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③ 정동, 돌봄, 욕망의 미시정치

저성장 시대는 자연과 생명의 외부성이 한계에 봉착하여 수축되는 국면이다. 활력을 잃고 에너지 자체 고갈은 필연적인 상황. 협동조합이 이 한계 상황 하에서 주목해야할 근본적 해법인 무엇일까? 그것은 욕망의 혁명이자 영구혁명이다. 해방의 목표는 정동의 해방이며 협동조합을 통한 실존의 재건이다. 조직 내 직분의 관계만 남은 오늘날의 인간관계는 저성장 시대에 지속될 수 없다. 협동조합은 마을 공동체마다 반드시 있었던 입담꾼들의 이야기판을 조합운영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미시적이고 내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야 하며, 이 이야기가 물품의 이미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소비로 수렴되지 않는 정동의 해방이 저성장 시대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 정동, 돌봄, 욕망의 미시정치

1. 자원 다음의 활력이 아닌, 활력 다음의 자원으로

자원이 있어야 활력이 돌았던 것이 기존 사업체의 구도였다면, 이제 활력이 먼저 돌고 그 다음에 자원이 가는 형태로 역전되고 있다. 이는 활력 자체가 없다면 자원에 대한 접근조차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원이 제한되기 때문에 기능이 아닌 정동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활력의 선재성이 등장하고 나서 어떻게 활력과 에너지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관건이 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서는 일의 반복이 활력을 주지만, 어떤 경우의 일과 일 사이의 횡단이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차이나는 반복이 발생시키는 다성음악적인 화음이 활력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활력이 있고 그 다음 자원이 따르는 것은 저성장시대의 특징이고, 그 어느 때보다 활동가들이 바빠지는 때인 것은 분명하다. 일단 자원의 규모에 따라 활력을 얼마나 설정할지에 대한 기획과정이 수반되었던 것이 기존 사업 유형이었다. 그러나 이제 활력과 정동이 협동조합에 전제되어야 자원에 대한 접근과 취득이 가능하도록 판이 짜여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활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기존에는 자원이 일단 주어졌기 때문에 사랑, 욕망, 정동은 자동적이고 기능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활력의 생산, 정동의 생산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 상황이다. 정동은 자기원인이 있는 정서며, 그 자기원인이 다시 정동이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귀적(再歸的) 특징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된다”라는 정동노동과 사랑의 구도도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긴다. 그런 점에서 활력과 생명에너지의 원천은 의미와 가치가 아니라, 정동과 사랑, 욕망의 재귀적인 반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재귀적 반복의 경우에는 함입(introjection), 재진입, 중복, 순환논증에 따라 전제가 다시 결론이 되는 논리적인 원환을 그린다. 그런 점에서 정동과 사랑의 원인이 다시 정동과 사랑이 되는 것은 무한동력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한동력기관은 없으며, 자원의 유한성이나 신체의 유한성이라는 면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그러한 협동조합이 과연 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이는 예술가집단이나 마을공동체 등에서 살짝 그 비밀이 드러나기는 한다. 그러나 활력이 먼저 활성화되고 자원이 뒤따르는 형태의 사업체 구상은 아직 시작단계에 있다.

저성장시대는, 이전까지 자원이라고 여겨져 왔던 자연과 생명의 외부성이 한계에 봉착하여 축소되고 수축되는 국면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든, 커뮤니티든 그대로 놔두면 활력이 뚝 떨어지고 자신을 구성하던 에너지 자체가 없어져 와해되게 된다. 오히려 활력은 우리 신체 내부의 생명에너지라는 가장 최적의 그리고 가장 최소의 영역이라고 간주되던 부분에서 발생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어떻게 활력의 생성이 가능한지, 그리고 자원축소에 따르는 우울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등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단 자신의 주변에서 작은 단서를 찾고 자신의 욕망, 사랑, 정동이 모이고 관심이 더 가는 곳에서부터 돌발흔적을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러한 돌발흔적에 더욱 정동의 반복이 덧대어져서 강건하게 될 때, 그때서야 그 에너지의 실체가 드러나는 상황 즉 자원이 투입되는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넘치는 곳에서 특이점이 발생한다. (출처: https://pixabay.com/images/id-4411152/)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넘치는 곳에서 특이점이 발생한다.
사진 출처 : pixabay

