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의 차원에서 매너・세레머니・리추얼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사기』 「잡지」 ‘제사’ 읽기

역사 속의 의례와 제사들을 살펴본다는 것은 물심양면 달리 말하자면 자원의 분배와 마음 씀 등 따로인 듯하면서도 같이 가는 삶의 양면을 두루 살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제사를 통하여 엄중하게 상하 서열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제사가 끝나갈 때 모두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하나’가 되었던 것을 생각해 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사(祭祀)’를 오늘날 살펴보는 것은 의례와 제사를 통하여 보다 많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만족할 수 있는 분배를 도모하였던 사례들을 간접 체험해 보는 기회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 속의 매너(manner)・세레머니(ceremony)・리추얼(ritual)

나와 떨어져 혼자 살고 있는 가족의 반려묘가 죽었다고 하자. 그 가족과의 관계를 의식해서도 나는 애도를 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의식하기 이전에, 직접 혹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익히 보아왔던 그 반려묘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떠올라서, 반려묘의 죽음을 감당하고 있는 가족에 공감하고 ‘작별의 예식’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려 할 것이다. 이런 작별의 예식을 생각해보면 제사라는 것은 아직 삶에 바짝 붙어있는 인정하게 될 것 같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잡지」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잡지」

제사는 물심양면에 걸쳐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자원의 소비를 수반하는 일이며 규모에 따라서 필요 자원의 규모가 대단히 커지기도 한다. 제사는 또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한 서열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동하거나, 직접 자원을 분배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제사를 통하여 사회적 잉여를 소진하여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제사는 감정이라는 자원의 사용・분배・소진의 장이기도 하다. 멀리서 와야 하는 친척들까지 다 모이는 제사는 급격히 소멸되어가지만, 앞서 예로 들었던 작별의 예식과 같은 경우들을 생각해 보면, 제사는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사회 속에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이나 가족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국가의 운영이나 최고 권력자의 행위와 관련해서도, 제사의 바탕이 되는 예의 차원에서 논란을 벌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2022년 10월 29일에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를 추모하는 과정을 돌이켜보거나, 2022년 9월에 있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 조문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경우에서 사람들은 예(禮)를 둘러싼 논란을 공감의 강화나 약화와 연결시키는 동시에 곧바로 나라 안팎에 걸친 기회와 자원의 분배 문제를 결부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가진 이런 생각을 삼국시대 사람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사(祭祀)’에 기록되어있는 매너(manner)와 세레머니(ceremony)와 리추얼(ritual)들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예(禮)・공감・분배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했던 생각들을 추론하여볼 수 있는 단서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보이는 3국 국가전례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사(祭祀)’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차례로 국가 차원에서 한 제사들을 서술한 글이다. 이제 이 자료에 보이는 삼국의 국가 전례를 (1)에서 (6)까지로 나누고, 각각에 관하여 (1)-1에서 (6)-1까지로 나누어 비평을 하여 볼 것이다.

[신라의 국가전례]

(1) 제2대 남해왕(南解王)이 재위 3년(서기 6)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친여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제22대 지증왕(智證王)이 시조의 탄생지인 내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지어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제36대 혜공왕(惠恭王)이 ‘비로소’ 5묘(五廟)를 만들었으며, 제37대 선덕왕(宣德王)이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

(1)-1 신라의 제2대 왕인 남해 차차웅이 세운 제1대 왕 혁거세 거서간의 사당은 중국식 혹은 유교식으로 조상의 신위를 모신 장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남해의 친여동생 아로가 그곳의 제사를 주관하였다는 것이다. 남해 차차웅의 재위 시기로부터 거의 500년이 지난 지증 마립간[서기 500년 즉위] 재위 시기에 시조의 탄생지인 내을에 신궁을 지었음을 함께 기록한 것을 보면 기록자도 아로가 제사를 주관하는 혁거세 거서간의 사당을 제대로 된 왕의 사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기록자는 이에 더하여 건국 후 750여 년이 지난 후인 혜공왕[서기 758년 즉위]과 선덕왕[서기 780년 즉위] 재위 시기에 종묘와 사직이 만들어졌음을 기록하여 혁거세 거서간의 사당 그리고 지증 마립간 재위 시기에 세워진 신궁과 비교되도록 하였다. 기록자가 지증 마립간의 집권기를 가볍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증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에서 시작하는 경주 김씨 혈통의 계승자이고, 신라라는 국호를 제정한 군주이고, 왕이라는 경칭의 사용을 굳힌 군주이고, 법흥왕의 아버지이다. 중요한 왕인 것이다. 그런데 기록자는 아무래도 유교문화의 눈을 가지고 신라 왕실의 조상숭배방식을 이해하고 서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귀족 출신 과거시험 합격자라면 그런 관점을 어느 정도는 가졌을 듯하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기록자에게 종묘와 사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기록할만한 일이다. 혜공왕의 재위 시기에 신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른바 96각간의 난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혜공왕은 열 살이 채 되지 않아 왕위에 올랐으며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살해당했다. 이런 사실을 더 중시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혜공왕 대에 종묘가 세워진 것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유교문화를 기본적 교양으로 하는 사람의 눈에는 종묘를 만든 일이 중요할 수 있다. 또한 혜공왕의 재위 시기가 극도의 혼란기였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혜공왕을 평가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신라 최초로 진골 출신 왕이 되었던 김춘추의 혈통을 이은 왕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리기는 하였지만, 혜공왕이 종묘를 만든 것은 정치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처절한 노력 가운데 하나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혜공왕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여 96각간의 난에서 볼 수 있는 지배계층 내부의 동요와 갈등을 억누를 만한 왕권이 세워질 수 있었다면, 혼란의 최대 희생자인 신라 기층 민중들은 더욱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보다 안정된 삶이라는 것의 속사정은 기층 민중들이 지배집단들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자원과 기회의 분배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런 일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그때의 안정이란 96각간의 발호 속에서 여러 힘으로부터 약탈과 착취를 당하는 상태를 모면하는 것 정도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결국 유교문화의 눈을 가지고 신라의 국가 전례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던 고려의 역사가들이 혜공왕의 종묘 건립을 중시한 것은, 그것이 신라가 유교문화를 받아들인 결과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신라의 기층 민중이 자원과 기회를 조금이라도 덜 빼앗길 수 있도록 하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겠다.

