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콜로키움 특집] 동물-되기의 역사적 고찰과 현대적 모색 -『동물되기』 발제

동물-되기는 원시시대부터 현대의 포스트 휴먼 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 왔다. 동물-되기의 역사적 흐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인간의 변신과 재생성 가능성을 모색해 본다. 이 글은 제7회 생태적지혜연구소 콜로키움 《동물과 더불어 삶, 동물되기와 공생명 이야기》에서 정항균 저 『동물되기』(2020, 세창출판사)에 대한 발제문으로 발표되었다.

. 동물되기의 역사적 고찰

원시시대: 증식과 금기 위반으로서의 동물되기

원시시대의 “인간과 동물은 변신을 통해 서로의 정체성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동물처럼 빠르게 많이 증식하기를 바라는 인간은 토템 동물을 숭배하여 토템신앙”(48)을 만들었다. 토테미즘에서 토템 동물을 죽이거나 먹는 것이 금기된 것은 자신과 동일시되는 동물의 보존과 증식을 위한 것이자 동시에 인간 증식과 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한민족의 탄생설화인 마늘과 쑥을 먹은 곰에서 인간이 된 환웅의 이야기(동물의 인간-되기)는 그러한 토테미즘을 반영한다. 동물을 숭상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제의의 형태는 동물로의 변신(인간의 동물-되기)으로도 나타나며, 이는 일종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정항균 저 『동물되기』(2020, 세창출판사)
정항균 저 『동물되기』(2020, 세창출판사)

나아가 구석기 시대의 유목적 수렵사회에서는 샤머니즘의 형태도 있었다. 토테미즘과 달리 샤머니즘은 정령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주술사로서의 샤먼을 필요로 했으며, 또한 토테미즘이 토템동물을 숭상하기에 먹지 않았던 것과 달리 샤머니즘에서는 그러한 금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해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 그러한 샤먼을 통한 제의행위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물을 숭배하는 것과 섭취하는 것이 반드시 모순되었던 것은 아니다. 동물은 인간에게 개별 육신을 먹이로 선사하지만 이 개체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 동물 종의 이데아는 불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춤과 노래의 축제적 제의의식은 죽은 동물들을 되살려내기까지 했다. 샤먼은 동물-어머니의 자손으로 간주되었던 만큼 그들의 동물로의 변신은 다양한 형태로 이뤄질 수 있었다. “새가 되어 천상세계로 날아가거나, 순록이나 황소 혹은 곰이 되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54)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권력으로서의 변신능력과 처벌로서의 동물되기

그리스의 신화에는 다양한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신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동물-되기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즉 한편으로 신은 동물로의 변신을 통해 자신의 전능한 힘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동물로의 변신은 신에 의한 처벌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동물이나 구름으로 변신이 자유로웠던 신과 달리 인간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동물로의 변신이 신적 능력의 일환이었던 것이 이후 인간 자의식의 성장과 함께 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의 존재로 자신을 그러내고자 했다.(ex. 아리스토텔레스) 동물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세 기독교 시대: 악마와 마녀의 변신으로서의 동물되기

동물에 대한 배려가 나타나는 구약성서와 달리 신약성서에서는 동물에 대한 가혹한 행위를 금지하는 어떤 행동도 나타나지 않는다.(ex. 귀신들린 수천의 돼지를 바다에 빠뜨려 죽게 만드는 예수의 이야기) 이렇게 동물의 지위가 낮아짐과 함께 동물로의 변신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변신은 ‘마귀의 유산’이며 이교적 테마였다. 유일신으로서의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은 그가 만든 세계와 인간의 ‘본질적 형상’을 부과한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형상에는 변화가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러한 변화나 변신은 차라리 악마의 능력이었다. “악마는 둔갑에 능하며 그래서 천사나 인간 또는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69) 이때의 변신은 단지 그렇게 ‘나타날 뿐’, 진정한 형태의 변신이 아니며, 따라서 악마가 동물의 육신을 입은 것은 ‘거짓 육신’, ‘가상과 기만’의 산물이다.

