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② 외부소멸테제와 특이점 설립

무한정한 약탈을 허용했던 외부는 소멸했다. 이로써 성장주의 시대는 종언을 맞이한다. 성장주의 시대의 종언에 따라 펼쳐지는 새로운 생태계 속에서 협동조합은 어떤 전략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출구를 찾기보다 출구를 발명해내야 하며, 확장된 내부 경제 주체들에 의한 사랑과 정동의 경제활동, 게토에서 보여줬던 실험적 모습에 주목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출구란 전문가들이 다시 아마추어가 되어 다채롭게 만들어 내는 특이점이 점화하는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닐까?

Ⅱ. 외부소멸테제와 특이점 설립

1. 외부효과의 소멸과 부각되는 내부효과

기존 성장주의 시대에 사업체가 작동하던 방식은 외부의 실존에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는 자본주의의 외부, 바로 자연과 생명, 공동체의 현존이었다. 자본주의적인 기업들의 외부효과(external effect)는 자연과 생명이라는 외부에 자신의 폐기물을 버리고, 자원을 획득하는 등 사업의 피해를 전가시키는 방향으로 수익을 내는 방식이었다. 즉, 그렇게 하여도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장소, 무한한 자정작용이 있다는 가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과 생명의 한계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더 이상 이러한 영역에서 사업의 수익을 뽑아내거나 피해를 전가시킬 여지가 없어졌다는 점에 있다. 이것을 외부의 소멸 혹은 외부효과의 소멸이라고 부른다. 자연과 생명이라는 영역의 현존은 야성적이고 자율적인 외부성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다지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외부에서 갑자기 고객들이 찾아오고, 외부로서의 거대한 자연과 생명에 대한 긍정과 경외의 시각이 저절로 발생되는 등의 형태가 일상적이었다. 즉, 자연에 다가가면 모든 치유와 문제해결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이제 외부는 소멸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부의 자연과 생명도 인류의 거대계획, 거대프로그램, 제도 등의 영역으로 포섭되어 내부로 들어왔고, 이것은 곧 외부의 소멸을 의미한다. 예전에 세계화의 논리가 외부소멸 테제를 말하면서,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 적이 있다. 그러나 저성장시대와 기후위기 시대의 외부소멸 테제는 그 당시의 상황과 사뭇 다르다. 그것은 생명과 자연의 고유성, 편재성(遍在性), 무차별성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인류문명이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외부성은 사실상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서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논의를 전개시켜 왔다. 그렇기 때문에 소재와 자원의 유한성 자체에 대한 시각은 완전한 페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생태적 한계, 생명의 한계, 자연의 유한성에 기반하여 사유하는 방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의 외부로서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와 신비감에 따라 활동했던 기존의 자연주의적인 사유방식으로서는 현재의 외부의 소멸의 국면에 대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자연과 생명이 몸에 털이 자라듯 저절로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동양사상에서 논의되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온생명론 등의 형이상학적인 구도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안정적으로 약탈 가능한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처: pikist (www.pikist.com/free-photo-vwpsg)
더 이상 안정적으로 약탈 가능한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pikist

외부효과의 소멸은 결국 사업체에게 다가온 거대한 지평의 변동을 의미한다. 물론 협동조합에서의 사업체는 직접적으로 자연과 생명의 외부를 약탈하거나 피해를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호하고 보존하려는 활동들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소멸의 국면의 영향은 결국 협동조합이 연결되어 있던 자본주의문명의 변화에 기인한다. 기업들은 이제 내부에 눈을 돌려 가장 직접적인 영역인 공동체와 공유재(commons) 등에 대해서 약탈과 채굴을 하는 국면으로 돌아섰다.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이러한 자본의 공동체에 대한 질적 착취의 국면을 ‘코드의 잉여가치’(surplus de code)라고 규정한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젠트리피케이션, 골목상권에 대기업의 진출, 집단지성과 오픈소스의 약탈, 플랫폼자본주의 등을 특징으로 한다. 외부를 향해 수출이나 약탈을 하기 어렵게 되자, 결국 내부 공동체의 관계망에 대한 약탈과 질적 착취로 눈을 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코드의 잉여가치 역시도 무망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외부가 소멸되고 있는 현재의 이 국면은 결국 자원의 위기를 의미하며, 거대한 파이의 소멸과 축소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이익을 통해서 이를 상쇄해보려는 시도 역시도 지속가능성이 없는 찰나적인 사업의 유형일 수밖에 없다. 결국 생태계 위기로 인해 이자(interest)라는 형태의 장기적인 투자전망이 없어진 자본이 취하는 코드의 잉여가치의 현상은 결국 단기투기성 자본의 형태인 지대(rent) 이익에 기반하여 찰나의 이득밖에 모르는 자본의 양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 자체가 미래세대를 버리는 패로 여기고 있고, 자신의 이익의 증가를 위한 될 대로 되라 식의 사고방식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자본의 시간에는 미래의 시간이 빠져 있는 셈이다.