펠릭스 가타리는 『분열분석적 지도제작 : Cartographies schizoanalytique』 (1989)이라는 책에서, 기호의 반복이 에너지가 된다고 말한다. 더불어 에너지의 반복은 특이점을 거쳐 물질이 된다. 우리는 기호의 반복 국면에서 에너지를 생성시키고, 그 에너지의 반복에서 자원으로서의 물질에 도달하는 심원한 2단계 활력충전 단계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 즉 수많은 기호로서의 이미지, 영상, 정보, 지식, 비기표적 기호계(냄새, 색채, 음향, 몸짓, 맛) 등이 동원되어 강건히 반복될 때 돌연 특이점이 생성되고, 그 속에서 놀랄만한 활력과 생명에너지의 발생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1차 특이점의 국면은 준비하고 기다리고 강건히 반복하고 도모할 때 갑자기 돌연변이처럼 등장한다. 갑자기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자리에서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넘치고 풍부하게 될 때의 국면은 우리가 도모하고 싶었던 특이점 설립의 시초점이다. 그 다음 국면은 바로 생명에너지와 활력의 반복을 통한 실물화단계로서의 2차 특이점의 설립이다.

물론 활동가들이 고심하는 바는 활력이 먼저냐 나중이냐의 여부가 아니라, 활력과 생명에너지의 과잉 소모에 따른 소진의 국면에 대한 염려에 있다. 들뢰즈가 『소진된 인간』(2014, ㈜문학과지성사)에서 신체의 한계에 도달하여 실제화 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피로’의 국면과 가능성 자체의 소멸에 따르는 ‘소진’의 국면을 비교했던 것은 탁월하다. 하지만 소진 자체가 응시하는 가능성의 소멸을 극복할 방법이 사실상 정동과 활력의 반복에 따르는 특이점 설립 자체였음에 대해서는 바라보고 있지 못하다. 사실상 주어진 기회나 계기 등의 가능성은 가끔 발견되지만,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을 애초부터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가능성 자체를 창안하고 발명하는 것이 기반되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딱 막혔을 때, 소진은 그것을 만들 수 없는 한계, 폐색, 자괴감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공회전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생명과 자연, 사물, 미생물 등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동과 사랑, 욕망의 반복은 결국 소진을 넘어선 특이점 설립으로 향할 수 있는 원천이다. 멀리 저기 저편에서 색다른 가능성이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 곁, 가장자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로 활력과 생명에너지의 생성의 원천일 수밖에 없다. 지금-여기-가까이로부터 출발하는 가장 국지적인 영역이 바로 활력이 발생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존적인 장소성과 실질적인 관계성의 복원이야말로 활력의 재건과 구성에 있어서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활력은 우리 주변에서 뭉게구름과도 같이 서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사물에게서, 생명에게서, 자연에게서 발견하고 창안함으로써 우리는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창안해낼 수 있는 셈이다. 저성장시대의 색다른 패러다임에 우리는 아직 익숙지 않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아주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2. 물품의 이야기구조 : 상품도 선물도 아닌

마르쉘 모스의 『증여론』(2011, 한길사)은 사물의 잠재성과 깊이, 즉 자연 사물에 대한 색다른 생각을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사물을 ‘그것은 책상이다’, ‘그것은 의자다’라고 의미화하는 것이 그 사물 자체가 아님을 응시하면서 사물의 주변, 곁, 가장자리의 다의미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것을 선물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탐색했다. 서구의 합리론에서 보는 사물은 구획화되고 정확히 소유권 여부가 식별될 수 있는 분리된 개물(Thing)이었다면, 모스는 사물의 곁과 가장자리에 하우(Hau)라는 정동, 사랑, 욕망, 영성 등이 서식하고 있다고 본다. 생활협동조합에서의 물품은 대답으로서의 사물, 분리와 구획화로서의 사물이 아닌 문제설정으로서의 사물, 잠재성으로서의 사물이다. 그것의 곁에서 서성이고 들었다놨다 하고 선물하는 등의 행위는 물품이 갖고 있는 기능, 품질, 의미의 영향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 관계가 만들어낸 살림과 돌봄, 정동의 요소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물품은 상품과 선물 중간에 위치하는 색다른 의미좌표를 드러낸다.