악마는 여성(=마녀)을 이용해 자신의 악을 퍼트렸다. 그들에게 “여성은 변덕스럽고 감정에 좌우되기 쉬우며, 비이성적이기 때문”(74)이었다. 여성femina의 어원적 의미—‘fe(믿음)+minus(더 적다)’—는 그러한 생각을 반영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품고 있는 전제이다. 즉 남성이 이성적이고 신앙심이 강하며 일관된 마음을 갖는데 비해 여성은 감정적이고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전제는 여성과 마술을 연결시키는 이유가 되었으며 또한 종교재판에서 마녀가 ‘동물’과 동격으로 취급되어 불태워졌던 이유가 되었다.

이제 동물-되기는 이전과는 현격히 다른 의미를 띠게 되었다. 마녀의 마법으로 인간은 동물이 되지만 그것은 감각적 기만의 결과이며, 거짓과 악의 산물로서의 동물성은 인간이 다스려야 할 어떤 대상이 된다. 동물은 숭배의 존재가 아니라 사유재산으로, 사물로 전락되었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명확히 그어지고 위계는 강화되었다.

근대: 인간중심주의와 동물의 격하, 진화론의 인간중심주의 비판 및 재생산

이렇게 사물로 전락된 동물의 지위는 데카르트의 글을 통해 더욱 확정되었는데,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동물을 기계와 동렬에 놓는다는 점이다. 동물과 기계는 인간과 달리 언어능력을 갖지 않으며, 나아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이성을 결여한 것으로 동격화된다. 동물은 바퀴와 태엽으로 만들어져 동일한 운동을 반복하는 시계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기관의 배치에 따라” 기계적 반복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동물이 가진 “본능”(87)이다. 따라서 자연적 본능에 따라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동물은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대상의 지위만을 갖는데, 인간은 그러한 동물을 포함한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비롯된 인간적 정신과 동물적 신체의 이분법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게 비판되지만, 그들 역시 인간중심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도구화된 존재로서의 동물성의 관념을 완전히 탈피하기는 어려웠다.1

니체는 데카르트의 생각인 신체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전복하고자 했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영혼은 신체에 붙어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 신체는 큰 이성이고 …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작은 이성 역시 신체의 도구일 뿐이다. 즉 그것은 너의 큰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인 것이다.”(96/『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인용) 하지만 이러한 니체의 전복이 아쉬운 것은 그가 미래의 주인공을 동물이 아닌 ‘초인’으로 예고했던 만큼 신체와 동물성의 연관성이나 그것이 가진 변신의 능력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화론은 신학적 세계관이 지닌 인간 및 동물의 ‘본성’이나 ‘원형’의식을 파괴했으며, ‘변신’과 ‘생성’의 잃어버렸던 감각을 복원하는 계기를 주었다. by F. Baycuman 출처 : https://www.freepng.ru/png-cn7brb/
진화론은 신학적 세계관이 지닌 인간 및 동물의 ‘본성’이나 ‘원형’의식을 파괴했으며, ‘변신’과 ‘생성’의 잃어버렸던 감각을 복원하는 계기를 주었다.
사진 출처 : F. Baycuman

