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전략지도] ⑤ 제한, 유한성, 한계를 응시하며

저성장시대를 맞아 성장이 아닌 성숙의 경제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협동조합에게는 미래세대를 생각하는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 관계와 정동을 복원하고,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며, ‘더불어 가난’을 추구해야 할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 제한, 유한성, 한계를 응시하며

1. 성장의 한계 : 지구와 생명, 자연은 유한하다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1972) 보고서는 당시 성장과 개발이 활발하던 시점에 하나의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이미 50년 전부터 성장주의는 지구의 한계, 생명의 한계, 자연의 한계로 인해, 곧 기능 정지되거나 멈추게 될 것이라고 전망되고 있었다. 저성장시대에 직면한 현재의 상황은 당연히 예상되었던 바이지만, 기존에 성장과 확장으로 향했던 사업체의 입장에서는 무척 난처하고 군색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업의 확산과 확장이 언제까지라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자체가 사실은 현실과 맞지 않는 착각이었다. 그동안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과 생명이 무한하다는 설정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자연과 생명은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으며 끝이 있다. 그런 점에서 저성장시대는 오히려 성장에 기반했던 사업체의 작동양상을 대대적으로 점검하고 배치를 재배치할 수 있는 색다른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작금의 자원-부-에너지의 제한은 결국 파이를 키워서 몫을 더 가져가야 한다는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가 낡은 것임을 드러낸다. 파이가 더 작아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엄혹한 현실의 작동양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관계로의 이행은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일 수 있다. 즉, 지금이라도 성장이 아닌 성숙의 경제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협동조합은 저성장시대의 개막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관계의 성숙에 대한 전략에 심사숙고할 여유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성장 시대처럼 쉴 새 없이 달려가는 저성장시대는 어딘가 부조화하고 부조리하기만 하다. 우리가 바빠져야 할 것은 일이나 기능, 직분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성숙시키는 이행의 구성요소들인 사랑, 욕망, 정동, 돌봄의 활력과 생명 에너지에 있다. 그러나 활동가들에게 부여되는 기능과 일, 직분, 역할 등은 더욱 무게와 하중을 더하고 있고, 소진된 활동가가 협동조합을 그만두는 일도 생기고 있다.

우리는 자원-부-에너지의 축소의 상황에서 왜 이렇게 바쁜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정작 관계를 실질화하고 실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바쁨은 오히려 더 축소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인데도 말이다. 기능연관, 직분, 역할 등에 따라 속도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저성장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다. 오히려 더 관계 중심의, 사람 중심의, 정동과 돌봄 중심의 사업들이 필요하고, 이는 활동가들과 조합원이 맺던 기존 배치의 재배치를 의미한다. 오히려 활동가들은 촉진자(facilitator)와 같은 역할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협동조합의 판과 배치는 생태계와도 같이 다변화되어야 하며, 다기능적인 관계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해야 할 시점이다.

저성장시대를 경유한 협동조합의 모습은 기존에 당연시되었던 협동조합의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 예상된다. 기존에 통념적으로 의례 그래왔던 것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고, 배치의 재배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미시정치가들을 양성하는 곳으로 협동조합이 변신해야 할 때이다.

자연과 생명의 한계 때문에 저성장시대가 왔다는 것은, 당연히 신체와 활동의 한계 역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동가들의 소진을 예방하고 활력 충전을 위한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동시에 활동가들이 미세한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미시정치가로 변신할 수 있도록 교육프로그램과 양성과정이 요구된다. 협동조합이 서 있는 판의 변화는 이제 이미 시작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전환사회와 저성장시대를 헤쳐 나갈 것인가의 과제는 결국 협동조합이 변화를 도모하고 촉매하고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추구하는 바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의 판과 구도가 더욱 전환사회의 비젼에 어울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성장을 추구하던 모델이 아닌 관계의 성숙을 추구하는 모델로의 변화는, 결국 우리 내부에 있는 활력과 생명에너지의 원천인 욕망, 사랑, 정동, 돌봄, 살림의 힘에 달려 있다. 협동조합의 전반적인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 애정과 활력의 원천을 끊임없이 탐색해 나갈 때, 작은 돌발흔적과도 같은 특이점들이 생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 특이점 하나하나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된다. 그것이 진정한 미시정치가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일 것이다.