저성장시대를 맞이하여 자원-부-에너지의 축소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물품이 상품의 기능이나 역할은 축소되고 선물로서의 작동이 더욱 커진다면 어떨까? 즉, 물품에 서식하는 사랑, 정동, 욕망, 돌봄, 살림의 시각이 더욱 확장되고, 물품을 만지면 색다른 아이디어가 생기고, 농사를 하고자 하는 용기가 생기고, 갑자기 공동체의 활력이 느껴지는 순간이 가능할 것인가 말이다. 협동조합의 물품은 그저 일회용품과 같이 순간의 향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망자(亡者)의 물건을 되살림 한 물품처럼 깊이와 잠재성이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이 깃든 물건이어야 할 것이다. 일단 물품을 사느냐 파느냐는 부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대신 물품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이야기구조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확산시키느냐의 문제이다.

이러한 이야기구조는 물품이 갖고 있는 특징을 사물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확대함으로써 힌트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2012, 아카넷)라는 책은 사물 자체가 갖고 있는 함수론과 집합론적인 질서뿐만 아니라, 확률론과 재귀론적인 속성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물은 동질적이고 균질적인 ‘산술적 수’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색다른 돌발흔적이나 우발성, 낙차효과 등이 개입할 수 있는 ‘경우의 수’로서의 의미까지 담겨져 있게 된다. 여기서 스케치와 단상으로 집합론과 함수론의 산술적 수는 상품으로, 확률론과 재귀론의 경우의 수는 선물로 도식화할 수는 있다. 사물 자체를 세계, 환경, 지구,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채굴하고 추출하는 상품화의 단계를 거치는 것과 이와 지구환경과 연결되어 전체론적인(holistic) 자연 만물이 주는 선물로 보는 단계 사이의 차이가 나타난다. 저성장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만물의 한계, 끝, 유한성이 드러나면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물의 깊이와 잠재성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바로 상품물신주의는 바로 함수론적인 질서에 대해서 환상과 이미지를 부여한 결과라면, 증여와 호혜의 경제는 확률론과 재귀론의 사랑, 정동, 욕망의 반복에 기반하고 있다.

생협이나 협동조합에서는 훨씬 풍부한 이야기구조를 갖고 있는 물품을 다룬다. 자본주의문명이 흔히 그러하듯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상품임에도 환상과 광고-이미지를 부여하여 관계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생협이 관계를 통해서 선물과도 같은 물품을 확산시키는 형태여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선물에 담긴 이야기는 사용자들에게 쉽게 접근하기 힘들 수도 있다. 정동과 사랑,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는 가시화되어 표상이나 이미지 등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성장시대에 대한 대응으로 물품을 상품처럼 더 가시화하는 방법을 구상할 수도 있겠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커뮤니티의 관계성을 실질화함으로써 선물로서의 의미를 더욱 가속화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품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구조가 발명되어야 하며, 또한 그것은 표상과 이미지로 가시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관계를 통해서 유통되어야 한다. 즉, 순환, 되살림, 재생을 통해 유기농산물이나 유기축산물, 친환경제품 등이 죽은 자와 산자, 생명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절기살이와 식생의 변화, 발효, 약초, 벌레, 식생 등의 생태적 지혜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구조가 격발하는 한가운데 물품이 위치해야 한다. 더 나아가 물품이 바로 문명의 전환과 관련된 대안적인 생활양식(Lifestyle)을 전파하기 위한 매개라는 점을 직시하면서 더욱 물품의 깊이와 잠재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야기구조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물품에 대한 마음과 감각, 감수성은 선험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지 않으며, 단지 관점의 이동의 수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의 배치, 문명에 대한 태도변화, 모종의 복잡성을 띤 관계망에서의 위치 등에 따라 물품에 대한 생각과 감각은 발명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상품사회에서는 외양과 포장을 통해서 감각적으로 주어진 물건으로서의 위치로 끊임없이 환원하고 이에 이미지-영상을 덧씌워서 판매와 구매를 성립시키려 든다. 그러나 우리는 베이트슨이 『마음의 생태학』에서 언급했던 “사물, 생명, 인간의 모종의 복잡성이 마음을 수반한다”라는 구절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복잡성은 동적 편성, 행렬, 배치, 위상, 자리 등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경우의 수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협동운동은 사물, 우주, 자연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색다르게 재창조해내고 재발견해냄으로써 저성장시대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선물과도 같은 물품에 깃든 깊이와 잠재성을 다시 회복시키고 다양한 이야기구조를 만들어내는 과정일 수 있다.

