 이 범위한정기술은, 어쩌면 신승철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시끄럽기 그지없는 이 한국 사회에서 바깥세상과 문을 선택적으로 열고 닫으며 매일 200자 원고지 80매 내외라는 경이로운 생산량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철학공방 별난’이라는 공간은, 매일매일의 반복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삶의 영토였던 것이지요. 물론 그 영토 또한 고정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있는 유한한 세계이고, 색다른 반복을 생산해낼 잠재성과 온갖 종류의 사건들을 품고 있는 세계이고요.

바로 곁에 있는 주변 사람들과 가족, 이웃과의 관계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하고 재건해야 할 생활세계이며, 이를 위해서는 전 지구적인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무차별적인 사회에서 시선을 좁혀서 지금, 여기, 가까이 있는 존재들과의 실존적인 관계에 더 주목을 하자는 것입니다.

반복이 설립되는 곳, 그곳은 나의 욕망이 기거하는 곳이며, 안정감을 느끼는 영토이기도 하고, 돌보고 재건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부서질 수도 있는 연약한 영혼의 집임을 늘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사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이 하루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것은 공포와 불안이 아니라, 저의 유한성에 대한 응시에 가깝습니다. 그러면서 색다른 반복으로서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을 꿈꾸곤 합니다. 완전히 다른 삶이 가능하며, 우리의 감수성, 지각 작용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을 알기에 그것을 응시하면서, 그 예감에 매일매일의 추진력을 얻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욕망자본론』(알렙, 2014) P122-123

국지적이고 유한한 욕망들의 무한결속

우리의 관계망 속에서 특이성 생산을 통해 만들어나가야 하고, 스테레오 타입화된 삶을 넘어서 다양한 관계망의 설립을 통해 선택의 경우의 수를 늘려나가는 실천 과정에서 새로이 만들어진다. 사진 : 철학공방 별난

우리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고 하는 이 슬프고도 빛나는 통찰은, 지금 곁에 있는 이의 손을 슬며시 잡게 만듭니다. 내가 유한하고 혼자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었을 때 비로소 함께 설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뜨겁게 다가옵니다. 두 사람이어도 나쁘지 않지만 셋, 넷…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하나가 추가되면 존재와 존재가 모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결국 유한자들이 무한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승철은 이처럼 가까운 곳의 관계망 속에서 다양한 방식의 조합을 통해 주체성 창발하는 것을 일컬어 ‘유한자의 무한결속’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지금-여기-가까이 있는 존재들의 연합이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욕망이 서식하는 공간은 가깝고 국지적이고 유한하며 지엽적인 곳, 즉 ‘지금-여기-가까이’의 공간이다. ‘그때 저기’나 ‘저기 저편’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과거로 퇴행하거나 구조가 분비하는 환상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지금 여기’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은 유한한 욕망이 서식하는 현실의 관계망에 대해서 주목한다. 예를 들어 공동체, 마을, 골목 등이 기반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과 달리, TV, 광고, 미디어,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서 ‘저기 저편’에 대한 환상에 빠져든 사람들은 바로 백화점, 마트, 관광지 등 통속적인 소비 생활이나 문화생활에 대해서 주목하는 사람들이다. 저기 저편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관계망을 비루하고 뻔한 것으로 간주하며, 저기 저편에 낯설고 새로운 것이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모두의 혁명법』 P.397

‘저기 저편’이라는 거대한 신기루, 변하지 않는 거시적인 구조가 중요하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유한하며 국지적인 영역에서 다양하게 연결되고 접속되는 미시적인 반복 양상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구조적 불변항이나 보편적 질서로 간주되어 국지적이고 내재적인 삶과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재성과 긴밀히 결합되어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굴 만나고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나를 구성하는 바가 달라지듯, 누구와 접속하여 사랑과 욕망의 흐름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전망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따라서 신승철이 제기하는 멀리 ‘저기 저편’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국지적으로 유한하게 존재하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배치에 주목하자’는 문제의식은, 도래할 탈성장 사회의 전망에서도 중요한 열쇠로 작용합니다.

자연과 사물, 생명, 지구의 유한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상황에서 문명의 외부는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삶의 유형, 소비 패턴, 노동 형태가 자리 잡고 있고, 마트, 백화점, 편의점, 호텔 등 비슷비슷한 시설물들로 이루어진 메가시티의 풍경이 우리 삶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똑같은 유형으로 대량생산해냅니다. 새로움은 자본에 의해 기획된 것들 뿐, 우발성에 의해 생산되는 다양성은 이미 천연기념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외부가 사라진 시대에 사회는 우리 내부에 잠재성으로만 존재했던 영역들, 내부 관계망 속에서 생성되고 흘러가는 정동의 흐름, 즉 내부의 외부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외부는 우리의 관계망 속에서 특이성 생산을 통해 만들어나가야 하고, 스테레오 타입화된 삶을 넘어서 다양한 관계망의 설립을 통해 선택의 경우의 수를 늘려나가는 실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즉, 지금-여기-가까이에서 우리 사이의 관계망이 만들어낸 경우의 수들로 선택가능성을 늘리면서 외부 없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개척하고 생각과 삶의 경로를 풍부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해낼 주체성을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요. 지금 여기 가까이에 있는 바로 당신과 제가 말입니다.

아주 작은 영토에서 삶을 재발견하는 마음

철학공방 별난 이름으로 운영하던 온라인 블로그 소개글에는 이런 문구가 올라가 있습니다.

생태철학자 신승철과 그의 아내 이윤경이 만든 작은 게토. 느리게 천천히 작동되는 시간, 차 한 잔과 고양이의 재롱이 있는 작은 삶의 영토, 그곳에서 생각하고 재발견하고 토론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졌습니다.​

늘 철학공방 별난이라는 아주 작은 영토에 머물러있었지만 삶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마음이, 지금 생태적지혜연구소 120명 조합원들의 연결망으로 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시계추처럼 똑딱거리며 평범하게 살았던 한 철학자가, 국지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삶을 한껏 사랑하다 간 이야기였습니다.

별난

느리게 천천히 작동되는 시간, 차 한 잔과 고양이의 재롱이 있는 작은 삶의 영토, 그곳에서 생각하고 재발견하고 토론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졌습니다.​

댓글 2

  1. 지금-여기-가까이…. 그를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한사람입니다. 이윤경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 저는 삶의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든 기분입니다. 모든 예전의 익숙한 것들로부터 몸과 마음이 리셋되는 듯… 흔히 말하는 갱년기인데.. 저에게는 살아온 과거대비 살고 있는 오늘을 포함하는 인생의 후반을 환란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답니다.

    국지적 절대성… 잘 살펴봅니다.
    감사합니다.

    1. 유난이 박사님, 감사합니다. 생지연 식구들의 따뜻한 돌봄 속에서 저와 네마리 고양이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에 생지연 사무실과 합쳐서 이사도 잘 끝냈습니다. 서울에 오실 때 사무실(대방역 근처)에 한번 들러주세요. ‘환란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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