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춤과 축구와 두 교황 ; 영화 《두 교황》 관람 후기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여주는 변신이 필요할 때,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 절대자나 종교적 지도자에게 그것을 기대했던 듯하고, 놀랍게도 그런 기대가 이루어진 느낌을 사람들은 받고 있다. 그러한 기대와 그 결과가 허상일지라도 그때의 그 종교적 지도자가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더 나아지려는 자라면 사람들이 덜 속고 부수적 피해 또한 덜할 것 같기는 하다.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善終)하고, 새 교황 선출과정이 진행된다. 이 결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다.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했고, 호르헤 베르골리오가 선출과정을 거쳐 새 교황 프란치스코가 되었다. 이렇듯 무미건조하게 요약할 수 있는 교회권력 승계과정을 나름대로 해석한 영화가 《두 교황》이다.

영화는 두 교황의 세 차례 만남에 집중한다. 첫 번째, 2005년의 교황 선출과정에서 두 교황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과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으로 만난다. 두 번째, 2012년에 두 교황은 비서의 부정 등 바티칸 스캔들의 와중에 시련에 처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자신의 사임을 교황에게 청하고자 로마를 방문한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으로 만난다. 세 번째, 현임 교황 프란치스코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독일이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결승을 함께 관람한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Fernando Meirelles 감독, 영화 《두 교황 The Two Popes》(2019) 포스터, 러닝타임 126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Fernando Meirelles 감독, 영화 《두 교황 The Two Popes》(2019) 포스터, 러닝타임 126분

누구에게든 어떤 만남은 피하고 싶을 때가 있고, 만남 자체가 없이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만남을 통해서만 해결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계획에 없던 만남이 의도치 않았던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주제는 만남이라고 우겨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손을 씻으면서 아바의 〈댄싱 퀸〉을 흥얼거린다. 이를 들은 요제프 라칭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돌아서지만, 그 표정은 교황 선출과정에서 베르골리오가 적지 않은 표를 얻는 것을 보면서 또 다른 색깔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뀐다. 베네딕토 16세이기 이전의 요제프 라칭거는 가톨릭의 교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독일 출신이지만 언론에 의해 바티칸의 중심인물로 꼽히고 인권의 옹호자이면서 보수파인 것으로 평가되던 추기경이었다. 그는 교황 선출을 위해 모인 추기경들의 식탁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의 진실”을 역설하는 유세를 한 교황 ‘출마자’였다. 가톨릭의 교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유력한 교황 후보인 이탈리아의 개혁자 카를로 마르티니 추기경으로부터 교황직을 권고 받는 처지에 있었지만 아마도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에게는 ‘상대주의자’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 만남이 이루어진 2005년의 교황 선출과정에서 요제프 라징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두 번째 만남은 바티칸 스캔들로 어수선하던 2012년에 있었다. 이때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추기경 사임원서에 베네틱토 16세의 서명을 받기 위해서 로마행 비행기표를 구입한 상황에서 교황의 까닭모를 호출을 받게 된다. 두 사람은 교황의 여름별장과 로마 교황청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며칠간 꽤 긴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평소와는 다르게 추기경 정복까지 차려입고 교황을 알현해야했던 추기경은 ‘탱고를 혼자 추냐?’ ‘그래서 자살하겠다는 거냐?’ 등등 까칠하고 냉소적이지만 조금은 재치있어 보이기도 하는 교황의 질문들을 받으면서 저녁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추기경의 품위 유지를 위해서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춘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자기 감정에 충만한 나머지 자아가 머리에 도달할 틈이 없어서 자살을 못한다’ 등등의 답변으로 응수하면서 함께 한다. 밤 시간 휴게실에서도 추기경은 사임원서를 들이밀지만 교황은 응답을 피하는 대신 자신의 취향을 보여준다. 피아니스트 교황은 스메타나의 자장가를 연주해 들려주지만, 비틀즈가 《애비로드》를 녹음했던 곳에서 자신도 녹음을 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걸 굳이 언급하는 것은 천박하다는 듯 이야기하며 애비로드가 어딘지도 모른다고 잡아뗀다.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의 연주를 보려는 추기경으로부터 리모컨을 빼앗은 교황은 개가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영화로 채널을 돌리면서 머리를 비우는 데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좋다며 교황답지 않아 보일 수도 있는 어깃장을 놓는가 하면, 축구를 좋아하는 추기경의 취향을 모르쇠로 무시하지만, 자기가 소싯적에 베를린의 캬바레에서 들었던 곡을 피아노로 조금 연주해주기도 한다. 퇴임을 간절히 원하는 추기경으로부터 온갖 인생 고백을 끌어내면서도, 교황은 답을 주는 대신 자신의 취향의 다양함을 과시한 셈이었는데, 그것은 결국 자신이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는 고백이 된 듯하다.

