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역사를 읽으며 분배의 정치와 기후 위기를 생각하다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사기』 「잡지」 ‘악’ 읽기

『삼국사기』 「잡지」 ‘악’은 고구려・백제・신라 특히 신라의 음악에 관한 기록이다. 분배를 고민하는 정치를 드러내는 『예기』 「악기」와도 다르게, 그냥 음악에 관한 기록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읽다 보면, 분배와 정치와 기후 위기에 관하여 생각해 볼 계기를 가지게 된다.

대상화・박제화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잡지」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잡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잡지(雜志)」는, 제사(祭祀) 악(樂) 색복(色服)[의복] 거기(車騎)[수레] 기용(器用)[기물] 옥사(屋舍)[집] 지리(地理) 직관(職官) 등을 택하여, 삼국시대에 그 분야가 어떠하였는지를 각각 기록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악’은 삼국시대에 음악 분야가 어떠하였는지를 기록한 것이다. 먼저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신라의 음악을 기록했고, 글의 끝부분에 간략하게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을 기록했다.

고구려 음악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백과전서적인 책인 『통전』과 『책부원귀』를 인용하여 만들었다. 『통전』을 인용한 기록은 어떤 가무에 참여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그 가무에 사용된 악기 17종을 기록한 후, “당 무태후(武太后)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복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책부원귀』에서는 고구려에서 사용된 악기들을 인용하였는데, 모두 5종이며 『통전』에도 나왔던 것들이다. 백제 음악에 관한 기록은 『통전』과 남북조 시기 북조의 정사인 『북사』를 인용하여 만들었다. 『북사』를 인용해서 백제에 악기 고(鼓)・각(角)・공후(箜篌)・쟁(箏)・우(竽)・지(箎)・적(笛)이 있었다고 썼다. 『통전』을 인용한 기록은 어떤 가무에 참여한 사람들의 옷차림을 기록한 후 “남아 있는 악기는 쟁(箏)・적(笛)・도피필률(桃皮篳篥)・공후(箜篌)인데, 악기류는 대부분 중국과 같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더하여, 『통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하였다. “백제 음악은 당나라 중종(中宗) 시대에 악공들이 죽고 흩어졌는데, 개원(開元) 연간에 기왕범(岐王範)이 태상경(太常卿)이 되어서야 다시 백제 음악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였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은 음곡이 많다.” 이 기록은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가 자기들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백제의 가무를 보존하고 때로 공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앞서 고구려 음악과 관련하여 “당 무태후(武太后)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복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적은 것도,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가 자기들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가무를 보존하고 공연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차츰 인멸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였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여준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이러한 『통전』・『책부원귀』・『북사』 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고구려・백제 음악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 같다. 이를 통하여 악기뿐만 아니라 가무 참여자의 복색에 관한 정보가 후세에 전하여지게 되어 음악사・복식사 등 여러 분야사 연구자들의 다양한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색깔 등 옷의 여러 특징은, 종교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고, 신분・계층의 구분과 관련된 경우도 많으므로, 종교사나 정치사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이 기록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당나라가 자신들이 멸망시킨 나라의 가무를 보존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과 평가가 가능할 듯하다. ① 당나라 때 중국 사람들이 외래 문물에 대하여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을 하였다. ② 문화에 관한 열린 자세를 가진 당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나라의 문화도 박멸하기보다는 보존하고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문화를 풍부하게 하였다. ③ 문화의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망한 나라 문화 보존이 미래의 문화를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그런 일에 힘썼다. ④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문화를 기준 삼아 망한 나라의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면서도 그것을 전시함으로써,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려고 하였다. ⑤ 가무를 전리품으로 보는 동시에, 중국 문화는 모든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음을 과시하거나, 애초에 그 문화들이 중국 문화를 연원으로 한 것이었음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⑥ 정복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멸망시킨 나라의 죽은 사람과 산 사람과 태어날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망한 나라의 가무를 보존했다. ⑦ 당나라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발생한 현상으로, 문화의 대상화・박제화를 꼽을 수 있다. 당나라 사람들은 어떤 가무를 그것이 행하여지던 맥락으로부터 빼내서 공연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그 어떤 가무가 본래 속해있던 맥락 속에 있을 때 가졌던 특성은 감퇴되었을 것 같다. 그것은 본래의 의미와 무관하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 같다. 본래의 풍토를 떠나 당나라의 것이 되면서 그것은 당나라 사회에서 주된 것이기보다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고구려・백제 문화에 관한 정보를 얻는 일이 더 어렵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⑦에 주목하여보겠다. ⑦은 대상화・박제화의 양면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 이는 문화를 대상으로 할 때 두드러지게 문제가 되는 태도이며, 이 태도에 수반되는 현상 그리고 이 태도가 가지는 양면성은 이미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 대상화・박제화는 인류와 물적 세계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지나간 세기에 쓰였던 ‘자연보호’나 ‘개발제한’ 따위의 용어들은 이제 자주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물적 세계를 대할 때 어느 누구도 인본주의적 사고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대상화・박제화는 정치다. 그것이 문화를 대상으로 할 때는, 특정 문화의 대상화・박제화를 기도하는 주체에게, 그 특정 문화를 향유하여 온 사람들이, 그 문화라는 자원 자체와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의 정의로운 분배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논리적으로는 그러하다. 이에 비하여, 인류가 물적 세계를 대상화・박제화할 때, 물적 세계는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이제, 물적 세계는 눈에 보이는 등 신체 각 기관이 알아차릴 수 있게 인류에게 경고하고 있다. 환경의 오염과 파괴 그리고 이상기후가 그 경고의 예이다. 이제 2030년이 인류 최후의 해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농담이나 엄살로 들리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시적 노력들은 그저 사소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보호’와 같은 대상화・박제화가 멸망의 시점으로 가는 시계바늘을 잠깐 붙잡아놓았던 것이 시사하는 바도 지금의 인류에게는 소중하다 해야 할 것이다. 할 수 있으면 그것도 해야 한다.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버려진 집 모퉁이에 풀 한 포기 심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당나라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때나마 대상화・박제화라는 방식에 의한 것일망정 고구려・백제 음악을 보존하지 않았다면,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고구려・백제 음악을 재구성하는 일은 지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화・박제화라는 방식에 의해 보존된 고구려・백제 음악이 정녕 원형적인 것인가 하는 의심은 앞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처하였던 이러한 형편은 멸망 5초 전을 살고있는 인류에게도 성찰의 계기가 되어줄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희망・낙관・긍정 따위들이 같이하여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잔치・축제