3. 초극미세전략 : 미시적인 삶의 재창안, 재발견

협동조합에서 거대담론이 위력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거대담론은 공통의 목표와 이념으로 사람들을 집결시키지만, 자신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거대담론이 갖고 있는 대의명분의 가치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조합원들도 크게 실감나지 않지만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점차 거대담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생활과 살림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특히 저성장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이라면, 살림살이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고민 등이 쌓이지만, 이를 털어놓고 얘기할 곳은 협동조합과 같이 관계망이 작동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미세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마당으로서 생협이 위치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욕망, 사랑, 정동의 미시정치를 통해서 삶을 재발견하고 재창안할 수 있는 곳으로 전진배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동과 욕망의 미시정치는 그동안 사생활의 영역에 가두어진 모든 영역을 개방하고 하나의 마당 위에서 논의하고 협의하고 계획할 수 있는 곳으로 협동조합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포스트모던 담론의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 즉 거대서사의 종말과 소서사의 등장의 이야기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미시정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게임, 성, 살림 등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횡단하며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살림살이에서 어떻게 적절히 배치하고 재배치할 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그저 와해되고 해체된 상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재구성과 재창안을 통해서 기존 배치와 다른 어떤 새로운 배치를 만들 것인가를 숙의하는 자리가 바로 미시정치의 판이다. 이를 통해서 기존의 낡은 배치들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저성장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지혜와 방법론을 체득할 수 있다. 그러나 미리 주어진 공식이나 개념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러한 배치의 재배치가 만든 효과와 주체성 생산이라는 색다른 현상에 대해서 귀 기울이고 주목하며 발견하고자 함이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 터부시 되었던 이야기, 말 못할 고민 등도 협동조합의 판과 배치에서는 새로운 토론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변항의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방향에서 행동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내재성의 배치를 어떻게 재배치함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와 아이디어를 나누는 자리일 것이다.

우리는 더 미세해져야 하지만, 그것은 와해되거나 해체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판과 배치로 구성되고 창안되고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미시적인 현미경은 거시적인 망원경보다 강력하고, 삶이 정동, 돌봄, 살림으로 재건될 수 있다는 낙관과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론일 것이다. 저성장시대는 수많은 미시정치가를 필요로 한다. 자원이 제한되면 그것은 나누고 증여하고 오고가는 데 더 섬세한 손길과 살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협동조합은 수많은 살림살이를 하는 미시정치가들의 배치와 관계망에 의해서 부드럽고 따뜻하고 섬세하게 관리되고 통제됨으로써 자율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물론 과거 대안세력들은 자율성을 독립성이나 자주관리로 보면서 미시정치보다는 거대담론에 더 힘을 실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자율성은 독립성처럼 순수지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협상하고 교섭하고 대담하고 협의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또한 자율성을 자주관리로 보는 것은 대의명분을 가진 중앙의 책임을 강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측면으로 향한다. 오히려 미시정치는 수많은 마디와 지절과 매듭에서 미시정치가로서의협동조합의 살림꾼들의 자율적인 활동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배치의 재배치의 과정은 마치 네트워크와 유사하게 수평적이고 민주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네트워크의 자동성이 아닌 살림과 돌봄의 손길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저성장시대의 정동과 욕망의 미시정치는 금기와 억압, 금욕, 빈곤의 메시지를 발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정동과 욕망, 돌봄의 활성화가 해낼 수 있는 일이 많고 자원이 아닌 관계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이 많은지를 보여주는 강건한 미시정치의 판이다. 주변과 이웃을 돌아보며 서로의 살림살이를 걱정해주고 선물을 유통하고 작은 자원을 나누고 관계를 유지하려는 미시정치가들이 협동조합을 이끄는 주역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협동조합은 증여와 호혜의 배치를 끊임없이 재배치함으로써, 마치 아낌없이 주는 생명과 자연이나 말없이 돕는 이름 없는 벗이나 이웃과 같은 정동, 돌봄, 사랑의 미시정치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나눌수록 더 많아진다는 역설적인 힘을 그저 신비주의에 던져놓지 말고 미시정치의 판과 배치 위로 가져와야 할 것이다. 저성장은 아마도 공동체와 협동조합에게는 색다른 미시정치의 계기가 될 것이며, 그 이전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신시키는 계기일 것이다.