2. 자본의 미래투자 전망상실과 협동운동의 리더십

기후위기 상황이 전면에 등장하고, 자원으로 간주되어 왔던 자연과 생명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면서 돌연 자본의 퇴행과 의고주의(擬古主義)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자본은 정확하게 미래투자 전망을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동안 미래를 차압해서 현재에 끌어다가 흥청망청 파티를 벌여 왔던 것이 성장주의라면, 이제는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에 따라 자본은 현재의 순간, 찰나의 이익을 탐닉하는 단기투기성 자본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던 허구상품으로서의 지대, 이자, 임금 등이 기능정지에 빠진 상황은, 단지 미래에 대한 암울함만을 얘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존 경제에서의 기능 저하와 폐색(閉塞) 등을 의미한다. 갑자기 소비생활은 축소되었고, 그럴수록 자본은 더욱 교묘하게 소비 이외의 곳에서 이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나 공통재의 약탈, 공동체에 대한 질적 착취, 집단지성에 대한 갈취, 채굴과 추출자본주의, 플랫폼자본주의 양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묘한 약탈의 양상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본 자체는 미래투자전망이 없는 상황이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어셈블리 : Assembly』(2018, 국내미출간)에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단기투기성 자본이 미래전망을 상실하고 있음에도 찰나의 약탈에 전념하고 있는 데 비해,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는 미래의 전망을 개방하고 진정으로 지구, 생명, 자연, 미래세대의 지속가능성의 입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엄습은 미래세대에 대한 기후불평등과 세대 간 차별을 넘어서, 그들의 입장 자체를 아예 배제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오히려 기성세대들 사이에는 미래세대에 대한 혐오와 편견의 시각마저도 확산되고 있다. 청년세대들은 스스로의 가능성과 전망이 없음에 대한 허무주의와 전망 상실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인다. 협동조합의 리더십은 바로 미래세대에 대한 관점을 회복하는 데 달려 있다. 이를 테면 기존의 생협의 작동양상도 미래세대에게 좋은 유기농, 친환경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미래세대에 대한 관점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자본이 점차 미래세대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 영역도 그 영향권 내에서 직격탄을 맞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세대의 관점과 그들의 참여, 연대의 프로그램의 확보가 가장 절실한 상황이고, 그것 자체가 협동조합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더십이라고 하면 대부분 근대성에 기반한 리더십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리더십은 전 사회를 아우르며 미래로 향하는 무의식적 행렬로서의 정동, 사랑, 욕망, 돌봄의 흐름을 창출하는 리더십이다. 즉, 의식적 주체, 의지적 주체, 결사적 주체의 절규하듯 이끄는 리더십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변화를 촉진하는 사랑과 정동의 흐름(Flux)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집합적 리더십’인 셈이다. 미래투자전망을 잃어버린 자본이 주도하는 흐름이 사실은 전망도 없는 허무주의적이고 무망한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진정으로 미래세대의 삶과 생존, 생활을 위한 방법은 전환사회의 전망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 보이며, 그것을 돌봄, 정동, 살림이라는 협동조합의 흐름으로 바꾸는 활동이 바로 리더십인 것이다. 그러므로 협동조합은 미래주의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의식적인 전위로서의 미래주의가 아니라, 모든 협동조합의 사업이나 활동이 지금 태어난 미래세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미래주의를 의미한다.