『삼국사기』 「잡지」 ‘악’[이 아래에서는 ‘악’으로 줄여쓰겠음]에서, 신락 음악에 관한 기록은 고구려・백제 음악에 관한 기록보다 꽤 많이 상세하다. 먼저, 고구려・백제의 경우와 같게, 어떤 가무에 참여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그 가무에 사용된 악기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백제의 경우와 다르게, 현금(玄琴)[거문고]・가야금(加耶琴)・비파(琵琶)・삼죽(三竹) 등 신라의 몇몇 악기에 관하여, 『석명(釋名)』・『풍속통(風俗通)』・『금조(琴操)』・『신라고기(新羅古記)』 따위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은, 악기의 각 부분을 천지자연의 이치와 정치의 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것들을 유교의 언어를 가지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현금[거문고]을 설명하면서 “일곱 줄은 칠성(七星)을 모방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은, 칠성이 동북 아시아 샤머니즘 속 주요 신격 가운데 하나임을 고려한다면, 다소 이채롭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점을 제외하면, ‘악’ 편찬자는 현금의 원형이 되는 악기가 중국으로부터 전하여졌으며 유교문화가 젖어 들어있는 중국문화에 의하여 그 성격이 정의되어있는 것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악’의 편찬자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면서, 이러한 현금[거문고]은 진(晉)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전하였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 신라의 옥보고(玉寶高) – 속명득(續命得) – 귀금(貴金) –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 극상(克相)과 극종(克宗) 등등이 이어가며, 악기를 개량하고, 연주의 수준을 높이고, 연주곡을 창작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 왕은 현금[거문고]의 연주법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을 보면, 신라 왕도 가무음곡을 정치적으로 중시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런 역사 속에서 당악(唐樂) 즉 중국음악은 향악(鄕樂) 즉 중국이 아닌 정치체의 풍토에 적합한 음악으로 거듭났음을, 현금[거문고]에 관련된 기록은 보여준다.