4. 실존의 재건 : 협동조합은 이야기꾼의 한 마당이 되어야 한다!

실존적 관계는 이야기꾼들의 한 마당을 열고 수많은 스토리들을 창안하는 순간에 성립가능하다. (출처: https://pixabay.com/images/id-3228650/)
실존적 관계는 이야기꾼들의 한 마당을 열고 수많은 스토리들을 창안하는 순간에 성립가능하다.
사진 출처: pixabay

자신의 삶 속에서 실존에 다가가는 이야기들이 앞으로 협동조합에서 더 필요하다. 실존적 관계는 사태의 본질이나 핵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곁, 가장자리를 서성거린다. 마치 출구가 분명해 보이는데도,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방황하는 것이 실존적 양상이다. 장 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실존은 분명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고 간명하게 이 사태를 정리한다. 자신의 기능, 역할, 직분, 정체성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이 실존적인 관계에서는 자연스럽게 논의에 부쳐지고 혹은 슬쩍 지나치듯 얘기되고 때로는 조용히 속삭인다.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것은 본질을 적시하는 의미에 따라 정체성, 직분, 역할이 딱 정해져 있는 것들이 아니다. 말 못할 고민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내재적인 지평에서 새들이 지저귀듯 얘기되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긍정, 삶의 내재성은 본질을 적시하는 의미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잉여, 잔여이미지, 군더더기 등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 순간은 실존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순간이지만, 그것이 단지 엄숙한 형태라기보다는 아주 스치듯, 살짝, 때로는 잠시 등장한다.

저성장시대는 본질을 적시하는 의미에 따라 분배된 정체성, 직분, 역할이 기능 정지되고 있음을 무수한 사람들이 느끼는 순간들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개인주의를 넘어서 어찌 보면 촌스럽고 간섭이 많을 것만 같은 관계 자체에 대한 회의(懷疑)로 향하기도 한다. 이런 순간에도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판과 배치가 바로 협동조합이 되어야 한다. 사회문제, 살림문제, 고민, 전환사회의 전망, 오늘의 먹거리, 취미 등 관계 자체를 실질화하는 모든 소재가 협동조합의 실존적인 관계의 수립의 기초가 된다. 동시에 이웃과 친구, 가족의 소식,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간, 돌발흔적과 같은 사건의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던 순간, 갑자기 문제 상황에 사로잡혀 버린 순간 등이 이야기될 수 있는 판과 구도가 바로 협동조합이 되어야 한다.

마을과 공동체에서는 곳곳에 입담꾼들이 있고, 이야기마당이 상시적으로 열린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낀다. 그러나 실존적 관계는 이야기꾼들의 한 마당을 열고 수많은 스토리들을 창안하는 순간에 성립가능하다. 실존의 영역은 어쩌면 굉장히 촌스럽게도 우리 삶에 들어붙어 있는 잉여와 군더더기로 간주되었던 삶과 실존을 이야깃거리로 부친다. 그 이야기의 소재를 다양하지만, 우리가 손을 맞잡고 연대하고 협동하자는 취지는 그 기저에 깔려 있다. 그래서 실존적 관계의 판인 것이 협동조합이다.