외부효과의 소멸 이후에 바로 내부효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즉, 공통재로서의 커먼즈나 집단지성, 커머닝, 내포적 발전 등이 그 사례이다. 특히 내포적 발전의 경우에는 내부자들 사이에서의 거래를 통해서 더욱 시너지효과를 이룰 수 있다는 구상이기 때문에 협동조합과 같이 내부관계망의 성숙을 추구하는 방식의 사업체에서는 적용할 여지가 더 풍부하다. 그러나 내부자 거래가 아무리 풍부하고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한정된 자원의 순환에 입각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여실하다는 관점도 제출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은 자원이라 하더라도 관계의 요소가 들어가고 삶의 내재성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외부효과를 상쇄하는 내부효과는 있을 수 없지만, 외부의 소멸 국면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내부효과의 전략은 구상될 수 있다. 혹자는 자원의 위기는 관계의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포적 발전과 같은 공동체경제의 전략은 이미 낡은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원에 기반한 관계가 아닌 실존에 기반한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가 작동하기 때문에, 내부효과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협동조합으로서는 하나의 출구전략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입구는 발견되지만 출구는 발명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제작을 통해서 입구와 출구 사이를 잇는 것이 필요하다. 아카데미는 입구와 출구, 문제제기와 대답, 근거와 정의가 딱 맞아떨어지는 인과론적인 방법론에 따라 “~은 ~이다”라는 의미화의 대답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의 입구는 다양한 출구를 갖고 있거나, 출구가 없거나, 모두가 출구인 상황으로 향한다. 결국 외부효과의 소멸이라는 색다른 입구의 상황이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지도제작을 통해서 색다른 출구의 발명을 위해서 실험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입구와 출구는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효과의 소멸이 위축과 금욕, 수축, 기능저하, 자신감 상실로 향할 것이라는 하나마나한 인과론적인 대답을 취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전혀 다른 출구전략을 통해서 예상치 못한 방향성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도제작을 통해서 색다른 출구전략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다시 내부효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생명과 자연의 영역 역시도 공동체 안에서 내부효과를 일으키는 하나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며, 공동체의 작동원리 중 하나로 비인간이나 사물, 자연, 생명 등의 연결망이 중요해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내부효과의 국면을 의미한다. 과학철학자 비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 : ANT)을 통해서 인간과 비인간 등이 관계를 이룬 연결망을 다룬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아장스망(agencement) 다시 말해 배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사실상 내부효과를 일으키는 연결망 자체의 주체성이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이제까지 서구의 인식론의 전제조건인 인간이 선험적으로(a priori) 미리 주어져 객체로서의 대상을 발견하고 응시하고 정립한다는 설정은 기각되며, 오히려 비인간이라고 치부되었던 자연과 생명 등의 객체지향적인 인식론이 성립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롭게만 치부되던 자연과 생명의 영역이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배치로서의 작동하는 것이 외부소멸 이후의 내부효과의 국면인 것이다.

입구는 발견되지만 출구는 발명될 것이다. 출처: depositphotos (https://ko.depositphotos.com/130196064/stock-photo-business-man-walking-to-challenge.html)
입구는 발견되지만 출구는 발명될 것이다.
사진 출처: depositphotos

그런 점에서 생명과 자연은 이제 외부효과가 아닌 내부효과 속에 배치되면서, 그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문명의 내부로 들어와 있다. 생명권과 자연권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코막 컬리넌(Comac Cullinan)의 『야생의 법 – 지구법 선언』(2016, 로도스출판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제도와 권리주의가 자체가 갖고 있는 구성적인 측면과 규제적인 측면 둘 중에서 구성적인 측면에 더욱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즉, 생명권과 자연의 권리는 소재 자체에서 생산되는 고도로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된 도식작용(schema)이기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설정과 자기위치설정하기, 동적 편성 자체를 재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명 내부로 들어온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제도와 권리는 결국 내부효과의 극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문명은 인류문명의 의미가 아닌 자연과 생명, 기계, 사물 등이 어우러지도록 문명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2. 저성장시대의 경우의 수의 축소와 부각되는 특이점 설립

저성장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축소된다는 점이다. 성장 시대에는 외부에서 내부에서 끊임없이 선택지들이 나타나, 사실상 아무것도 안하고 마냥 기다리더라도 언젠가는 된다는 식이 가능했다. “시간이 약이다”, “기다려라, 기회는 올 것이다”라는 말은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사태는 더 악화되고, 기다려도 기회는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선택할 경우의 수는 주어지지 않고 만들어진다. 그중에서도 외부의 자원을 전제로 한 기획자 유형의 활동은 더더욱 기능정지 상태에 빠진다. 기획대로 되는 일도 없을뿐더러 기획이 아닌 현장의 다양한 요구와 움직임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동과 활동의 과정에서 판을 짜고 도모하고 촉매하는 노력 없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여기서 기획을 의미하는 plan의 두 번째 의미가 ‘판’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저성장시대는 기획자가 아닌 판짜는 사람을 요구한다. 현장에서의 미시적이고 세밀한 결과 무늬에 기반한 판과 구도의 기획이 유효할 뿐이다. 그러한 느낌, 감수성, 정동의 양상에 대해서 더욱 예민하고 섬세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판짜는 자이다.

