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감각을 통해 사유한다

사유의 세 가지 방식으로서 ‘철학’은 ‘개념’을 통해, ‘과학’은 ‘기능’을 통해, ‘예술’은 ‘감각’을 통해 사유한다. 이 글은 예술의 사유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마지막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5)를 통해 예술이 카오스 속에서 ‘구성의 구도’를 끌어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았다.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예술 작업 〈예술가는 여기 있다(The Artist is Present)〉(2010)도 함께 소개한다.

미리 일러두자면, 이 글은 『철학이란 무엇인가』(1995)에 대한 ‘부분’ 서평이다. 완전한 서평이었다면 철학과 과학에 대한 저자들의 통찰을 모두 아울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서평은 책이 다루는 세 가지 큰 갈래 중 예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7장. 지각, 정서, 개념〉이 중심으로, 이 장에서는 들뢰즈가 자신의 논문 「시뮬라크럼과 고대 철학(the simulacrum and ancient philosophy)」(1967)과 『감각의 논리』(1981)에서 이미 전개한 바 있는 예술에 대한 사유들이 다시 정리되어 있다. 현재 들뢰즈 이론을 차용하는 많은 예술 비평 담론에서는 이 책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마지막 합작품으로, 철학에 대한 사유로 시작해 과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통찰한다. 사유의 세 가지 방식으로서 ‘철학’은 ‘개념’을 통해, ‘과학’은 ‘기능’을 통해, ‘예술’은 ‘감각’을 통해 사유한다. 이 세 가지는 카오스 속에서 고유의 요소들을 통해 각자 ‘내재성’과 ‘지시 관계 혹은 좌표’, ‘구성’의 구도를 끌어낸다. 하나의 구도 상에서 창조된 개념, 기능, 감각이라는 각 요소는 다른 이질적 요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서로 구별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들은 사유에 있어서 각자 독립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저자들은 서로 얽히고 교차되는 세 가지 방식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카오스 속에서 사유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나는 예술이 감각을 통해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건 아마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회고전’ 퍼포먼스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The Artist is Present)〉(2010) 중 일부분

퍼포먼스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는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예술가가 여기 있다(The The Artist is Present)〉라는 흥미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미술관 내에 조성된 넓은 사각형의 공간 중앙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관객과 약 1분간 침묵 속에서 눈을 맞춘다. 작가의 퍼포먼스는 미술관의 폐장 시간을 제외하고 총 736시간 동안 이어졌다. 아브라모비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고, 작가와 대면하는 관객들은 때때로 웃거나, 울거나, 또 다른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퍼포먼스가 지속되는 내내 촉발되고 생성되어지며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예술 그 자체이며, 예술이 생성하는 감각들이다.

감각의 집적, 지각과 정서들의 복합체이자 구성물로서의 예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선보인 것처럼 퍼포먼스 예술은 기존의 시각 예술들과 달리 예술가나 관객 모두 예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는 주체와 대상의 분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하며, 예술가가 재현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재현 담론으로 예술을 분석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퍼포먼스는 늘 난해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예술일수록 작가가 작품에 담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비평가들은 재현에 집중하고, 관객은 이러한 비평에 구속된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에게 예술이 재현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것이 관객 혹은 청중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예술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모든 예술에 있어서 ‘재현’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했다. 그러므로 예술은 대상과 청중, 창조자에게 모두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유’를 위한 하나의 질료로서 감각을 생성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귀도 레니 (모사),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두상〉, 목판에 유채, 56cm×42.8cm, 1640년~1749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귀도 레니 (모사),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두상〉, 목판에 유채, 56cm×42.8cm, 1640년~1749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사진 출처 : nationalgallery.org

예술가들은 지각들과 정서들의 집적으로서 예술을 창조하고, 그러한 예술이 홀로 설 수 있게 만든다. 이때 들뢰즈-가타리는 지각 작용과 감각 작용을 지각, 정서 혹은 감각과 구분하여 사용한다. 예를 들어, 귀도 레니의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두상〉(1620)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그 고통에 동화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각 작용이나 감각 작용에 의한 재현의 산물이다. 그것은 모방이나 대상에 대한 체험을 통해 나오는 것이며 상상에 의한 동일화에 따른 것이다. 반면에 지각이나 정서, 감각은 재현이나 경험적인 체험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생성된 것이다.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속에서 관람객들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거나 웃는 것은 자칫하면 감동이나 위로에 의해 발생하는 감정, 감각 작용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재현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예술에 의해서 생성된 정서이자 감각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라모비치를 마주 본 관객은 그녀를 보는 지각 작용을 겪지만, 실질적으로 무언가 다른 것, 지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술의 감각적 생성에 의해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로-되어간다. 그들이 무언가가 되었는지는 정의내릴 수 없지만 말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창안한 이 퍼포먼스는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변화한다. 관객이자, 예술이자, 예술 그 자체인 사람들은 지각 작용이나 감각 작용을 넘어선 지각과 감각에 의해 무한한 ‘-되기’의 상태가 된다1. 아브라모비치(혹은 퍼포먼스의 모든 행위자)는 예술을 통해 다양한 정서들을 창안해내고 생성으로 발현시키며, 우리(퍼포먼스의 모든 행위자)에게 그것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무언가로 생성되도록 한다. 추상 미술, 단색화가 그랬듯이 어떤 –되기의 상태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술이 우리를 감각들의 구성물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확실하다. 예술은 생성된 다른 감각과 만나고 뒤섞이며, 한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 반복적으로 생성되고 이행되면서 구성의 구도를 만들어낸다.

*참고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 〈예측 불가〉, 퍼포먼스, 90분, 1977, 시립현대미술관, 볼로냐.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는 지금껏 존재해왔던 예술과는 다른 특이성으로 새로운 감각과 지각을 창조해내며 예술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특이성은 또 다른 예술 안에서 반복되어진다. 그러한 반복은 아브라모비치의 여러 다른 작업들도판2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완전히 다른 예술가의 예술이 보여주는 ‘우주’를 만나 새로운 감각이나 지각이 촉발되는 일탈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예술은 기존의 영토화된 것에서 다시 탈영토화로 나아가며 유한한 다양체들을 무한으로 향하게 한다. 이렇듯 감각을 통해 카오스 속에서 구성의 구도를 끌어내 사유로 나아간다.

예술적 사유를 넘어

들뢰즈-가타리는 철학이 무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즉, 내재성에 구도를 설정하여 사건들 내지는 일관된 개념들을 무한으로 이끌어간다고 말한다. 반면 과학은 지시 관계를 얻기 위해 무한을 포기하고, 정의되지 않은 좌표들의 구도를 설정하여 사물의 상태들과 기능들 내지는 지시적 명제들을 정의하게 하여 유한의 상태로 나아간다. 서로 상반되는 철학과 과학의 사이에서 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한다. 예술은 구성의 구도를 설정하여 무한한 카오스에서 감각 구성물들을 떠받치며 다양성을 생성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성의 구도는 다시금 카오스로 무한한 이동을 하며 열려있다. 그러나 예술을 통한 사유를 과학과 철학을 매개하는 사유 방식의 종합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사유들은 서로 교차되고 얽히며, 이들이 만드는 세 가지 구도들의 접합은 카오스에 대적하며 우리를 사유로 이끌어 나간다.

  1. 이것은 비단 작가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만이 아닌 모두에게 해당된다.

소연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사회를 이끌어나가기도 합니다. 예술을 통해 체현하는 감각적 경험은 강한 울림으로 우리를 사유로 이끌고, 의미를 생성해나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도록 하는 정동적 힘을 지닌 예술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