가야금(加耶琴)에 대한 설명도 유사하다. 중국 진(秦)나라에 쟁(箏)이라는 악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당나라의 악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이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실왕은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聲音)이 다른 것인데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왕명에 따라 우륵(于勒)이 가야금 연주곡을 창작하였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순하였다고 한다. 이후 신라 사람 주지(注知)・계고(階古)・만덕(萬德)이 우륵의 창작곡에 대하여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繁淫] 우아한[雅正] 음악이 될 수 없다”고 평한 후 편곡을 하였는데, 이를 우륵이 듣고는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면서 왕 앞에서 연주하니, 진흥왕이,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에서는 취할 것이 없다고 하는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대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왕은 그 편곡된 창작곡을 대악(大樂)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가 외래 음악[당악] 그대로가 아니라 신라의 풍토에 의하여 신라에 맞게 조절된 음악을 신라의 음악[향악]으로 삼은 것이다.

삼죽(三竹) 즉 피리[적(笛)]에 관한 기록에서는 ‘악’의 편찬자가 두 가지 주목할만한 주장을 한다. 하나는, 신라가 이미 써 오고 있었던 피리와 별도로 외래의 피리를 모방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나라도 한나라도 아닌 강(羌)족의 피리를 기원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만파식적(萬波息笛)에 관한 『신라고기』의 설명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삼국유사』 「기이」 ‘만파식적’에도 보이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는, 김춘추의 자손은 용왕이 되고 김유신은 천신이 되어 힘을 합쳐 신라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나가야 한다는 바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나무 피리 만파식적을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건국 초에 신라의 계승을 표방하였던 고려의 사관은 ‘악’을 편찬하면서 『삼국유사』와 거의 유사해 보이는 『신라고기』의 만파식적 설명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고려의 사관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악’에는,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부터 신라 각지에서 만들어진 음악의 제목들도 열거되어 있는데, 편찬자는 그 끝을 다음과 같은 판단으로 마감하였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웠을 때 만들었다[此皆鄕人喜樂之所由作也].” 유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음악을 기쁨과 즐거움[喜樂]의 소산으로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사관들은 상당한 수준의 유교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신라 음악에 대한 위와 같은 판단은 그러한 사관들의 것으로서는 박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유교인들은 직필(直筆)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신라 음악을 자신들의 가치기준에 맞춰 왜곡하지 않았을 듯하다.

가무음곡과 예악은 도덕적 엄숙주위나 윤리적 결벽성과 연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원과 기회를 분배하는 하나의 엄격한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Erik Mclean
가무음곡과 예악은 도덕적 엄숙주위나 윤리적 결벽성과 연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원과 기회를 분배하는 하나의 엄격한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Erik Mclean

신라의 악기들에 대한 ‘악’의 설명은 주체성에 대하여 성찰할 기회라 할 수 있다. ‘악’의 편찬자들은 신라의 악기들이 중국에서 전래되었거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고 밝혔다. 주체성은 완벽한 독립성의 동의어가 아닌 것이다. 신라의 음악들은 신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웠을 때 만들었다는 판단도 눈에 뜨인다. 이러한 판단이 맞는 것이라면 신라 사람들은 도덕적 엄숙주위나 윤리적 결벽성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웠을 법하다. 가무음곡과 예악은 도덕적 엄숙주위나 윤리적 결벽성과 연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원과 기회를 분배하는 하나의 엄격한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잔치・축제 또한 분배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었다는 기쁘고 즐거웠을 때. 그때는 잔치・축제의 시간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인류는 멸망 5초 전으로 몰리고 있기도 하거니와 극심한 불평등과 불공정이 억압하는 상황에 처하여 있기도 하다. 그러한 가운데 생산 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실업자를 양산함과 동시에 불가피한 대량생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너무 많이 생산되는 상품을 소비해 줄 더 많은 소비자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현상은 자원의 고갈을 가져올 수 있어 위험하다. 그러나, 자원의 고갈만큼은 아니지만, 한시적으로나마 소비대중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처하여 잔치・축제는 소비의 계기가 되어줄 뿐만 분배를 원활히 하여줄 수도 있다.