스캔들을 피하려는 듯 여름별장에 와 있던 교황이 갑자기 로마로 돌아가자 추기경도 덩달아 교황의 헬리콥터에 동승하게 된다. 이 비리 연루 혐의 교황의 발작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느닷없는 행보에 유럽 공용의 저항가로 오래 사용되어 온 〈벨라 차오 bella ciao〉가 깔린다. ‘사랑하는 이여 안녕, 사람들은 나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저항의 꽃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략 이런 내용의 가사가 은은한 아카펠라로 흐른다. 누가 어떤 저항을 한다는 거지? 헬리콥터 안에서도 교황은 추기경의 사임원서를 외면하는 대신 ‘추기경들에게 나쁜 소식은 라틴어로 전하라’는 둥 추기경을 ‘교황청 인턴’ 대하듯 한다. 덩달이가 되어버린 추기경은, 밤이 되자 축구중계를 해 주는 펍에 가서 아르헨티나가 이기는 경기를 관람하며 고단한 신세를 풀려 한 듯하다. 그러다가 옆 자리 남자가 베네틱토 16세 교황을 나치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자,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인질이 납치범을 걱정하듯 교황을 동정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튿날, 추기경은 교황의 호출에 따라 어떤 장소로 가게 되는데, 둘러보니 그곳은 교황 선출과정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교황은 추기경만의 비밀을 만들어준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교황에서 물러날 뿐만 아니라 추기경을 다음 교황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추기경을 그만두려고 교황을 만나러 온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스캔들에 휩싸인 바티칸에서 교황직을 제안 받은 것이다. “나는 1976년 아르헨티나의 쿠데타 이후 예수회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부역하였다, 나는 신부의 성범죄를 알고 있음에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상당기간 듣지 못하였다.” 등등, 두 성직자는 관광객을 피해 장소를 옮겨가면서 ‘내가 더 나쁜 신부 배틀’을 이어가다가, 상호 고해성사로 배틀을 마감한다. 그리하고는 마음이 편하여졌는지, 관광객들로 가득찬 방 쪽으로 난 문을 열고 나서게 된다. 놀라며 기뻐하는 관광객들 사이를 누비며 그들에게 복을 내리면서 이동하는 교황의 걸음걸음은 ‘비리 교황의 위기탈출 쇼’라는 비아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직도 아직은 가톨릭의 블루오션임이 분명한 아르헨티나에서 온 추기경은 경호원을 부르려는 비서를 “행복해 하시잖아요!” 라는 말로 만류한다. 귀국하는 추기경을 배웅하러 나오면서도 라틴어 사용법 등 교황직 수행 요령을 주입하는 교황에게 탱고 추기를 강권하여 교황청 건물 가운데 마당에서 교황을 마음에 없이 무도장에 끌려나온 파트너를 만드는 등 추기경이 뒤끝을 작렬시키긴 하였지만, 2013년, 교황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진 퇴위하고, 추기경은 교황이 되었다. 음악과 춤은 변화를 표현하여줄 뿐만 아니라 변화를 가능하게 하여주기도 하는 것 아닐까? 음악과 춤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사용해야 가능한 것이니까 말이다. 교황에게 탱고를 권한 것이 추기경의 뒤끝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세 번째 만남에서 두 교황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의 TV 중계를 함께 보았다.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비로소 축구의 묘미를 알았다는 듯 말하지만 맥주를 마시며 유혈낭자한 경기를 보면서 독일 편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등, 축구에 관한 한 프란시스코 교황과 유사한 행태를 보여준다.

