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의 『만세전』과 식민지의 이주노동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노동브로커가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관해 말하는 한 장면은,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당시 이주노동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22년 8~9월 식민지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니가타현(新潟縣) 조선인 노동자 사건’, 사건에 대한 조사활동과 르포르타주, 대응책 마련을 위한 여러 활동 등을 통해,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이주노동이 지니는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만세전(萬歲前)』은 염상섭의 대표작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우리게 잘 알려져 있는 소설이다. “조선에서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의 겨울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3ㆍ1운동 전야인 1918년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아 봉건적 관습과 제국주의적 수탈에 침윤된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형상화하며 그로부터 해방되어 절대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사유와 지향을 드러낸다. 소설 속 주인공 ‘이인화’는 ‘도쿄―고베―시모노세키―부산―김천―대전―경성’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만세전(前)’의 조선을 “구더기가 우글우글하는 공동묘지”로 바라보면서도 ‘만세후(後)’의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환희”와 “따듯한 봄”이 도래할 것을 예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만세전』은 일제의 검열과 작가의 개작 등으로 인해 몇 차례 변화를 겪는다. 『만세전』은 애초에는 「묘지」라는 제목으로 잡지 『신생활』에 1922년 7월부터 9월까지 3회 연재되다가 중단되었다. 3회분은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인해 전문 삭제되었는데, 『신생활』이 폐간되면서 그 연재도 끝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검열을 받기 위한 납본용 원고가 남아있어, 삭제당하기 전의 3회분 내용을 확인할 수는 있다. 거기에는 주인공 이인화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의 목욕탕에서 일본인 노동브로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중략…)


“뭘요. 어딜 가든지 조금도 염려 없쇠다. 생번(生蕃)이라 해도, 요보는 온순할 뿐 아니라, 도처에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중략…)


“실상은 쉬운 일이에요. 나도 이번에 가서 해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의 각 회사와 연락해가지고, 요보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苦力) 말씀이에요. 노동자요.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야 하지만, 그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네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서 깜짝 놀랐다. 그 가련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으로 몸이 팔려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그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제 나는 다시 한 번 그자의 상판대기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1

일본인 노동브로커는 식민지 조선인을 ‘생번(生蕃)’ 즉 야만인으로 칭하고, 또한 ‘요보’라고 호명하며 비하한다. 그런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를 속여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으로 팔아넘기는 행위를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자랑스럽게 그리고 유쾌하게 떠벌린다. 염상섭의 자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주인공 이인화는 이러한 이주노동의 상황을 듣고 놀라는 동시에 분노한다. 이 내용은 소설의 시간적 배경으로만 보자면, 1918년 겨울의 일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염상섭이 「묘지」 3회분을 쓰고 있었던 1922년 8월 당시 식민지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니가타현(新潟縣) 사건’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2 염상섭은 실제로 같은 시기에 「니가타현(新潟縣) 사건에 감(鑑)하여 이출노동자에 대한 응급책」(『동명』, 1922.9.3.)이라는 글을 통해 구체적인 대응책을 제시하면서 큰 관심을 표명했다.

‘니가타현 사건’은 인쇄 미디어의 보도와 유통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 알려지게 되었다. 1922년 8월 1일 『동아일보』 3면에는 “일본에서 조선인 대학살/ 관(觀)하라! 차(此) 잔인 악독한 참극을/ 하루 17시간의 고역을 강제하고도/ 도망을 한다고 총살을 하여 강물에 던져/ 독마(毒魔)에게 참살을 당한 자 100명 이상”의 제목이 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일본의 시나노가와(信濃川)이라는 강물을 이용하여 신에쓰전력주식회사(新越電力株式會社)에서는 8개년의 계획으로 동양에 제일 큰 발전소를 만들기 위하여 방금 니가타현(新潟縣) 지방에서 조선인노동자 6백 명 일본인 노동자 6백 명 도합 1천 2백 명을 들여서 역사를 하는 중인데 최선에 시나노가와 강물에 조선인 노동자의 송장이 여러 번 떠내려옴으로(…하략…)

이어서 이 기사에는 제국 일본의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사기업 자본에 식민지 조선인이 노동력으로 포섭되는 과정과 구체적인 노동과정 속에서 발생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수동적 저항 및 사보타주, 그것을 진압하여 재포섭하기 위한 자본의 대응, 그리고 일련의 강제노동 과정에서 발생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학대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식민지 조선인이 제국 일본의 자본에 노동력으로 포섭되는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8시간 노동이라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계약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수용에 기반을 둔 17시간 노동이라는 노예노동에 가까운 형태를 노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조선인이 학대당했다는 내용이 골자를 이루었다.