협동조합은 미래주의적이어야 한다. 모든 협동조합의 사업이나 활동이 지금 태어난 미래세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출처 : Hai Nguyen Tien@pixabay] https://pixabay.com/ko/photos/%EC%82%AC%EB%9E%8C%EB%93%A4-%EC%96%B4%EB%A6%B0%EC%9D%B4-%ED%96%89%EB%B3%B5%ED%95%9C-1560569/
협동조합은 미래주의적이어야 한다. 모든 협동조합의 사업이나 활동이 지금 태어난 미래세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진 출처 : Hai Nguyen Tien

결국 협동조합의 리더십은 가시적이고 외양적인 자본과 공공의 영역에서의 형태가 아니라, 보이지 않고 아직 도래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민감성과 예민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홍보하고 내세우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배치로서 작동하고, 보이지 않는 윤리와 가치를 위한 행위양식에 나서는 것을 말한다. 러시아의 미래파들이 근대적 미래주의에 가까웠다면, 협동조합의 미래파는 오래된 과거 속에 미래적 소재를 찾아내고, 죽은 자와 산 자를 공존케 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세대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근대 이후의 미래주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조차도 하나의 특이점으로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중 하나임을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리더십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말이 앞서기보다 현실의 변화가 앞서도록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세대를 고려할 배치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은 아직 세대교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청년세대로부터 들불처럼 일고 있는 협동조합의 열풍이 있기는 하지만, 보다 전면적으로 미래전망을 수립할 만큼 협동조합의 내용이나 표현은 성숙한 상황이 아니다. 시민들은 질문한다. “기후위기, 생태계위기 속에서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 이런 질문에 대해서 난색을 표명하고 주저하고 쩔쩔 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설정에 대한 다양한 지도제작을 이룸으로써 전 세대를 아우르는 색다른 유형의 전환사회의 전망에 대해서 응답할 때가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누구도 기후위기 상황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고, 저성장시대를 전환사회의 전망과 접속시켜 미래전망을 수립하고자 하는 책임 있는 주체성이 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협동조합이 집합적 리더십을 통해서 책임부위를 만들고, 협의단위를 만들고, 발언대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서 미래전망에 대해서 일말의 비젼을 갖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집합적 리더십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3. 범위한정기술 : 무차별사회와의 분리를 통한 생활세계 복원

무차별사회와의 접속은 매일 도시에서 익명의 낯선 사람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수시로 다가온다. 또한 TV나 신문, 인터넷을 통해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지식과 정보를 취득하고, 그들의 영상과 이미지와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매체들을 떠다니는 수많은 정보를 접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가 순삭(순간 삭제)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SNS와 각종 메신저, 스마트폰, 텔레비전을 통해서 취득되는 정보량이 너무도 많다. 이러한 정보엔트로피가 높은 삶 속에서, 결국 자신과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람과의 아날로그 정보 값은 터무니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저성장시대에 협동조합에서 발신하는 소식과 정보 역시도 보통의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신의 삶과 생활양식을 바꾸는 가장 귀중한 지혜조차도 사실은 수많은 정보쓰레기 중 하나라고 간주되어 무심히 버려진다. 이런 무차별사회에서 협동조합은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저성장시대에 협동조합이 대처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정보엔트로피를 높임으로써 사업체를 활성화하려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있다. 디지털 정보 값이 높으면 아날로그 정보 값은 낮다. 그런데 우리가 협동조합에서 맺어야 할 실존적인 관계는 대부분 아날로그 정보 값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의 수많은 정보로부터 분리된 관계 맺기의 방식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울리는 스마트폰 알림 문자로부터 분리되어 만남과 마주침, 관계를 실질화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바로 눈앞에서 대화하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려면 일종의 범위한정기술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우주선 유형의 분리된 삶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프라이버시(Privacy)를 강조하며 우주적 고독과 사생활의 권리를 추구하는 아파트와 같은 삶의 유형은 사실은 저성장시대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범위한정기술은 현상학에서 유래한다. 만약 우리가 텔레비전을 본다면, 그 옆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찻주전자와 울고 있는 아이, 바람에 날리는 책 등으로부터 분리되어 텔레비전의 화면에만 집중해야만 비로소 텔레비전에 대한 감각이 열린다는 것이다. 결국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만남에서 실존적 관계가 성립되려면 사실상 주위환경에 대한 측방경계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바로 곁에 있는 주변 사람들과 가족, 이웃에 대한 관심은 매우 희박하다. 그런 점에서 저성장시대에 협동조합이 당면한 실질적인 관계 회복의 과제는, 사실상 최대한 정보의 홍수로부터 벗어난 정보의 무중력지대를 만드는 것에 달려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신경 쓰고 선물을 주고받고 소식을 접하는 등의 일상의 당연히 여겨져 왔던 것도,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하고 재건해야 할 생활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에서 커뮤니티 비즈니스나 협동이나 연대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범위한정기술이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적용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시간은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 게임, 텔레비전 등을 빼고 나면 아주 스치듯 잠깐 가족과 이웃과 만난다. 협동조합도 그러한 스치듯 지나고 소비하는 일상의 편린(片鱗)과도 같은 것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정지시키고, 차를 끓이고,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소식에 관심을 가졌던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삶이 재건되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도, 인간도, 공동체도, 협동조합도,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서 그저 소비하고 향유하면 된다는 식의 발상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이고 관계를 형성하고 고민하고 숙고해서 하나하나 풀어가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저성장시대는 분명 겉치레, 외양을 소비하고 소모하던 것들을 모두 군더더기와 잉여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이제 실질적인 관계 이외에 요행을 바라는 것이나 자동적인 것이나 기능적인 것들, 우발적인 기회는 점점 축소되고 곧 사라질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 곁에는 정말로 절실하고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만 남게 될 것이다. 협동조합이 바로 그러한 관계와 정동의 보물상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 듯 아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문제의 해결열쇠가 생길 것이다.