이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유명한 멕시코 노래 〈베사메 무쵸 Bésame mucho〉의 연주곡이 은은하게 깔린다. 그 가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키스해 주세요, 많이 해주세요[Bésame, bésame mucho].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 키스해 주세요, 많이 해주세요. 그대를 잃을까 두려워요, 지금 이후로 그대를 잃을까봐. / 그대를 매우 가까이 하고 싶어요, 그대 눈 속에서 나를 보고,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마도 내일 나는 이미 멀리 있을 거라고, 당신으로부터 아주 멀리. / 키스해 주세요, 많이 해주세요.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베사메 무쵸 Bésame mucho〉는 이 영화가 시작될 때, 항공사 콜센터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통화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이기도 하였다.

“상처뿐인 두 영광, 서로의 얼굴 앞에 관용 연민 혹은 무지의 베일을 드리우다.” 영화를 첫 번째 보았을 때, 영화 관람후기를 쓴다면 붙일 제목으로 떠올렸던 것이다. 아직도 교황은 영광스러운 자리지만, 영화 속 두 교황은 상처뿐인 영광을 얻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교황이 마냥 자신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여기고 고수하려 하였다면 영화 속에서와는 다른 현실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였다고 영화는 해석한 듯하다. 변화의 과정에서 그들이 서로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정리하여 볼 수 있을까? 상대방의 어두운 과거를 모르는 척 하기로 한 것인가? 꽤 오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연민이 생긴 것인가? 여러 심적 정치적 장벽들을 넘거나 부수고 상대방을 관용하기에 도달한 것인가? 타자에 대한 방법론적이고 의도적이며 한시적인 무지, 연민, 관용이 서로 엄격히 구분되는 것인가? 영화를 본 후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변신 그것도 변신하기 지극히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변신에 관한 이야기 같다. 두 교황은 각각 서로 다른 이유에서 변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변한 것 같다. 특히 서로에 대한 평가와 이해에서 변한 것 같다. 어떠한 상황 변화에도 가톨릭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 같은 바티칸 광장의 군중과 교황선출을 현장중계 하는 언론에 비교하여보면 두 교황의 변신이 더욱 도드라져 보일 것 같다. 영화는 두 교황의 변화를 음악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베네딕토 16세가 스메타나 자장가 연주에 뒤이어 베를린의 캬바레에서 들었던 음악을 연주한 것은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에 대한 태도의 변화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것 같았다. 가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벨라 차오〉 아카펠라는 그 노래가 흐르는 시점을 전후한 베네딕토 16세의 결단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베사메 무쵸〉는 멕시코 아래의 아메리카 대륙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명곡이긴 하지만, 아마도 탱고라는 강력한 음악을 가진 아르헨티나의 사람들에게는 선호도가 낮은 노래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노래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만남이 끝나는 장면의 탱고는 베네딕토 16세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정체모를 장애와 그 장애 앞에 멈출 수 없었던 교황으로서의 요제프 라칭거 그리고 그에게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 주려고하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선의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속사정을 드러내 보여준 것 같다. 세 번째 만남에서의 축구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써의 두 교황의 면모를 너무 뻔히 보여주는 장치 같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내적 변화를 확연히 보여주기도 한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관광객들은 방금 전에 상호 고해성사 셀프면죄를 행한 교황에게 공손히 예를 표하고, 바티칸 광장에서 군중은 어서 빨리 새로운 교황이 정해지길 기다리며 울고 웃고, 언론은 교황 선출과정에 대해서 바로바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신이 난 듯 바티칸 광장을 현장중계 한다. 그러는 사이에 두 교황은 치열하게 변하고 있었다는 것이 영화가 전해 준 소식 가운데 하나이다. 두 교황들이 고생스럽게 변하였으므로 관광객과 군중과 언론은 그 고생을 면하고 행복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아니면 관광객이나 군중이나 언론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톨릭 신자들이 두 교황에게 변신이라는 숙제를 준 것일까?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여주는 변신이 필요할 때,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 절대자나 종교적 지도자에게 그것을 기대했던 듯하고, 놀랍게도 그런 기대가 이루어진 느낌을 사람들은 받고 있다. 그러한 기대와 그 결과가 허상일지라도 그때의 그 종교적 지도자가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더 나아지려는 자라면 사람들이 덜 속고 부수적 피해 또한 덜할 것 같기는 하다.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도 꼼꼼히 해보려 하였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질 않을 듯하였고, 음악과 춤에 좀 더 관심을 두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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