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술에 여성의 ‘어떻게’의 질문을 던진다 – 테크네(Techne)가 아닌 포이에시스(Poiesis)로서의 기술을 말하는 《여기공 협동조합》

2019년 9월 23일 월요일 오후 《여기공 협동조합》의 이현숙(인다)님과 민재희(세모)님을 문래동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만났다. 2시간 남짓 소요된 인터뷰는 여성의 시각에서 기술의 재전유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자리였다. 첨단기술사회에서 여성에게 기술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여성의 입장에서 대안적인 기술은 가능한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러나 너무 무겁지 않게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신승철: 《여기공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립니다. 어떤 말의 준말인지요.

《여기공 협동조합》의 인다와 세모
《여기공 협동조합》의 인다와 세모

인다 : ‘여성기술자’의 줄임말로서의 ‘여기’이면서, 지금-여기의 실존적인 의미의 ‘여기’이기도 합니다. 공은 작업과 제작을 뜻하는 공(工), 다양한 작업자들이 함께하는 공(共), 새롭게 공공성을 회복하자는 공(公)과 함께 비어있고 열려있는 공간, 空의 의미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저희는 영어로 여기here를 [시/공간의 실존적 의미]인 here로 쓰기도 하고 ‘her-e’로 하여, 여성(her)과 기술자(engineer)를 결합한 말로도 사용합니다.

세모 : 간혹 저희는 사람들에게 engineer의 e가 아니라, poeisis[제작]의 e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연과 생명의 표층에서 약탈하고 착취하고 갈취하려는 테크네(Techne)의 방법이 아닌, 자연과 생명을 돌보고 양육하고 보살피는 포이에시스의 방법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을 하면 인문사회연구자들은 “그렇구나.”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보통은 혼란을 주기 때문에 저희 마음속에 좌표로 포이에시스의 e 라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저희는 여성건설노동자의 현실로부터 시작하여 귀농귀촌한 여성에 대한 기술교육까지 담은 커다란 물음표를 가지고, 정동(affect)과 사랑, 돌봄에서 비롯된 연결망을 담으려고 합니다.

신승철 : 다른 시스템이 아닌 ‘협동조합’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일을 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요?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오던 ‘기술’을 여성, 어린이, 소수자 등과 함께하고자 한다.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오던 ‘기술’을 여성, 어린이, 소수자 등과 함께하고자 한다.

인다 : 저희는 일관되게 ‘모두의 이익’과 ‘모두의 기술’을 지향해 왔습니다. 그저 소비하고 소모하고 향유하는 소비자 일 개인으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 개인의 이득으로 모든 정동과 노동이 환원되는 플랫폼이 아니라, 모두의 이득이 되는 협동조합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희는 우리의 관계망이 비즈니스 모델에 입각한 플랫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플랫폼 자체가 갖는 ‘공통성을 개인의 사적 이득으로의 환원’이라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껴 이제는 플랫폼이라는 표현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세모 : 저희는 공유와 협동, 연대의 시각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개인적 이득이 추구하는 일을 하게 되더라도 서로에게 윈윈(win-win)이 되는 연대와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담자고요. 저희는 여기공을 통해 ‘모두의 기술’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공유의 사상은 그저 소비하고 향유하는 쉐어링(Sharing)의 다중이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커머닝(Commoning)에 기반한 공유지에서의 지혜와 정동(affect)의 생산을 의미합니다. 플랫폼은 노동자와 기술자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특정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는 비즈니스 거점으로 활용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협동조합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신승철 : 대안적인 기술에 대한 탐색이 참 많이 있어왔습니다. 적정기술, 녹색기술, 시민과학 등의 다양한 논의들이 있었지요. 《여기공》의 젠더와 기술의 융합이라는 문제의식은 어떤 위상을 가질까요?