범위한정기술이 저성장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여기-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각을 열고 다른 수많은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것에 대해 일단 판단정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제한된 영역에서 강한 상호작용을 띤 관계가 성립되어 일단의 특이점으로서의 경우의 수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마치 복잡하면서도 이채롭고 색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으로 다양한 선택의 경우의 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사실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진정으로 우리가 선택할 다양한 경우의 수는 실질적인 관계들이 만든 특이점 하나하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껍데기들은 사라지고 있다. 진정한 잉여와 군더더기가 사라지고 있다. 풍경화된 관계, 수많은 정보, 현란한 지식은 무력화되고 있다. 우리는 실질적인 밀알과도 같은 진정한 관계, 자신의 실존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관계를 구하고 있다. 그러한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협동조합이어야 한다. 그래야 협동조합에서도 다양한 경우의 수로서의 선택지가 설립될 수 있다. 우발적인 고객들은 점점 사라지고 커뮤니티 비즈니스만 남게 되는 상황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실질적인 관계의 판과 배치로 협동조합의 재창안을 생각하게 된다.

4. 짧은 자원순환주기 : 물품은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 이식의 수단

생협에서 판매되는 친환경 유기농 물품들은 자연생태계의 짧은 순환주기에 따라 생산된 물품들이다. 결과에서 쓰이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생산, 유통, 수송의 과정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에머지(Emerge)로 가득 찬 물품도 아니고, 수송의 거리가 멀어서 푸드마일리지가 높은 물품도 아니다. 저장과 보관에 드는 비용이 높은 물품이 아니라, 제철채소 제철과일이다. 자연과 생명의 순환과 재생의 주기에 따라 생산된 물품이다. 절기살이와 식생, 생명의 생애주기에 따르는 물품들이다. 그럼 점에서 물품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할 수 있게 만들며, 그저 먹거리의 일종으로 미리 주어진 물품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물품은 일종의 문제설정이다. 물품은 색다른 라이프스타일로 향하게 하는 관문이다. 사실 소농에게 있어서는 물건과 생명 자체가 이미 문제설정의 일종이라고 간주된다. 그래서 하나의 문제설정과 다른 문제설정을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가 정동이고 돌봄인 셈이다. 물품은 우리가 미리 주어져 있고,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던지는 물음표이자 의문부호이다. 이를 테면 로컬푸드와 지역의 먹거리를 연결하는 푸드플랜의 경우에는 그러한 먹거리와 농업의 연결고리가 자동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보여준다. 즉, 물품이나 물건, 사물을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연결시키고 접속시킬 것인가의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문제설정으로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이다. 미리 주어진 용도, 기능, 사용처에 따라 물품이 결정된다는 기능주의적이고 자동주의적인 발상은 유효하지 않다. 그것은 물품을 대답으로 간주할 뿐, 문제제기로 간주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소농의 시각에서는, 사물과 물품은 생명과 자연의 거대하면서도 짧은 순환주기가 만든 문제제기로서의 사물이다. 생명은 대답이 아니다. 먹거리는 대답이 아니다. 물품은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문제제기이다. 그래서 물음표와 물음표의 횡단면에 정동과 돌봄을 위치시킨다. 마치 냅킨과 컵을 각각 문제설정으로 보고, 그것을 닦고 정돈하고 배치하는 돌봄과 정동의 손길처럼, 소농에게 자연과 생명은 거대한 문제제기와 물음표, 호기심, 의문부호를 보내는 존재들이다. 소농이 대답으로서 물건, 자연, 생명을 바라보지 않는 태도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갖는다. 자본주의처럼 전문가들을 등장시켜 여러 가지 기능 분화를 통해서 대답을 던지는 방식, 즉 사물과 생명을 뻔하게 보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농은 정동과 돌봄의 다기능성에 따라 여러 문제제기들을 매끄럽게 연결시키며, 그것이 유기농업이며 유기축산이다.