경우의 수의 축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단지 자원-부-에너지의 파이가 작아지고 있다는 평면적인 분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일들이 늘게 되는 이유는, 그전의 방식대로 다양한 기회가 불쑥불쑥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만나고 활동하고 돌보고 아끼고 되살리는 노력 없이는 그 어떤 일이나 사업도 잘 진행되지 않는다. 더욱이 사업체의 경우에는 양적 축소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동적으로 해결될 여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전에는 이렇게 기획해서 판을 짜면 잘 될 것이라는 믿음과 낙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양적 축소를 넘어 선택지의 축소로 향하면서, 다양한 문제설정을 연결하고 결합할 경우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축소된 경우의 수에서 만족하며 다시 기획하고 판을 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우발성을 어떻게 반복되는 정동과 에너지의 투여를 통해서 특이점으로 만들 것인가? 출처: flickr ( www.flickr.com/photos/lluisribes/9415509129)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우발성을 어떻게 반복되는 정동과 에너지의 투여를 통해서 특이점으로 만들 것인가?
사진 출처: flickr

그런 점에서 더욱 우리에 주목을 끄는 개념이 ‘특이성 생산(the production of singularity)’, 또는 ‘특이점 설립’이라는 개념이다. 특이점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이다. 그러한 경우의 수 하나하나를 설립하는 것은 미리 주어진 사회가 아닌 구성하고 창안할 사회를 생각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성장주의 시대의 양적 성장의 경제에서는 자원-부-에너지의 확대와 확장에 따라 산술적 수가 일단 경우의 수의 밑천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산술적 수의 기반이 풍부하기 때문에 기획자 유형으로 경우의 수를 만들어도 잘 운영되었다. 그러나 저성장시대인 수축사회에서는 산술적 수의 축소와 더불어 경우의 수의 축소 둘 다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며, 산술적 수의 축소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경우의 수로부터 산술적 수로 향하는 방향 즉 함수론이 아닌 확률론의 방향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경우의 수는 어떻게 설립되는가? 바로 사랑, 욕망, 정동, 돌봄의 반복에 의해서 가능하다. 자신이 한번 정동의 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감정 상황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선택의 경우의 수의 일부가 된다. 결국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우발성을 어떻게 반복되는 정동과 에너지의 투여를 통해서 특이점으로 만들 것인가가 관건일 수밖에 없다. 즉, 우발적으로 찾아오는 고객을 어떻게 환대함으로써 내부자를 만들어 우애의 내부효과의 형태 즉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일부로 만들 것인가의 공학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매장 활동가의 교육이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더불어 우애와 환대의 양축에서의 역학관계는 매우 미묘하다. 우애의 관계망은 협동, 연합, 연대를 통해서 내부 구성원 중에서 소수자에 대한 정동과 돌봄의 반복을 수행함으로써, 결국 열리고 자기생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방인에 대한 환대로 향할 수 있다. 결국 환대와 우애는 협동조합의 두 축이지만, 결국 관계 없음으로써의 환대가 아니고, 폐쇄된 공동체로서의 우애도 아닌 열리고 자기생산하는 우애와 환대가 어우러진 판과 구도를 설립하여야 한다는 과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2001, 새물결)에서 유목민의 수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확률론적 경우의 수의 비밀을 살짝 보여주었다. 유목민의 수는 십인대, 백인대, 천인대와 같이 다질적인 수의 조합을 통해서 동질적인 수로서의 산술적 수와는 차이를 갖는다. 이를 테면 우리가 100+10은 110이라고 말하는 방향은 함수론의 방향이라면, 그 역치로서의 110이 다시 100+10될 가능성을 말하려는 방향은 확률론이다. 현존 문명의 수적 조직의 원리는 함수론과 집합론에 기반하고 있다면, 문명의 전환을 향한 수적 조직의 원리는 확률론과 재귀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우의 수로서의 확률론이 민주주의에 도입된 추첨제민주주의는 얼마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생태민주주의사회 즉 문명의 전환을 꿈꾸게 했던가? 여기서 사랑과 욕망, 정동은 확률론과 재귀론의 특징을 잘 가지고 있다. 즉, 확률론 상 사랑의 경우의 수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고, 재귀론 상 사랑의 자기원인이 다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된다’는 구도로 향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재귀론과 확률론은 특이점 설립에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기획자 유형으로 경우의 수가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경우의 수로서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특이점은 사랑과 정동의 반복이 설립할 수 있다.