인다 : ‘모두의 기술’의 출발점은 당연히 적정기술이었습니다. 먼저 기술에 대한 접근성의 문제나 삶을 통해 전유할 수 있는 숙련의 문제, 편하고 안전하게 가져다 쓸 수 있는가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그런 점에서 적정기술조차도 여기에 부적절한 측면들이 드러났습니다. 기술을 안전하게 모두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성, 어린이, 소수자도 쉽게 접근할 만큼 안전한 기술 문화, 접근성이 용이한 기술 문화에 대한 고민했습니다. 먼저 기술의 문화가 지나치게 투박한 남성 중심의 문화에 기반하고 있고, 기술 자체를 통해서 감각이 열리고 몸이 열리는 과정, 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과정이 저평가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몸의 감각이 열리지 않았는데, 기술을 어떻게 체득할 수 있을까요? 기술 습득은 감각과 안전같은 정서적인 것이 우선되어야, 원리와 물성 대한 이해 같은 물리적인 것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을 어떻게 안전하고 편안하고 평화롭게 가져다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여기공》이 출발했다.
기술을 어떻게 안전하고 편안하고 평화롭게 가져다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여기공》이 출발했다.

세모 : 사실 기술과 관련된 모든 사고는 안전 수칙을 잘 지킨다면 사전에 예방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기술을 접근할 때 결과론적인 방법이 지배하기 때문에 이런 과정들이 쉽게 생략됩니다. 멋진 것, 잘 작동하는 것, 형태가 잘 갖추어진 것, 잘 만들어진 것 다 결과물에 대한 찬양뿐입니다. 그런데 과정과 방법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만지는 솜씨나 그날의 날씨, 기계의 상태, 몸의 상태 이런 구성요소들은 다 어디 간 것일까요? 그저 과정을 삭제한 결과만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 속의 기술은 납작할 뿐이지 입체적이지 않습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빼꼭한 작은 글자가 담긴 매뉴얼이 적힌 한 장의 얇은 도형과 설계도면이 ‘납작해진 기술’의 모습들입니다. 이런 결과로서의 기술은 소수자들을 무수히 튕겨내 버립니다. 결과로서의 기술은 디테일한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대처할 방법도 없고, 사용을 위한 마음가짐과 몸의 자세도 없습니다. 심지어 질문을 던질 여백공간조차도 없습니다. 저희는 기술을 어떻게 안전하고 편안하고 평화롭게 가져다 쓸 수 있는지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여기공》이 여기 있게 된 것입니다.

신승철 : 첨단기술은 그것의 작동이유와 원인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지 못하면서도 잘 작동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어쩌면 이유와 원인에 대한 왜‘Why’의 질문이 아닌 어떻게‘How’가 더 잘 적용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현숙 : 저는 스마트폰의 사용법이 ‘어떻게’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스마트폰을 소비하고 소모하는 방법일 뿐인 것이지요. 기술의 위치성 다시 말해 배치를 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첨단기술은 우리 앞에 미션이나 모험과 같은 요소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실은 스토리나 이야기구조가 없이 그저 무감동하고 무감각한 물리적 현실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구상되었으며, 그 원재료를 어떻게 채굴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사물상태이지요. 저희의 삶도 함께 무감각하고 무감동으로 만드는 원천이 바로 첨단기술과 기술소비주의가 만든 현실입니다. 그것은 How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히 목적합리성, 도구주의의 결과물에 대한 질문인 What에 대한 질문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기술에서 인간의 요소를 부각시키고, 살아있는 기술, 몸과 감각과 함께 하는 기술로 재전유하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기술에서 인간의 요소를 부각시키고, 살아있는 기술, 몸과 감각과 함께 하는 기술로 재전유하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세모: How 즉 ‘어떻게?’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이 옷은 어떤 사람이 재단을 했을까? 목화는 어디서 생산되고 가공은 어떤 노동자가 했을까? 목화를 키운 바람과 태양은 어떤 것이었을까? 재단하고 봉제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유통과정에서 어떤 경로를 거쳤을까?” 이런 것들입니다. 심지어 스마트폰이라 하더라도 희토류를 캔 노동자가 있을 것이고, 스마트폰 자동화된 공장에서 주목노동을 하고 관리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포장지로 감싸는 단순노동을 했던 노동자가 있을 것입니다. 즉, 다양한 작동의 층위에서 인간이 개입한 흔적을 보는 것이 ‘어떻게?’의 질문입니다. 첨단기술을 논의하고, 포스트휴먼을 논의할지라도 기술에서 인간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오히려 그것을 부각시키고 살아있는 기술, 몸과 감각과 함께 하는 기술로 재전유하는 것이 지혜와 정동으로 나아가는 ‘어떻게?’라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승철 : 기술의 배치는 어쩌면 왜’why’라는 질문의 연결방식으로서의 어떻게‘How’의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질문과 질문을 연결하는 지혜와 정동의 방식을 미신과 구습, 주술이라고도 생각해 왔던 역사가 있습니다. 질문에는 확실한 대답이 있다는 전문가주의가 그것입니다.