문제설정으로서의 사물과 물품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제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제기이다. 만약 소농의 마당에 망태기가 하나 놓여 있다면, 소농은 한 편으로 문제상황으로 느낄 것이다. 즉, 치우지 않고 ‘누가 놔두었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소농의 정동과 돌봄이 여기서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제제기이다. 소농이 망태기가 놓인 것을 어떤 질문과도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전근대 시대의 애니미즘의 출발점이었지만, 더 나아가 사물과 물품을 잠재성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향할 수 있다. 물음표를 가진 사물을 사물이 살아있는 것으로 비유나 은유적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사물 내부에 있는 다양한 잠재성과 깊이로 바라볼 여지도 존재한다. 문제설정으로서의 사물의 두 가지 측면, 즉 문제 상황과 문제제기는 동시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결국 정동과 돌봄이 갖는 행동양식을 촉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협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기능과 용도가 정해진 대답으로서의 물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전환사회를 향한 문제제기로서의 물품을 건넴으로써, 라이프스타일의 심원한 변화를 초래하려는 것이다. [출처 : Dominik & Frederike Schneider@pixabay]
생협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기능과 용도가 정해진 대답으로서의 물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전환사회를 향한 문제제기로서의 물품을 건넴으로써, 라이프스타일의 심원한 변화를 초래하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Dominik & Frederike Schneider

결국 생협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기능과 용도가 정해진 대답으로서의 물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전환사회를 향한 문제제기로서의 물품을 건넴으로써, 라이프스타일의 심원한 변화를 초래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속적인 현존 문명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문제제기를 하고, 대안에 대한 모색을 촉구하는 것이 생협의 물품이다. 결국 협동조합의 물품은 그저 상품을 사고파는 뻔한 대답으로써의 행위양식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던지며 색다른 삶의 양식을 개척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A=A”라거나 “A는 내거다”라는 방식의 자본주의의 상품질서의 실체화된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의 잠재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색다른 삶의 양식을 향해 행위를 촉구하는 등의 물품이 갖고 있는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결국 생협의 양적 척도로서의 매출이나 판매 여부 이전에 물품이 갖고 있는 문제설정의 차원을 잘 전달하고 라이프스타일로 이식하는가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물품이 던지는 문제제기에 대해서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전환사회의 힌트와 아이디어를 물품의 메시지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5. 국지적 절대성 : 로컬에서의 실존의 복원, 관계의 복원