이러한 사정에 주목한다면, 기쁘고 즐거웠을 때 음악을 만들었다는 신라 사람들은 엄숙한 예악을 매개로 질서있는 분배를 꾀한 중국 정치의 강력한 자장(磁場)에 근접하여 있으면서도 잔치・축제라는 독자적인 분배방식을 가진 주체적인 정치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진흥왕의 말은 정치가 음률 곡조 나아가 천지자연의 질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기반으로 우주적 질서로 정치 특히 분배를 보증하려고 하는 강력한 정치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으면서도, 진흥왕은 사람 나아가 사람의 정감과 의지에 상대적이나마 더 큰 강조점을 찍은 것이다.

개방・유연

‘악’의 마지막 부분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시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가 실려 있다. 그 시들의 제목과 소재는 다음과 같다.

  • 「금환(金丸)」: 여러 개의 공을 번갈아 던지고 받으며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 곡예
  • 「월전(月顚)」: 여러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고성방가하며 밤을 새우는 정황 혹은 이러한 정황을 배경으로 하는 흥겨운 상황극
  • 「대면(大面)」: 황금빛 탈을 쓰고 손에 구슬이 달린 채찍을 쥐고 귀신 쫓는 시늉을 하면서 추는 춤을 춰서 어려움을 몰아내는[구난(驅難)] 가면무용극
  • 「속독(束毒)」: 산발(散髮)한 채 남색 탈을 쓰고 북소리에 맞추어 떼를 지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춤을 추는 가면무용극
  • 「산예(狻猊)」: 사자의 탈을 쓰고서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휘두르는 가면극
이러한 유연함을 모두 가지지 못한다면, 기후 위기의 원인이 되는 자원 사용과 소비의 불균형은 계속 은폐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8385
이러한 유연함을 모두 가지지 못한다면, 기후 위기의 원인이 되는 자원 사용과 소비의 불균형은 계속 은폐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8385

‘악’의 편찬자는 이 시들이 신라의 가무음곡의 일부를 묘사하고 있다고 보아 ‘악’의 끝에 수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서 서역 문화를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었던 최치원은 이 연작시에 서역의 영향이 두드러져 보이는 연희를 담은 것 같다. 「대면」에 등장하는 황금빛 탈을 쓴 인물은 처용을 연상시킨다. 「속독」을 중앙아시아의 유서깊은 유목민족 소그드(Sogd)의 영향을 받은 연희를 담은 가면무용극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전하여지고 있는 「산예」 속의 사자춤도 중앙아시아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최치원이 이런 중앙아시아적 색채를 그때 당시의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였을 것이다.

최치원의 이러한 안목에 힘입어 후대 사람들은 신라 문화가 다양한 외래문화를 자양분으로 하였으리라는 추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최치원은 신라 문화 등 한국 문화가 중국 못지않게 중앙아시아 문화와 교류하면서 생성된 것이라는 상상의 계기를 준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문화를 향해 개방되어있기보다는 하나의 문화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문화는 우상에 다름 아니고, 그 우상에 대한 문화적 종속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종속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만을 바라보는 자는 우상 외의 어떤 것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개방성은 유연성을 가져올 것이다. 특정 정치체를 대국(大國)・강대국(强大國)・선진국(先進國)이라고 부르며 우러르는 의식을 한 꺼풀 벗기면 그 안에는 식민본국(植民本國)・내지(內地)가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언동에 있어서의 선진국에 대한 존중은 내면에 있어서의 식민본국에 대한 우상화와 굴종에 다름 아니다. 우상만을 향하지 않고 개방을 통하여 다수의 정치체를 비교해 볼 수 있으면, 의식 속의 식민본국・내지는 해소될 것이고, 한 대상을 향한 경직된 숭배에서도 벗어나 복수의 정치체들을 비교 평가하는 것을 통하여 유연한 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연함을 모두 가지지 못한다면, 기후 위기의 원인이 되는 자원 사용과 소비의 불균형은 계속 은폐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글에 인용된 『삼국사기』의 판본 :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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