인다 : 전문가주의에서는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기술을 직접 손으로 몸으로 사용하다보면 여러 가지 방법과 경로가 등장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제기가 떠올라 “이렇게 해볼까? 아니 저렇게는”라는 다양한 선택지와 질문의 말뭉치와 접하게 됩니다. 그 제작(Poiesis)의 과정에서는 원리, 적용, 방법, 지혜, 문제설정, 작동 등이 모여서 춤을 추고 향연을 벌입니다.

신승철 : 일종의 소농의 노동과 비슷하겠네요.

신승철 : 첨단기술사회에서의 여성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최근 들어 가사노동에 대한 기계화를 통해서 정동과 돌봄에서의 해방도 논의되고 있는데 그게 사실일까요?

기술을 부정하고 과거로 회귀하며 원시화된 기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적 지혜를 발휘하며 지금까지의 기술을, 혹은 앞으로의 기술에 대해서 끊임없이 참여하고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
기술을 부정하고 과거로 회귀하며 원시화된 기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적 지혜를 발휘하며 지금까지의 기술을, 혹은 앞으로의 기술에 대해서 끊임없이 참여하고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

세모 : 저희 어머니께서 식기세척기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사노동의 기계화로 인해 단순히 일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긍정하는 게 맞을까요? 결과적으로 어머니께서 주목노동과 관리노동을 하셨고, ‘일이 비교적 줄었다’라는 판단은 일정하게 서지만, 첨단기술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은 더 느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식기세척기에는 대량의 물과 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감추어집니다. 첨단기술은 문제의 본질을 더욱 은폐합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생태계에 대한 영향은 더 교묘히 감추어지고 수면 아래로 감추어집니다. 마치 정보가 맥락과 배치로부터 벗어나서 마구 유통되고 있는 것과 유사한 특징을 첨단기술이 갖고 있습니다. 핵발전소처럼 지속가능하지 않는 기술이 외국인노동자의 신체에 파멸적인 결과를 낳는 것처럼, 기술은 누가 만들고 누가 생산하고 누가 개발했는지 그 사용의 결과는 무엇인지 모른 채 마치 하나의 정보처럼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첨단기술이 낳은 전문가주의의 기괴한 모습이지요.

인다: 그래서 저희는 어떤 기술이 옳다 그르다 하는 것보다는 그 기술 안에 인간의 개입이, 혹은 사용하는 사람, 만드는 제작자들의 개입이 얼만큼 가능한가에 더 주목합니다. 더 많은 과정의 개입은 더 많은 관계의 변화를 초래하고. 다양한 제작에 참여할수록 관계는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는 기술을 부정하고 과거로 회귀하며 원시화된 기술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적 지혜를 발휘하며 지금까지의 기술을, 혹은 앞으로의 기술에 대해서 끊임없이 참여하고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것들,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서 같이 토론하며 기술과의 관계를 맺어가려고 합니다.

신승철 : 오늘 바쁘신 데도 오셔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성과 기술이라는 두 개의 큰 영역이 만나 만드는 화음과 리듬을 들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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