특이점 설립의 비밀은, 정동, 사랑, 욕망, 돌봄의 반복 즉 생명에너지와 활력의 반복이 하나의 실물이 되어 다가오는 순간에 등장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특이점은 우리가 선택할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된다. 특이점 설립의 입구는 돌발흔적과도 같은 사랑, 욕망, 정동이 개척한 입구에서 시작된다. 그 입구의 출현은 우발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강건한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과 정동에 달려 있다. 마치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2008, 민음사)에서 설명하듯이 프란시스 베이컨의 고깃덩어리와 같은 인물그림의 출발점이 붓터치의 실수가 만든 돌발흔적에 끊임없이 덧대고 붓을 가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과도 같다. 즉, 우발성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에 활동가의 임무가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고 미세한 변화가 만든 우발성에 주목할 수 있는 초극미세전략이 필요한 셈이다. 그러나 돌발흔적과 같은 우발성은 정동과 사랑의 반복을 통해서만 자기원인을 가진 특이점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사랑과 정동의 활력과 생명에너지가 강렬하게 통과하는 특이점에서 선물이 오고가고 자원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이점은 에너지의 반복이 물질이 되는 지점이다.

또한 동시에 ‘특이점 설립’이 가진 놀라운 점은 새로운 것, 최근 것이 아닌 오래된 것들에 대한 재특이화 과정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즉, 세계의 재창조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고 낡고 폐물처럼 여겨져 왔던 것에 새로운 정동과 활력을 부여하여 재특이화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이나 물품, 장소, 관계, 배치 등에 숨어 있는 잠재성과 깊이를 끊임없이 재발견하고 재창안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자 유형의 신상품 개발이나 새로운 친구와 이웃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고객을 어떻게 하면 재특이화하여 특이점을 설립하는 과정으로 만들 것인가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즉, 우발적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뿐만 아니라 오래전 관계를 맺었던 협동조합원들 등에 대한 재특이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우애와 환대, 재특이화의 과정이 특이점 설립에서 수반되어야 할 세 가지 특이점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점 설립의 비밀은 사실상 초극미세전략의 핵심이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에 있다.

3. 생태계를 조성할 것인가? 하나의 유기적인 거대생명이 될 것인가?

협동조합이 사업체로서의 법인이면서 동시에 결사체라는 점은 결국 유기적인 하나의 생명과도 같은 조직체라는 의미이다. 결사체로서의 특성은 내부구성원 사이에서의 의견통일이나 일치된 결의결사를 만들 때는 유리하다. 그리고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회현실이나 자연과 생명을 바라보는 집단적 관찰자의 관점에서는 수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의 유기적인 거대생명으로서의 협동조합이 되었을 때의 문제점은, 협동조합의 내부에 차이와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조성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즉,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선택지를 갖게 되는 내부 생태계 구성이 아니라, 거대 유기적 생명으로서의 하나의 조직체는 탄력성이나 신축성, 유연성에서 뒤처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유기적 생명과도 같은 조직체는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탄력적일 수는 없다는 점이 맹점이다. 여기서 효율성과 탄력성은 역비례관계이다. 효율적이고 유기적인 조직은 자신의 몸의 기능을 분화시켜 복잡화하지만,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경우의 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이나 의미에 수렴되고 결집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점을 갖고 있다. 사실 단순성에는 수많은 다성음악적인 다양성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행동양식은 수많은 기능을 연결하는 다기능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복잡한 관료체제 즉 ‘관료주의=자동주의=기능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국가나 기업 등 다양한 조직체들이 대부분 유기적인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은 드러난다. 이러한 조직체의 경우, 하나가 무너질 경우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릴 위험이 상존한다. 왜냐하면 복잡화되어 있지만 하나의 몸에서 나온 기능적 복잡화이지, 다양한 선택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의 원형적인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몸을 가진 동질적인 집단이라는 귀속감이나 정체성이 중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불쑥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오고 불쑥 손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오는 등의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은 기능이 통합된 유기체 양상이 공동체가 아니라 그 내부에 차이와 다양성의 판이 짜여 있고, 기능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신체의 양상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를 쥘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기관들 없는 신체’(the Body without organs)라고 규정한다.