본질을 적시하는 의미와 이에 따른 기능과 정체성에 충실한 관계는 사실상 사람들 사이에 구름처럼 희뿌옇게 끼어 있으며,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실존의 양상에 대해서 주목할 수 없는 관계이다. 사실 살림, 돌봄, 모심, 보살핌 등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의 이야기이자 실존의 이야기들이지만, 늘 주변에 있는 것은 본질적인 이야기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성장시대에는 이러한 실존적인 이야기들이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수많은 스토리공장과도 같이 서로를 구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실 아이가 첫발걸음을 뗐다는 이야기나, 노환이신 아버지가 호전되었다거나, 자신이 갈등하던 사랑과 욕망의 문제에서 탈주로가 보였다거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심정과 같은 소중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의 이야기이며, 실존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본질로서의 직분이나 역할에 충실할 경우 이러한 이야기들은 늘 뒷전에 밀리게 되고, 누구에게 털어놓고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사람조차도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저성장시대의 온갖 우여곡절이 공유되고 회자될 수 있는 판을 협동조합이 깔아놓음으로써, 보다 정말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마을정자와 같은 곳이 바로 협동조합임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저성장시대는 그대로 놔두면 위축되고 고립되고 할 얘기가 사라지고 찌들게 되는 자동적이고 기능적인 경로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나누면 더 많아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더 풍성해지는 것이 삶의 이야기이며, 한계와 끝을 가진 실존의 위대한 이야기들이다. 기존 공동체에서는 나이든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전승하거나 나누어주었지만, 이제는 그런 역할을 공동체라는 판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오래된 생태적 지혜는 공동체의 미래적 지혜로 전진배치되어야 한다. 협동조합이 그러한 공동체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협동조합은 삶을 살아가는 지혜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의 소식과 일상을 경험하는 마당이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저성장시대에 위축되지 않고, 보다 강건한 살림과 돌봄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실존적 관계의 보물창고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A, B, C, D 등의 수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차례로 들어볼 수 있는 곳도 협동조합이어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자신이 참고할 만한 견해를 던지는 배치와 관계망 속에 실존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는 실존적 관계의 판을 까는 것으로부터 협동운동이 출발해야 함은 분명하다.

5. 정동과 욕망, 사랑의 해방 : 소비로 귀결되지 않는 돌봄과 살림의 흐름으로

소비로 수렴되지 않고 모든 시스템과 체계가 재편되는 강렬한 흐름을 갖는 것에 있다. by Ted Eytan 출처: Ms. Magazine(https://images.app.goo.gl/3uyRVgo9rU9qrxUY6)
소비로 수렴되지 않고 모든 시스템과 체계가 재편되는 강렬한 흐름을 갖는 것에 있다.
사진 출처 : Ms. Magazine

협동조합이 저성장시대를 위기라고 감지하는 주된 이유로 결사체의 구성력의 약화와 사업체의 위축이라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생협 매장이나 협동조합 현장에서 소비의 위축이 가시화되면서, 그 해결책을 부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결사체로부터 우선 해결책을 찾지 않고서는 사업체 역시도 해결의 단서를 잡을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결사체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설립하여 하나의 의미와 모델로 집중하고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와 모델을 횡단하고 넘나들 수 있는 내부 생태계를 설립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의미모델로서의 결사체가 아닌 정동과 돌봄, 사랑 등에 기반하여 여러 모델을 설립한 결사체의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그런 점에서 결사체는 정동의 연합체의 성격을 띨 것이다. 협동조합의 활력과 생명에너지는 바로 정동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정동을 질문할 때, “꼼짝 안할 때 생각이 많은가?, 움직일 때 생각이 많은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정동은 아끼고 닦고 보살피고 돌볼 때의 생각 즉 움직일 때의 생각이다. 그래서 돌봄,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을 정동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정동은 표상과 표상, 의미와 의미, 정서와 정서, 문제설정과 문제설정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변화양식이다. 이를 테면 염소가 음메에 울고 있고 망태기가 마당에 놓여 있다면, 소농의 경우에는 그것을 문제설정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쉽사리 대답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설정과 횡단적 결합을 추구한다. 이를 테면 망태기의 문제설정을 부엌이라는 문제설정과 결합하고, 염소라는 문제설정을 풀밭이라는 문제설정과 결합한다. 동시에 포크라는 표상과 컵이라는 표상이 있다면, 그것을 컵 주변에 포크를 놓고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이 정동이다. 즉, 아끼고 보살피고 돌보는 등의 살림, 돌봄, 양육 등이 정동의 양상인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책을 읽고 있을 때 옆에서 삐이익 하면서 주전자가 끓고 있다면, 이 두 정서적인 행동양식을 연결하는 것도 정동이다. 즉,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정서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정동인 셈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자체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여러 모델을 넘나드는 분자적인(molecular) 정동, 욕망, 사랑 등을 활성화시키면서도 이를 몰적인(molar) 소비라는 하나의 모델로 수렴시키고 집중시키려는 다소 모순적인 체계를 특징으로 한다. 즉, 욕망과 정동의 문제설정을 최대한 고무하고 촉발시키면서도 결국 소비나 이익, 이해로 환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존 문명의 특징을 ‘대답으로서의 자본주의’라고도 규정한다. 그렇다면 욕망과 정동이 던지는 문제제기로서의 전환사회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현존문명은 욕망이 던지는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는 문제설정에 대해서 인과론적인 의미화방식에 따라 “아, 넌 지금 냉장고가 필요한 게야!”, “그렇지! 구두를 사야해”라고 대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선형적인 논리방식으로 향하게 한다. 욕망과 정동, 돌봄의 문제설정의 초과분을 설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비루한 일상이나 똑딱거리는 노동과 작업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대량생산/대량소비를 기반으로 한 포디즘 사회에서 일상화되어 삶에 정착되었던 대표적인 라이프스타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가 정신분열증과 상동성을 갖는다고 했던 쥘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동작업도 그 의미가 새롭다. 자본주의가 욕망을 생산하여 분자적인 방향성, 즉 횡단하고 이행하게 만드는 흐름을 발생시키면서도, 소비로 집중하고 수렴하도록 유도함으로 몰적인 방향성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증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구속(double bind)의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여기서 분자적인 것은 여러 모델을 횡단하고 이행하는 것이라면, 몰적인 것은 하나의 모델에 집중하고 수렴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산과 들에서 스스로 놀이감을 찾아서 만들어가면서 놀던 아이들의 분자적인 흐름을 놀이터라고 하는 ‘몰’속에 가둬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분자적인 것을 놀이와 재미의 모델이라고 한다면, 몰적인 것을 의미와 일모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노인들의 행복이 담배 한 개피에 있거나, 아이들의 기쁨이 과자 한 봉지에 있다는 자본주의의 소비의 논리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소비로 귀결되지 않는 정동, 욕망, 사랑의 해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이 68년 혁명이다.