1922년 8월 1일 『동아일보』를 통해 ‘학살사건’이 보도된 이후 이에 대응한 식민지 조선인들의 움직임 및 활동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먼저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활동과 르포르타주 작성이 이루어졌다. 이에 기반하여 그 이후 ‘사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활동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경성과 도쿄로 이어지는 네트워크 속에서 세 집단의 협업을 통해 진행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인쇄 미디어인 『동아일보』에서는 이상협(李相協)을 특파원으로 현지에 파견하였고, 조선의 범(汎)사회주의 단체의 연대회의 성격의 〈니가타현조선인학살사건조사회〉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일본 도쿄에 체재하고 있었던 아나키즘 및 사회주의 경향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시나노가와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조사회〉에서도 대표를 파견하였다. 파견자들은 일본 도쿄와 니가타현 등에서 서로 만나 공동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활동 및 결과는 『동아일보』를 통해 8~9월에 신속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보도되었다.

진상규명 조사 활동을 통한 대표적인 결과물로, 이상협이 12차례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2백 자 원지 150매 분량의 「니가타(新潟)의 살인경(殺人境)―혈등(穴藤) 답사기」(전12회, 『동아일보』, 1922.8.23.~9.4.)와 나경석(羅景錫)의 「기괴망측한 니가타현(新潟縣) 사건의 진상」(『동명』, 1922.9.3.)을 꼽을 수 있다. 이 글들에는 노동조직 형태, 노동환경, 노동자에 대한 대우 등의 내용이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수력발전소 건설 공사는 4~5단계의 하도급 과정을 거쳐 노동자에게 이르는 ‘중간착취’에 기초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수직적이고 방계적인 중간 단계를 거칠 때마다 각 관리자로부터 임금의 일부를 떼이게 되어 그들의 명목임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었다.

다수의 조선인이 경험한 노동은,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계약적 합의에 따른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진 노동형태는 전근대적인 강제노동의 형태에 가까웠다. 노동브로커는 조선의 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계약하는 과정에서, 일부 몇몇 사람들에게만 계약서를 발급하는 형식을 통해 노동자의 법률적 권리를 회피했으며, 설사 정상적인 계약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이행되지 않았다.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던 8시간 노동은 최장 17시간으로 연장되었고, 노동재해로 인한 치료비나 위로금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으며, 지정된 휴무일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아가 ‘함바(飯場)’라는 합숙소 제도를 통해, 노동시간이 아닌 자유시간에도 이들의 인신은 구속을 당하였다.

일본 자본주의의 최전선이자 기본적인 토대로서 작동하고 있었던 전력 네트워크의 구축, 수력발전소의 건설을 최하층부에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현해탄’을 건너온 식민지 조선의 이주노동자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Korea_under_Japanese_rule#/media/File:Groundbreaking_ceremony_of_Gyeongbu_Line_at_Busan,_1901.jpg)
일본 자본주의의 최전선이자 기본적인 토대로서 작동하고 있었던 전력 네트워크의 구축, 수력발전소의 건설을 최하층부에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현해탄’을 건너온 식민지 조선의 이주노동자였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 자본주의의 최전선이자 기본적인 토대로서 작동하고 있었던 전력 네트워크의 구축, 수력발전소의 건설을 최하층부에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현해탄’을 건너온 식민지 조선의 이주노동자였다. 이들은 노동시간과 자유시간 모두를 착취당하는 이중착취와 노예노동에 가까운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중착취와 강제노동의 결합, 즉 인신을 구속한 상태에서 살아 숨 쉬는 시간 전체를 착취하는 형태에 포섭된 식민지노동자의 신체는, 자본주의적 자유노동에 기반을 둔 근대적 노동형태로 작동하기보다는 강제노동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다. 요컨대 제국 일본의 근대 자본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강제노동에 의해 부양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제국 일본의 근대성은 식민지 조선의 식민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당시 공사현장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일본인 노동자들도 함께 일을 하고 있었는데, 민족적 정체성을 통한 분할선은 구체적인 노동계약, 노동과정, 인신구속과 체벌 등에 있어서 차별을 야기하고 있었다. 즉 이 민족적 분할선은 임금노동과 강제노동의 경계선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인 노동자 또한 사회적 숙련도, 출신 지역의 유대감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할선들을 통해 형성된 크고 작은 정체성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제국과 자본이 부과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정체성의 고정화를 통해 경쟁을 유도하고, 하나로 합류하여 정치화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통치의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성은 주조된 정체성을 넘어서려고 하는 크고 작은 움직임들에 의해 항상 요동하고 있었다.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에서 계급구성을 가로지르는 강력한 분할선이었던 민족 정체성은 제국과 자본의 강력한 지배 장치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분할선이 쉽사리 소멸되거나 변형되기는 어려웠지만, 민족을 비롯한 다양한 근대적 정체성들이 픽션으로 구축된 산물임을 감안한다면 그와는 다른 픽션을 통해 재구성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당시 일본공산당 기관지였던 『젠에(前衛)』(「日鮮勞働者の團結」, 『前衛』, 1922.9)는 이 ‘학살사건’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관료 군벌과 자본적 제국주의자”의 측면에서 형성된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민족적 분할선을 지워내고 그것을 “국경도 인종도 없는 무산계급의 입장”에서 ‘동료’, ‘형제’, ‘전우’로서 재구성하려는 담론을 전개했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인노동조합의 조직”, 민족적 차별의 폐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을 주장하면서 “착취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민족적으로 분할된 정체성을 사회주의적 계급 정체성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면, 여러 제반 조선들을 고려하지 않은 소박하거나 성급한 주장들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민족적 분할선을 넘어서는 동시에 다른 형태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운동성을 창출하려고 했던 의도만큼은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해체와 재구성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시도되기도 했다.