저성장시대에 대응하는 회복탄력성의 입장에서 내부에 다양성과 차이를 생태계와 같이 조성하여 풍부한 의견과 다양한 활동, 무수한 정동과 사랑의 특이점 설립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유기적인 하나의 생명과 같은 조직체가 목표가 되고 완결점이 되던 시대는, 사실상 외부에서 다가오는 사회현실의 다양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결의결사체의 일관성이 요구되던 시대였다. 즉, 일사불란한 공동의 행동과 일관된 행위양식이 요구되던 시대였으며, 다양성은 외부에서 저절로 주어지기 때문에, 이를 정립하는 활동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다양성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생산하고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저성장시대이다. 다양성을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생태계를 조성하지 못하면 저성장시대의 사회현실에서 경우의 수의 축소가 결국 이와 연관된 조직체의 경우의 수의 축소로 연동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기능분화와는 다른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 조성을 위한 상상력이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차이와 다양성은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더군다나 대립과 갈등만을 유발하는 조직에 해로운 것이라도 볼 수 없다.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은 사랑, 정동, 욕망의 흐름이 마치 가재의 지절을 펼치듯 다양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라는 점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더 미세한 것이 부각되는 발견과 발명의 순간이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의 실존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연대의 세 가지 노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연대할수록 같아지는 동일성, 통일성의 노선과 연대할수록 달라지는 다양성과 차이의 노선, 연대할수록 닮아지는 공통성, 공유재의 노선이 그것이다. 먼저 “연대할수록 같아진다”의 방향성이 아니라, “연대할수록 달라진다”의 방향성으로 향해야 건강한 내부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 내부의 생태계 조성은 다양한 의견과 차이로 인해 색다른 방향성을 개척할 수 있는 판과 배치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연대할수록 달라진다”는 관점은 연대할수록 미세한 차이를 낳는 주름, 지절, 매듭이 생겨서 서로의 미세한 차이의 향연으로서의 연대가 가능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공통성의 관점, 즉 “연대할수록 닮아진다”의 관점은 그 내부에 “연대할수록 달라진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할수록 같아진다”는 식의 통일성과 의견합일, 공통감각으로서의 상식, 동일성의 철학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즉, 공동체나 협동조합은 사랑하고 돌봄을 발휘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다양성과 차이를 확장시킬 수 있는 셈이다. 기능적이고 위생적이고 탈색된 관계는 전혀 차이와 다양성에 기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실질적인 관계를 수립할 때, 서로에게서 보이지 않던 면을 발견하게 되고, 서로의 유일무이성을 재발견하게 됨으로써 더 차이나고 더 다양한 판과 구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1996, 서광사)는 감각지로서의 공통감각과 표상의 1종지와 개념지로서의 공통개념의 2종지, 직관지로서의 통찰과 영감의 3종지를 구분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1종지로서의 공통감각이 오류의 원천이며, 신체변용과 공통개념 생산이라는 실천과 노력 없이 감각적이고 즉각적으로 우주되기, 즉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비판한다. 즉, 공동체가 감각과 상식의 순간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과 욕망과 정동의 흐름은 그 내부에 다양한 차이와 다양성의 지절에 대한 인식작용 다시 말해 차이를 낳은 차이에 대한 예민한 공통관념이 발동해야 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가 너무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공통감각, 상식, 선한 본성 등의 수준에서 공동체를 바라보는 것이 나이브하다는 점에 대한 스피노자의 지적에 있다. 오히려 다양한 측면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공동체인 셈이다.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이면서도 개인적이고, 선하면서도 악동 같으며, 협동하면서도 질투하고 경쟁하는 것이 공동체의 작동방식인 셈이다. 그 모든 점을 함께 고려하고 공동체의 판과 구도를 짜려 할 때 우리는 차이와 다양성에 기반한 공동체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닮아질 수 있는 계기는 감각적인 영역에서의 공감과 같은 영역이라기보다는 미세한 차이가 갖는 공진화하는 화음과도 같은 영역일 수 있다. 화음의 경우에는 미세한 음과 박자, 리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화음 속에 어우러진다. 그런 점에서 공감이 아닌 화음이 필요하며, 그 화음이 바로 무수한 특이점으로 이루어진 협동조합 내부의 다양성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유기적인 거대생명으로서의 조직체의 장점은 분명 있다. 일관된 관점을 견지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치된 행위양식과 결의결사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배치가 설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구도가 작동할 수 있었던 시기는 오히려 성장주의 시대처럼 하나의 모델에 입각한 구도가 확산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모델을 통해서 단조롭고 동일하게 판을 짬으로써 사회를 직조하는 시기는 끝이 났다. 오히려 이러한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포디즘적인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기존의 주어진 모델의 경우의 수는 심각하게 축소되고 양적 경제는 감축되는 것이 저성장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성장시대에 대한 협동조합의 대응전략으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룰 정도의 다양한 특이점의 설립이 요구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협동조합은 다양한 문제설정들로서의 특이점들을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정동의 조직의 의미로 재탄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적인 하나의 생명보다는 다양성의 생태계의 의미에서 조직을 바라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고 일치된 의견과 공감대의 형성만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의견이 화음이 이루어 어우러지도록 만드는 판과 배치로서의 협동조합이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상식 즉 커먼센스(common sense)의 논리는 감각적인 수준에서도 즉각적인 합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감각적 수준에서 합일된다는 설정처럼 나이브한 생각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협동조합의 협동과 연대는 감각이나 상식의 수준이 아니라, 신체변용이나 구성주의적 실천, 공통관념의 형성의 노력에 달려 있다. 칠레의 인지생물학자들인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말처럼 객관적인 진리론에 입각한 표상주의가 아닌 ‘앎=함=삶’의 구성주의의 구도가 작동하는 것이 협동과 연대의 질서일 것이다. 협동조합에서의 구성주의 논의는 결국 각기 다양한 주체성들이 구성한 세계들이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에 달려 있다. 오히려 경성과학처럼 “맞다, 틀리다”를 입증하고 검증하는 방향성은 생태계 조성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오히려 “다르다”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즉 연대할수록 달라지는 과정이 협동조합의 생태계를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것이다. 펠릭스 가타리에 따르면 단순하게 보이는 일에는 더 다양하고 다성음악적인 화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단순하면서도 경우의 수로서 선택할 수 있는 특이점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다양성과 차이가 어우러져서 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활동에 돌입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래도 협동조합은 다양한 기계음이 어우러진 신시사이저와 같은 입자가속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설립하기 위해서 내부 생태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더욱 증폭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저성장시대의 협동조합은 미리 주어진 사회에 대한 감각적인 차원의 공감의 일치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구성하고 창안하는 사회들 간의 무수한 차이에 의한 화음에 따라 작동하는 생태계 전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4. 게토경제 : 내부자거래와 재특이화 과정