(2) 국내의 산천에는 제사를 지냈으나 하늘과 땅의 신에게까지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는 신라 왕이 제후 정체성을 고수하여 “천자는 천지신명과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제후는 사직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라는 예법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1 신라의 군주가 국내의 산천에는 제사를 지냈으나 천지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음을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약간 결이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하나는 기록자가 사대(事大) 논리에 충실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1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서, 신라의 군주가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3) 선농(先農)・풍백(風佰)・우사(雨師)・영성(靈星)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3산(三山) 5악(五岳) 이하의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하여 행하였다. 대사・중사・소사에 각각 속한 제사는 다음과 같다.

대사 : 3산에 올리는 제사.
중사 : 5악・사진(四鎭)・사해(四海)・사독(四瀆)에 올리는 제사 등.
소사 : 상악(霜岳) 등 전국 각지의 산에 올리는 제사. 사성문제(四城門祭)・부정제(部庭祭)・사천상제(四川上祭)・일월제(日月祭)・오성제(五星祭)・기우제(祈雨祭)・사대도제(四大道祭)・압구제(壓丘祭)・벽기제(氣祭).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였을 때 지내는 제사.

고대의 전통적인 국가 전례들 속에는, 유교문화가 가졌던 인본주의적인 성격만을 가지고 해소하기 어려운 사회 정치 종교적 문제상황에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진 출처 : Elvir K
고대의 전통적인 국가 전례들 속에는, 유교문화가 가졌던 인본주의적인 성격만을 가지고 해소하기 어려운 사회 정치 종교적 문제상황에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진 출처 : Elvir K

(3)-1 유교적 세계관에 정확히 부합되지는 않으나 민간에서 전승되어오는 제사들을 모아서 대사・중사・소사 따위의 방식으로 편제(編制)하여 국가의 체제 안에서 관리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당대(唐代)에는 더욱 정형화되었다. 기록자가 신라도 이러한 예제를 그대로 따랐음을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행하여진 다양한 의례들을 중국에서의 의례 정리 방식을 빌어 정리하여 기록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와는 별도로, 기록자는 선농・풍백・우사・영성 등의 물적 대상을 섬기는 제사가 신라에서 전승되고 있음을 기록하였다. 대사・중사・소사 따위의 방식으로 편제한다면 선농・풍백・우사・영성 등은 소사로 분류될 것이다. 그런데도 기록자는 선농・풍백・우사・영성 등을 그렇게 분류하지 않고 따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 방식이 어떤 기준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든, 지금 여기의 우리는 선농・풍백・우사・영성 등이 신라 국가 전례 속에서 나름의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의 국가 전례]

(4) 『후한서』・『북사』・『양서(梁書)』・『당서(唐書)』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음사(淫祠) 즉 미신에 가까운 제사가 많았으며, 귀신・사직・영성(靈星)・태양・기자(箕子)・가한(可汗) 등이 그러한 제사의 대상이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항상 3월 3일에 낙랑(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대회를 열면서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4)-1 기록자는 중국 사서의 관점을 받아들여 고구려에 미신에 가까운 제사가 많다고 평가하였지만, 그런 제사들을 무시하여 버리지 않았고, ‘항상’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그런 제사들이 고구려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는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지금 여기의 우리는 고구려 국가 전례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더 입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5)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10월에는 하늘에 동맹(東盟)이라고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의 동쪽에 있는 굴에 수신(神)이라는 신을 모시면서 10월에 이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냈다. 『북사(北史)』에 의하면 여신인 부여신(夫餘神)과 그의 아들인 고등신(高登神)을 모셨는데 그들은 하백의 딸과 주몽을 말한다. ‘고기’에 의하면, 동명왕 14년(기원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동부여(東扶餘)에서 죽자 그 나라의 왕 금와(金蛙)가 태후의 예절을 갖추어 장사 지내고는 신묘(神廟)를 세운 때부터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이어졌고, 신대왕(新大王) 4년(서기 168)부터 왕이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이어지다가, 고국양왕(故國壤王) 9년(서기 392) 봄 3월에 국사(國社)가 생겼다.