욕망해방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게걸스러운 욕망, 탐욕스러운 욕망이 금기와 터부의 족쇄를 풀어놓음으로써, 잡음, 소음, 들끓음, 무질서, 일종의 난장판으로 향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굴절되고 변형된 욕망은 사실은 금기와 터부, 억압이 만든 2차적인 욕망이며, 욕망은 신체와 기호, 이미지, 사물들로부터 연유한 생명의 부드러운 흐름이다. 그래서 욕망은 스스로 조절되면서 배치를 재배치하는 미시정치가를 양성한다. 또한 욕망의 해방의 국면은 동시에 정동의 해방의 국면이다. 즉, 소비, 이익, 이해로 수렴되지 않고 정동과 돌봄, 살림, 사랑, 욕망이 세상을 구성하고 창안하는 논리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경제(economy)에 대한 살림(oikos)의 완벽한 승리가 바로 정동의 해방이다. 저성장시대의 국면에서 협동조합의 활력과 생명에너지는 정동의 해방의 차원에서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정동과 돌봄의 활력이 우리의 뒷덜미를 감싸고 세상을 구성하고 삶을 재창안하는 논리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사업체의 수준에서의 위축을 해결하는 것은 결사체에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고 매끄럽게 횡단하는 것에 달려 있고, 그러한 분자적인 것의 역할은 정동과 살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협동조합은 정동과 살림을 통해 재창안으로 나아가는 기로에 서 있다. 여기서 정동은 전근대적이고 고대적인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래적이며, 미래구성적인 것이 바로 정동이며, 돌봄이며, 살림이다.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의 전략적 지도제작은 정동과 욕망, 사랑의 해방을 통해서, 소비로 수렴되지 않고 모든 시스템과 체계가 재편되는 강렬한 흐름을 갖는 것에 있다. 결국 사업체의 소비의 위축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분자적인 정동과 욕망을 몰적인 소비로 수렴하는 방향으로 향한다면, 전면적이고 거대한 전환은 뒤로 미뤄지는 셈이다. 사랑, 욕망, 정동, 돌봄, 살림 등이 전면에 나서서 그 강렬한 흐름에 따라 상상도 못할 수준의 활력과 생명에너지로 가득 찬 결사체의 재편에 그 해결의 열쇠가 있다. 결국 협동조합에서의 68혁명, 즉 정동의 해방을 통한 영구혁명(=영구개량)의 국면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림과 돌봄이 소비의 격자로부터 그 흐름과 에너지를 해방시켰을 때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국면은 이미 시작된 상황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전진배치하여 영구혁명으로서의 68혁명의 도도한 강을 협동조합 내에서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이 글은 〈2019 한살림 생명협동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