인류문명은 아직까지 저성장 이후의 삶의 양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게토경제에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체험했을 뿐이다. 이를 테면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박사의 『성혁명』(2011, 도서출판 중원문화)에서의 「2부 소련에서 새생활투쟁」에서 언급되는 청년꼬뮌의 실험에서 혹심한 곤궁에도 가족질서로 돌아가지 않고, 4~5명의 청소년들이 재정위원회, 식생활위원회, 위생위원회 등을 창안하고 콤소몰과 꼬뮌과의 관계 속에서 자원을 조달하고, 필요와 부족을 해결하려 했던 노력을 했던 과정 등이 짤막하게 등장한다. 청년 꼬뮌은 자원에 대한 부족에 따른 곤궁하고 혹독한 현실 속에서 등장한 ‘자치원리’와 ‘권위주의적 규율’ 사이의 딜레마를 집합적 생활 속에서의 꼬뮌 성원들의 열망으로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배치를 설립하였다. 같은 구성원들이 서로의 자리와 구성을 바꿔가면서 만든 배치지만 일관성을 갖고 고민을 모으고 대책과 목표를 명확히 하면서 회의구조를 마련했기 때문에, 집단의 지혜 속에서 작은 단서와 아이디어, 흔적 등도 논의의 과정에서 풍부해졌다. 이를 통해서 청년 꼬뮌은 자기 유지와 자기 생산의 과정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

1941년 바르샤바 게토지역의 시장. 유통, 수송, 생산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연루된다. 출처: wikimedia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undesarchiv_Bild_101I-134-0782-24,_Polen,_Ghetto_Warschau,_Markt.jpg )
1941년 바르샤바 게토지역의 시장. 유통, 수송, 생산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연루된다.
사진 출처: wikimediacommons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고결한 의미를 통해서 이를 해쳐나가야 한다는 의미요법(logotherapy)은,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인 빅터 플랭클(Viktor.Frankl)이 체험한 아우슈비츠라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출발한다. 빅터 플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2005, 청아출판사)에서 유태인들에게는 죽음과 고통에 무감각하고 무신경하였던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이러한 절박하고 혹독한 상황을 실존적 좌절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삶의 의지, 실존적 역동성, 고결한 의미의 추구로 만들어냈던 일련의 노하우와 지혜가 등장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수프, 소시지 하나, 담배 한 개비보다도 이것이 촉발해내는 삶의 의지나 의미였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삶을 유지케 하는 것이 깊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에도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미와 가치, 희망이라는 높이를 갖고 있다면, 보다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구성해내고 삶을 자기 생산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최근까지도 뉴스로 간혹 전달되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의 삶의 형태 등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봉쇄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자원이 가자지구에 전달되어 생존과 생활을 유지하는 과정이 게토경제의 측면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한 주변 국가와 국제 사회의 지원과 노력이 있다. 즉, 주변부에서의 도움과 지지가 사실상 고립된 게토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가자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가장 고립된 영역이면서도 가장 고립되지 않은 영역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런 점에서 관계의 영역이 고립된 게토경제에 들어갔을 때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도 드러난다.