(5)-1 동맹은 새봄을 맞이하는 제사라고 한다. (5)에 따르면, 중국과는 다르게, 고구려에서는 이런 제사를 국가 전례로 반복 지속한 것이다. 이 기록은 또한, 고구려에서 상당 기간 동안여신인 부여신(夫餘神)과 그의 아들인 고등신(高登神)이 동등하게 존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여준다. 기록자는 고국양왕(故國壤王) 9년(서기 392) 봄 3월에 국사(國社)가 생겼음을 기록하면서도 이때 여신인 부여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서술하지 못하였다. 이는 국사의 설립 이후에도 부여신 존중이 이어졌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백제의 국가 전례]

(6) 시조・천지신명[天地]・5제의 신[五帝之神]에게, 대체로 겨울과 봄 사이에,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필요가 발생하면 정하여진 것 외의 제사를 더 하였다.

(6)-1 이 기록은 백제 국가전례의 전모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하여 새봄을 맞이하는 시기에 전례가 행하여졌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태양・밝음 따뜻함을 귀하게 여기는 풍습이 백제에서 이어진 듯하다.

기회와 자원의 사용・분배・소진과 삼국의 매너・세레머니・리추얼

매너(manner)・세레머니(ceremony)・리추얼(ritual)은 항상 분배의 장치였다. 모자를 벗는 매너가 상대방에게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적대감이 없음을 보여주는 인사법이라면 그것은 생존의 기회를 상대방에게서 구하는 것으로써 상호 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를 보존하고 허락해주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세레머니를 대충 한 후 그냥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잔치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배의 장의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미지의 물적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알 수 없는 그 세계 속에 도사리고 있을런지도 모르는 힘을 달래기 위하여, 그 존재를 의인화・신격화하고 희생물과 음식을 마련하여 공경의 뜻을 세계에 알리는 리추얼에는 제수를 나누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작지만 나눔 즉 분배가 행하여진 것이다. 여러 가지 제사의 방식을 왕권과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는 장치로 만들어서, 왕위 계승 후보자들 사이의 골육상쟁이나 귀족들의 발호를 정리함으로써, 기층 민중들에게 가하여졌던 약탈과 착취가 완화되게 하는 것도, 지금 여기에서의 시선으로 보면 부수현상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당대적 맥락에 놓고 보면 핵심적인 분배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술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의 분배와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기록된 삼국 국가 전례들 사이에는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남해 차차웅이 혁거세 거서간의 사당을 지은 일, 지증 마립간이 신궁을 지은 일, 혜공왕과 선덕왕이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제후 5묘에 기반한 종묘와 사직을 만든 일 등은 모두 신라의 기층 민중이 자원과 기회를 조금이라도 덜 빼앗길 수 있도록 하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자들도 이런 면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군주가 국내의 산천에는 제사를 지냈으나 하늘과 땅의 신에게까지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기록도,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라의 국가 전례에 선농(先農)・풍백(風佰)・우사(雨師)・영성(靈星) 등이 대사・중사・소사 따위의 편제와는 별도로 기록된 것, 고구려의 국가 전례에 귀신・사직・영성(靈星)・태양・기자(箕子)・가한(可汗) 등이 제사의 대상으로 기록된 것, 백제의 국가 전례에 시조・천지신명[天地]・5제의 신[五帝之神]에게 겨울과 봄 사이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 등을 보면, 유교적 외피를 입은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를 받아들여 화평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삼국이 전통적인 국가 전례들을 폐기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삼국의 전통적인 국가 전례들 속에는, 유교문화가 가졌던 인본주의적인 성격만을 가지고 해소하기 어려운 사회 정치 종교적 문제상황에 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은 기회와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인간에 국한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주체들을 분배에 연관된 존재로 고려하고자 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추세와 부합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것 같다. 고구려에서 동맹이 국가 전례로 계속 행하여진 것 그리고 백제에서 겨울과 봄 사이에 지내는 제사가 행하여진 것에도 점점 더 많은 주체들을 분배에 연관된 존재로 고려하고자 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추세와 부합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상당 기간 동안 여신인 고등신에 관한 존중이 지속된 것에 관해서도, 앞서 말한 추세와 관련하여 주목하여야 할 듯하다.

결국 지금 여기에서 삼국의 국가 전례를 읽는 일은 기회와 자원의 정의로운 사용・분배・소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참고할만한 과거의 분배 사례들을 만나보는 일이 될 수 있는 듯하다.

* 이 글에 쓰기 위하여 읽은 『삼국사기』의 판본 :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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