국지적 절대성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2001, 새물결) 「12장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장에서 등장한다. 새로움이 전 세계를 이리 저리 여행해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인 장소에 머무르면서 촉지적 감각에 따라 가까운 곳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는 시각에서도 새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 결국 로컬리티의 복원은 그저 제도나 시스템 수준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인식체계에 대한 심원한 변화를 의미한다. 늘 이동 중에 있는 모빌리티의 사회에서 가장 지엽적이고 국지적인 영역에 머무는 것은 그저 고집스러운 토착성의 발호가 아니라, 지금-여기-가까이에서 서식하고 있는 삶의 재발견이자 실존의 재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국지적 절대성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심원한 로컬리티에 대한 변형양상을 우리는 살짝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저성장시대의 협동운동은 로컬의 영역을 새로운 재창안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그 힌트와 아이디어, 단서를 ‘국지적 절대성’이라는 개념의 구도가 갖고 있다. 모두가 바쁘게 이동하고 떠나고 돌아오고 찾아오고는 있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장소가 가진 깊이와 잠재성에 대해서는 무감한 상황이 찾아오고 있다. 동시에 저성장시대의 협동운동은 가까이에 있는 장소와 인물, 생명, 사물에 대해서 재발견하고 재창안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멀리 움직이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조합원과 이웃에 대해서 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고정관념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멀리 움직이는 것도 단지 공간의 이동의 차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이 아닌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주는 사실상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한 색다른 재발견을 요구한다.

가족, 친구, 이웃 등에 대한 고정관념은 공동체를 이루는 데 큰 걸림돌이다. 동시에 협동조합의 협동과 연대, 나눔, 우애, 환대를 불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다. 협동조합에서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시작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삶과 실존의 맥락이 드러나게 되고, 우애와 낙관이 어우러진 한 판 난장이 펼쳐진다. 그러나 바쁜 속도사회에서 그러한 국지적인 자리에 대한 관점은 굉장히 희박해져 있는 상황이다. 자본주의문명은 사물, 생명, 인간, 미생물 등에 대해서 뻔하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멀리 떠나고 빨리 움직이는 것이 트렌드에 따르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발신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관심이 희박해져서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사실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의 실존적인 관계를 구성하고 재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산다.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지리감은 물리적인 이동의 관점에서의 공간이 아닌 의미와 가치, 장소감, 로컬리티가 부여된 장소성에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흑림농가에 기반한 ‘뿌리내림의 장소성’과 같이 토착성으로서의 장소성으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즉, 혈연, 지연, 연고, 학벌 등에 따라 뿌리내려진 장소성에 속박된 인간형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뿌리내림의 장소성은 국지적 절대성과 같이 잠재성과 깊이로서의 열린 장소성이 아니다. 폐쇄된 지역사회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 형태로 드러났던 것이 근대적인 이동의 경로였다. 저성장시대를 맞이하여 협동조합이나 생협은 열린 잠재성과 깊이로서의 장소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다양하고 풍부하게 이야기구조를 장소에 담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협동조합이 갖고 있는 깊이와 잠재성으로서의 열린 장소성에 접속하여 풍부하고 다양해졌다는 점을 조합원이나 활동가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장소감은 발견될 뿐만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저성장시대에 협동조합이나 생협 역시도 모빌리티 사회에 대응하여 1일 배송이나 물품배달 시스템의 신속성이나 속도감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이동의 사회 즉, 모빌리티 사회는 결국 소외와 고독, 외로움, 정동의 빈곤, 고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물품을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국지적인 로컬리티와 마을, 공동체, 협동운동을 복원하려는 의도로 물품을 파는 상황에서, 모빌리티 사회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협동운동을 더욱 약화시키는 길일 수밖에 없다. 협동운동은 모빌리티에 대해서 로컬리티로 대응해야 하지만, 그 로컬리티가 고정관념이나 뿌리내림의 장소성, 토착성이 아니라, 훨씬 풍부하고 자유롭고 다양한 깊이와 잠재성으로서의 로컬리티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법을 협동조합과 생협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6. 더불어 가난 : 개인적인 빈곤을 넘어서 공생공락의 가난으로