이러한 게토경제의 사례들에서 특징적인 것은 자원이 극히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통, 수송, 생산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연루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수송과정이나 유통과정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이 내부자거래를 통해서 최소한의 자원을 적재적소의 필요영역에 순환시켜 공동체 자체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하경제라고 해서 게토경제 자체를 암시장의 거래양식과 유사하게 생각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게토경제는 저성장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지혜와 노하우, 암묵지 등을 갖추고 있지만, 그 작동방식이 비선형적이고 아직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을 뿐이다. 이를 테면 물건 하나가 그것을 절실히 요구하는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는 경로는 일반적인 시장의 유통경로를 따르지 않고, 수많은 우여곡절과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 물론 그렇게 웃돈이 붙어서 더 비싸게 거래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단 그것의 유통방식에 대해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물물교환을 이룰 수 있는 미니교환시스템의 경우에는 성장 시대에는 웃어넘길 만한 유통의 경로지만, 게토경제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다. 이를 위에서는 일단 ‘관계’ 즉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 관계는 물물교환에서 “네 걸 먼저 보여라, 그 다음 내걸 보일 것이다”라는 서로 믿지 못하는 거래양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 떼와 기억, 노력이 들어가 있는 물건에 대해서 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의 거래가 가능하게 되는 원천이 된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와 공동체 간의 미니교환시스템은 간혹 선물과 같은 살짝 등장하는 영역이지만, 사실상 인류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거래방식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성장 시대에서는 상품이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경로에 따라 유통되는 것이 기본이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 빠르고 정확한 유통경로는 최근에는 택배와 배달 등에 따라 플랫폼 유형으로도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중간과정에서의 거래양식은 불필요한 군더더기와 잉여, 비효율성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반면, 게토경제가 유지될 수 있는 원천은 사실상 자원이 하나라면, 무수한 사람들의 스토리, 유통, 거래, 중간거래 등을 거치면서 군더더기와 잉여, 비효율성 자체가 경제작동의 원천이라는 점에 있다. 이는 내부자거래의 특징을 의미하며,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하더라도 무수한 내부자간의 거래에 따라 다양한 이익들과 권력, 욕망, 정동, 의미 등이 오간다. 그런 점에서 상품거래와 선물과 증여의 주고받음 사이에 있는 것이 게토경제일 수 있다. 우리는 선물과 상품의 중간 영역으로 물품이라는 것을 상상해 왔다. 그런데 그 물품이라는 것이 사실상 가장 활발하게 작동했던 영역이 바로 게토경제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전통시장이나 골목상권 유형은 일단의 프랙털 유형의 골목의 지리적인 특징에 따라 음식점 주인이 철물점에 물건을 사고, 철물점 주인이 세탁소를 이용하고, 세탁소 주인이 미장원을 이용하는 등의 내부자거래의 방식이다. 그러나 국경을 매끄럽게 움직이는 FTA[자유무역] 시대에 그러한 전통적인 거래 유형은 이미 기능 정지 상태에 빠져 있다. 더욱이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 이후부터 사실상 장소성에 기반한 거래유형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저성장시대에 어떻게 내부자거래에 따라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유한한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골목상권이나 전통시장의 극한적인 모습인 게토경제에서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초래한 상황이 장소성이나 국지성, 로컬이 아닌 편재성, 유동성, 이동성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성장시대가 엄습함에 따라 오히려 편재성이나 유동성, 이동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성장시대에는 색다른 판짜기가 시도되어야 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편재성에 네트워크 이미지를 덧씌운 네트워크판매나 피라미드판매 유형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물품에 의도적으로 다양한 인물들과 주체성을 연루시키고 그들을 개입시키고 손을 타고 증여를 하고 수많은 곳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내부자거래의 입자가속기를 가동시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마르쉘 모스의 『증여론』(2011, 한길사)은 물건에 사람들을 어떻게 연루시키는지를 인류학적으로 규명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내부자거래를 선물증여의 방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줄 의무, 받을 의무, 돌려줄 의무와 같은 암묵적인 강제가 관철되는 급부체제의 극한은 아마도 포틀레치(potlatch)라는 의례 및 축제일 것이다. 그러나 일대일 대응의 급부체계가 아닌 쿨라(cula)와 같은 방식의 제 3자를 끊임없이 연루시키는 방식의 선물증여는 더욱 풍부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쿨라는 게토경제 등에서의 물건에 사람들이 연루되는 방식에 대한 풍부한 전거로서 읽힐 수 있다. 또한 하나의 물건의 유통, 수송, 전달, 증여, 판매 과정에서의 이야기구조뿐만 아니라, 하나의 물건이 사용되면서 거치게 되는 이야기구조 역시도 지속적으로 발명해야 할 것이다. 『증여론』에 담긴 모스의 논의는 아직 가재의 지절이 펼쳐지지 않은 원형적이고 원초적인 실금과도 같은 단상과 아이디어, 스케치만이 등장한다.

저성장시대의 자원의 제한이 초래한 위기적 상황은 오히려 사물이 갖고 있는 잠재력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일 수도 있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시대에는 사물에 대한 비하와 천대가 일상적이었다면, 게토경제에서는 사물의 깊이와 잠재성이 현격히 높아지고 무수한 사람들의 손을 타며, 이야기구조도 엄청나게 폭발할 것이다. 마치 평생 호롱불만 쓰던 집에서 전등을 처음으로 연결했을 때의 순간처럼, 우리가 알지 못한 사물의 잠재력에 대한 응시가 게토경제에 숨어 있다. 그것은 사물과 주체성에 대한 재특이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저성장시대에 어떤 사물에 대한 거래와 유통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 연구는 아직 시작도 안한 상태이다.