근대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동물을 삶의 주변부로 밀어내던 만큼, 인간을 동물과 구별 및 대조시켜야 할 필요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심지어 계몽주의자들과 백과전서파들은 동물을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유지하긴 했지만 동물에 대한 ‘관대한 사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변화된 상황을 반영했다. 이는 19C에 접어들어 가축학대 반대법안이 통과되는 등 동물보호나 동물애호의 관점이 조금씩 강화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이 ‘사유재산’의 틀을 벗어났던 것은 아니며, 그만큼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나 ‘인간의 동물-되기’의 관점이 자리잡기는 어려웠다. 칸트나 헤겔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 그러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데, 그들에게 인간의 특성은 동물과 구별되는 자기지시성이나 ‘자유로운 의지’에 있으며, 그만큼 인간-동물의 위계는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근대의 인간이해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지으면서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 법적 틀을 마련하는 기초였다는 점이다. 인간과 동물 간의 상호적 변신의 가능성은 단 하나의 통일된 주체성으로서의 인간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였다. 중세가 그런 가능성에 악마로의 낙인이나 마녀사냥으로 응답했다면, 근대는 통일된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정신병원’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근대에는 또 다른 전통도 있는데, 그것은 중세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설에 맞서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그것이 가진 악명들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신학적 세계관이 지닌 인간 및 동물의 ‘본성’이나 ‘원형’의식을 파괴했으며, 그만큼 ‘변신’과 ‘생성’의 잃어버렸던 감각을 복원하는 계기를 주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역사의 발전에 대한 근대적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인간과 생명체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반영했다. 물론 이때의 진보를 무엇으로 보아야 할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고 또한 그가 인간을 자연에서 가장 고등한 동물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자연선택’ 개념은 자연을 대상화하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을 현격히 약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진화론의 ‘적자생존’ 개념이 생존경쟁을 강조하고 각 종들의 이기적 측면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그의 다른 책인 『인간의 기원』에서는 “인간을 비롯한 많은 사회적 동물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먹이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서로 협력할 필요성을 통해 공감 같은 이타적 본능을 발전”시키며, “종을 초월한 동물들의 공감능력과 이타적 행위”(112-113)가 언급된다는 점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고 떼어놓았던 근대적 의식 안에서 인간과 동물의 친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의 선회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더 나아가 “유기체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며, 그 안에 근원적 약동으로서의 생명이 내포되어 있음”(116)을 강조하는 ‘창조적 진화론’을 선보인 바 있다. 그에게 ‘원초적 약동’은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폭발적으로 분기되는 생명의 추진력을 의미한다. 또한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이 외부환경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아 구조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화 환경의 상호작용(‘섭동’) 속에서 ‘개체의 구조’가 결정되는 ‘구성주의적 진화론’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만큼 생명은 자율성을 갖게 되고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진화의 가능성으로 그려진다. “생명은 방황하고, 떠돌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최적의 구조접속의 수준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계통적 진화의 자율성이 존재하게 된다.”(118/『구성주의와 자율성』 인용) 나아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계통을 상상된 허구로 간주하며 혈통 내지 계통에 따른 진화”를 부정하면서, 더욱 급진적인 관점의 진화론을 전개한다. 그들에게 진화는 계통적이거나 유전적인 것이 아닌 ‘소통적이거나 전염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즉 그들의 진화는 “어떤 이질적인 것들이 연관을 맺는 결연”(121)을 의미하며, 이는 덜 분화된 상태를 향하는 퇴행이나 퇴화가 아닌 기존의 항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생성을 이뤄내는 ‘역행’적 진화로서, 이때의 동물-되기는 “항상 변화하고 생성하는 다양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에게 잠재해있는 특이성으로 변신”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것은 “중심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장자리로 가서 경계를 넘어서며 새롭게 자신을 창조하고 생성하는 것”(122)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술적 수단을 사용해’ 인간 자신의 자기발전이 능동적인 형태로 이뤄질 수 있는 ‘사이버네틱스 진화론’도 있다. 이들의 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에 의한 인간의 진화를 설명”하는 것과 달리, “이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 입장”(125)에서 진화를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자연이 이제 인간진화의 절대적 요소가 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진화, 즉 ‘인간의 기계화’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에 일어날 인간의 진화는 기술공학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틀로 이해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근대적인 형태의 다윈의 진화론이 베르그송, 마투라나․바렐라, 들뢰즈․가타리 등의 진화론으로 발전되었으며, 그 최종형태가 현재의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이버네틱스 진화론’으로 나타난다고 보지만, 베르그송에서 들뢰즈․가타리로 이어지는 진화론의 발전과 달리 ‘사이버네틱스 진화론’에는 여전히 근대적 인간주의의 잔상이 남아있음을 확인한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따르면, 오직 인간만이 스스로를 넘어서고 개선하려는 열망을 지니기 때문에”, “동물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결정되며 어쩌면 인간을 위해 결정될지도 모른다. … 인간과 동물 간의 위계 및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트랜스휴머니즘 사상에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126)고 말이다.