1922년 8월 26일 〈시나노가와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조사회〉에서는 회의를 통해 여론의 환기, 노동자의 자유를 구속하는 계약의 파기, 미불임금과 조위금 지불, 조선에서의 부정한 수단으로의 노동자 모집 금지, 조사회 사업 지속을 통한 일본 내 조선인노동자 상태 조사 및 대우 개선 등 5개 방침을 결의했다.3 그리고 이어 이 결의를 실행하기 위해 9월 7일 조선인과 일본인 연합으로 연설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러한 형태의 연설회 개최는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천 명의 일본인과 5백 명의 조선인이 참석한 가운데 연설회는 개최되었으며, 그 연설회장 외부에도 수천 명의 사람이 운집한 가운데 혁명가가 제창되는 등 “예상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4

1922년 9월 7일 연설회 개최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조선인 노동자의 상황과 실정을 조사하기 위한 상설기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유학생, 지식인, 주의자, 여성, 노동자 등 다양한 주체들이 결합하였다. 이 조사기관은 홋카이도, 니가타현, 오사카, 규슈 등 20여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중점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실정을 조사하면서, 당시 광산 등지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이중착취와 학대 사실을 밝혀내고 그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5

식민지 조선에서는 〈니가타현조선인학살사건조사회〉를 중심으로 9월 27일 천 명에 달하는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보고 연설회가 개최되어,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인신을 구속하는 노동계약의 해지, 사망 노동자에 대한 위로금 지급 등과 관련한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연설회에서 〈재일본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 조사상무기관〉 결성이 결정되었다.6 이후 10월 21일에는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조선인출가노동자조사회〉가 창립되어 일본, 시베리아, 하와이, 멕시코 등에 이르는 조선인 이주노동자의 생활과 실태를 조사하기로 결의하였다.7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에서 터져 나온 파열음은, 제국 일본에서는 도쿄를 거점으로 홋카이도, 오사카, 규슈 등으로 유통되었고, ‘현해탄’ 너머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경성과 각 지방을 거치면서 전역으로 확산하였다. 나아가 상징적인 수준에서 그쳤을 수도 있지만, 세계자본주의와 접속하면서 시베리아, 하와이, 멕시코 등으로 뻗어 나갔다. 이러한 연결망은 표면적으로는 자본의 네트워크였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의 네트워크였다. 하나의 회로는 끊임없는 분할선을 신체에 새기면서 위계화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주조된 주체들은 임금노동과 강제노동의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으로 포섭되어 죽은 노동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갔다. 하지만 또 다른 회로는 그러한 주어진 분할선으로부터 출발하되 그것에 고립되거나 한정되지 않고 여타의 진동하는 주체들과 조우ㆍ접속함으로써 끊임없이 생성ㆍ변화하였다. 그러하여 제국에 맞서는 새로운 주체성을 창출하며 산 노동의 활력을 구성해 나갔다. 요컨대 제국 일본은 ‘노동의 제국’이었다.8 죽은 노동의 제국이었고, 산 노동의 (대항) 제국이었다.


  1. 「묘지」(제3회), 『신생활』(9호), 1922.9., 139~143쪽.(현대 한국어로 변경)

  2. 최태원은 염상섭 「묘지」에서의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이주노동과 관련한 내용이 1922년 8월 『동아일보』에서 비중 있게 다루었던 ‘니가타현(新潟縣)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을 참조. 최태원, 「〈묘지〉와 〈만세전〉의 거리―‘묘지’와 ‘신석현(新潟縣)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학보』(103), 2001.

  3. 「東京調査會의 決議」, 『동아일보』, 1922.8.29.

  4. 「革命歌 裏에 解散―演士 白武 氏 外 八名 檢束」, 『동아일보』, 1922.9.6.

  5. 「‘解散’常習의 警視廳」, 『동아일보』, 1922.9.18.; 「東京의 朝鮮人大會」, 『동아일보』, 1922.9.24.; 「勞働者의 調査會」, 『동아일보』, 1922.9.27.

  6. 「新潟事件 調査會」, 『동아일보』, 1922.9.26.; 「三個條件을 決議하고」, 『동아일보』, 1922.9.29.

  7. 「在外朝鮮人 勞働者의 調査會」, 『동아일보』, 1922.10.23.

  8. 김예림, 「‘노동’의 제국—경계 관리와 하층 노동자 에스노그라피의 정치학」, 『사이間SAI』(13호), 2012.

이 글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여 발췌ㆍ수정ㆍ보완의 과정을 통해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 이종호, 「혈력(血力) 발전(發電/發展)의 제국, 이주노동의 식민지―니가타현(新潟縣) 조선인 학살사건과 염상섭」, 『사이間SAI』(제16호), 2014.5.)

이종호

한국근현대문학을 공부하는 연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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