5. 특이점 설립 : 모두가 선수이지만, 모두가 아마추어인

모두가 판짜는 자라는 점에서 선수인 곳, 그곳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행사나 잔치에 가면 모두가 아마추어가 된다. 전을 부치는 사람, 사회를 보는 사람,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 모두가 그 기능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더 나아가 선수를 아마추어로 만들어서 재특이화하는 판과 배치가 협동조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때부터인가 협동조합에서 선수들이 판을 주도하는 자리가 되고 나서부터 이러한 재특이화 과정은 누락되고 있다. 여기서 재특이화 과정은 세상을 재창조하는 원동력이라고 일컬어지며, 목적합리성의 완성형과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진행형으로서의 재특이화 과정이다. 다시 말해 협동조합에서 특이점 설립을 통해서 색다른 욕망, 정동, 돌봄이 등장하는 판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이점 설립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다양해서 탄력적이다. 선수를 아마추어로 만들고, 세련된 사람을 쩔쩔 매게 만든다. 그 점이 재미있는 판의 활력소이다. 그것은 그저 효율적으로 이벤트를 기획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부분이 아니다.

펠릭스 가타리의 「업무분담표」와 같은 문건에 의거한다면, 공동체에서는 정규업무, 순번업무, 임시업무 등의 업무분담이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규업무 이외의 순번업무와 임시업무 등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아마추어들이 가득 찬 재특이화의 판을 만드는 방법에 있다. 왜냐하면 정규업무는 “~은 ~이다”라고 의미화되어 있고 기능화되어 있지만, 순번업무나 임시업무는 끊임없는 지도제작의 과정에 있고, 다기능적이기 때문이다. 즉, 정규업무에 따라 기능 분화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비루하고 따분하기까지 하다. 늘 예상치 못한 임무와 색다른 미션을 앞에 두고 배치가 내재하고 있는 특이점들끼리의 교차와 낙차 속에서 색다른 아이디어와 상상력, 미숙함과 실수, 넉살좋은 사람들이 주는 재미 등이 생기는 곳이지만, 모두가 판짜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웃음과 낙관이 가능한 곳이 공동체의 판이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협동조합 역시도 효율성과 속도, 기능연관에 따라 작동하고 있다. 재특이화 과정으로서의 사랑, 욕망, 정동 등은 뒷전으로 밀리고, 기능과 자동성이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의미와 가치는 기능과 자동성이라는 동전의 다른 쪽 면이라고 할 수 있다. 협동조합에서는 결사체와 사업체로 드러난다. 물론 성장이 지속되던 시기에는 이 두 가지로 만들어진 한 쌍이 동전의 양면이 되어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사체와 사업체의 양면이 동시에 축소되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제공되던 사회라는 판 자체가 위축되고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결책은 내재적인 방법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재특이화 과정은 내부의 판과 관계망, 배치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더욱이 조합원이 늘고, 사업이 확장될 것이라는 덧없는 전망보다는, 기존 조합원과의 관계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그 부수효과로서의 확산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선수로서 판을 짜고, 모두가 아마추어가 되는 재특이화 과정이 끊임없이 설립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구혁명(=영구개량)의 판이 개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근대적인 책임, 당위, 의무, 기능, 역할에 따라서 움직이는 주체를 전제조건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활동의 결과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결국 주체성 생산(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에 의한 결과의 일부가 책임주체(subject)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가 어떤가?’가 아니라 과정과 진행절차, 그 속에서의 개입과 관리, 자율성의 확장이 더 중요해진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개입하고 덧대고 오리고 가필하고 첨부하는 등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대로 두어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입하고 관리하고 손질하면서 선수를 아마추어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선수가 된 사람에 있다. 오히려 재특이화 과정은 무수한 아마추어를 생산해냄으로써 삶을 재창조해내고 활력과 정동의 판을 구성하는 것에 있다.

그랬을 때 무수한 사람들의 뜻, 지혜, 아이디어가 모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과정을 결과의 이익과 이득으로 환원하는 공리주의의 명제는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하나의 의미, 하나의 모델, 하나의 표상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이에 수렴되고 집중하던 시기는 지나갔다. 이제 수많은 모델과 수많은 의미가 공동체가 개입되는 과정이 더 중요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수한 비정규업무들이 제시될 때, 모두가 아마추어가 될 수밖에 없다. 성과주의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던 사랑, 정동, 보이지 않는 것, 미학, 윤리 등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이 재특이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제가 난처할 수도 있고, 난해할 수도 있고, 미지의 영역이라 어쩌면 신비롭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아마추어가 되는 판과 업무, 배치 등이 협동조합의 내부 관계망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내재주의적인 전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딱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고, 우리의 곁에 서식하고 있는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그것은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대답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관계망과 배치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미세해지고 다양해지는 과정일 것이다.

이 글은 〈2019 한살림 생명협동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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