저성장시대에는 개인이 직면한 빈곤의 상황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소비는 얼어붙고, 사람들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개인은 고립되고 고독하고 외롭다. 특히 개인의 필요와 욕구는 자본주의 문명의 부에 대한 선망과 소비지상주의의 맥락으로 향할 때 더욱 증폭된다. 개인이 직면하는 빈곤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필요와 욕구의 차원에서의 문제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노동은 취약하고 분배는 부족하다. 시민사회에서 요구되고 있는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과 시스템이 하루 빨리 정착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개인이 직면하는 빈곤의 문제가 실질적인 필요와 욕구뿐만 아니라, 관계의 두절과 실종, 소외와 고독, 외로움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로부터 유래된 자기관리, 자기개발, 자기통치 담론은, 개인에 대해서 과도한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개인은 스스로의 빈곤을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도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며, 공공책임, 사회책임 등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와 공공성이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를 요구하고 구성하고 창안해내야 한다.

저성장시대 협동운동의 과정은 ‘더불어 가난’을 창안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탈성장 전략과도 깊게 공명하는 바이다. 즉, 개인에게 떠넘겨진 빈곤의 문제는 끊임없이 해결되어야겠지만, 협동조합 자체는 공생공락의 더불어 가난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보인다. 그것은 관계의 빈곤을 끊임없이 극복하기 위한 협동조합의 공생공락의 가난의 시도여야 할 것이다. 함께 더불어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면서 가난하기 때문에, 더 가난이 부끄럽지 않고 힘들지 않고 강건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가 살아 있는 가운데 우애와 환대, 나눔의 자리를 설립하는 것에 가난이라는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모두가 더불어 가난에 익숙해 있지 않고, 개인적 빈곤을 해결하려 동분서주 나서고 있지만 더 바빠지고 지치고 고독하고 외로워질 뿐이다.

더불어 가난은 우리보다 더 가난하고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발견이자 발명일 수 있다. 작지만 서로 돕고 십시일반으로 거두고 나누는 과정이 여기서 발생할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유하고 화려하고 더 풍족한 삶으로 향하는 시선으로부터 아래를 향한 시선으로의 발상의 전환에 있다. 사실 개인적인 빈곤의 큰 이유 중 하나는 성장주의가 배태한 성공주의, 승리주의, 자기계발 등이 갖고 있는 부유함과 풍족함에 대한 선망에 있다. 필요와 욕구는 해결되어야겠지만, 그 해결책의 많은 부분을 나눔과 연대에서 찾는 것이 바로 더불어 가난으로 향하는 길이다. 소비지상주의, 상품물신주의 등으로부터 벗어나 공동체의 작은 선물과도 같은 물품의 순환을 더불어 가난에 포인트를 맞추어서 빠르게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더욱 적극적으로 소수자, 약자, 생명을 향한 강렬한 흐름을 만들 때, 더불어 가난을 통한 나눔과 연대로 향하는 협동조합의 결사체와 가까워질 수 있는 마음의 행렬이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부유함은 마음의 부유함과 보이지 않는 미학과 윤리의 우아함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은 개인적인 빈곤이 갖고 있는 전락성을 오히려 더불어 가난의 주체성 생산의 계기로 만드는 판과 구도로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사업체의 퇴조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개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떻게 ‘더불어 가난의 전략’을 통해서 탈주로를 설립할 것인가를 실존적인 관계와 배치 속에서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것이다. 저성장시대에 대한 책임을 활동가의 개개인의 잘못이나 기능적인 결함이나 조합원의 결사소비의 부재 때문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개개인의 탓이나 잘못이 아닌,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선상(線上)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 성찰과 계기이자 색다른 실천을 모색할 수 있는 특이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의 결사체는 더욱 더 강렬한 돌봄과 정동, 살림의 활력을 가지고 더불어 가난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정동과 돌봄을 통해서 우아하고 미학적인 더불어 가난으로 향하려는 절실하고 애틋한 살림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 글은 〈2019 한살림 생명협동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