. 동물되기의 현대적 모색

그렇다면 오늘날 동물-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면서도 진화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동물-되기, 오늘날의 사이버네틱스 사회에서의 동물-되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위해 정항균은 현대의 동물-되기의 이론(가)들을 검토하는데, 여기에는 프로이트를 포함한 정신분석학, 들뢰즈․가타리(그리고 신승철)의 소수자 정치,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부정적 의미의 동물-되기), 아감벤의 부정적 변신에서 브라이도티의 긍정적 변신에 이르는 조에를 둘러싼 담론, 그리고 사이버네틱스이론과 포스트휴먼 담론(캐서린 헤일스, 장회익, 가타리 등)에서의 기계-되기와 동물-되기가 검토된다.

꿈과 현실에서의 동물되기

프로이트(『꼬마 한스와 도라』)의 꿈과 무의식에서의 동물-되기. 어린 신경증환자 한스의 ‘나는 새끼 말이야’에서 말은 한스의 억압된 운동욕구와 성적욕망을 반영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도식을 적용해, 그의 엄마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에 의해 가로막히고 그것이 거세공포(‘말이 나를 물려고 한다’)의 상징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한스가 말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아버지를 깨물려고 할 때, 그의 말-되기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욕망과 동일시의 욕망을 반영한다. 말은 한스의 무의식 속에서 각각 욕망의 주체(한스 자신), 거세의 주체(아버지), 분만의 주체(어머니)로 변신하며 자리를 옮겨다닌다. 정신분석가로서의 프로이트는 그러한 말-되기를 지켜보며 진단을 내리는 신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이 다양한 변신의 형태를 띰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가족적 정체성을 확정시키는 되기만이 있다. 즉 ‘어린 말로서의 한스, 무는 말로서의 아버지, 어린 말을 분만한 어미말이자 마차에 짐을 싣고 쓰러지는 어머니’에서 말은 특정한 인간관계를 지시하기 위한 상징의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가족구도를 강화하기 위해 동원된 상징으로서의 ‘말-되기’. “이러한 변신은 오로지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이루어질 뿐이며, 그것의 의미는 완전히 재현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로이트에게서 동물-되기는 진정한 생성이 아니라, 무언가를 표상하기 위한 기호적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131)

이러한 프로이트의 해석에 맞서 들뢰즈․가타리는 한스의 ‘말’은 결코 누군가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스 자신의 말-되기를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동물-되기의 방식들은 꿈도 환상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실재적이다. 하지만 대체 거기서 다루어지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동물-되기의 본질이 동물 역할을 하거나 그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실제로’ 동물이 되거나 동물이 ‘실제로’ 무언가 다른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되기’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산할 뿐이다.”(132/『천개의 고원』 인용) 그렇다면 모방도, 주술도, 환상도, 상징도 아닌 동물-되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변신시키면서 스스로를 생산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자기 생산은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즉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나의 다른 것 되기’, 나를 버리고 말-무리가 되기, 나아가 계속해서 다른 무엇인가가 되기와 같은 차이에 열려 있는 자기조직화를 의미한다. 나는 어떻게 다른 것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기에게 부여되어 있는 중심기표(가족 안에서의 아이의 위치, 인간성, 정체성 등)를 거부함으로써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변신의 가능성을 열어낼 때에 가능하다. 자아이자 인간으로서의 나를, ‘특이한 존재로 만드는 이러한 과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것과의 접촉’이다.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면서 그 안에 생명현상을 이루어낼 이 전체 체계를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by pxhere 출처 : https://pxhere.com/ko/photo/923988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면서 그 안에 생명현상을 이루어낼 이 전체 체계를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사진 출처 : pxhere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타리에게 동물-되기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무너지고 양자가 비식별영역으로 들어가면서 인간이 강렬하게 스스로를 동물로 느끼는 것”(134)을 의미한다. 이때 ‘느낀다는 것’은 나를 중심에 두고 어떠한 변경도 없이 가만히 정주하는 것으로는 발생되지 않는 능력, 즉 정동능력, 변용능력을 의미한다. 자기로부터 빠져나와 나와 다른 것과의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그 사이에서 나를 변신시켰을 때에만 이 능력은 발생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몸은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생성의 역량에 의해 강렬한 변용을 만들어내는 변용 능력들의 집합”(136)이다. 항과 항의 만남 속에서 그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변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정동/변용 능력이며, 이를 통해 항과 항의 관계는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면서 상호적 되기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배치의 형성은 정치적 함의 역시 갖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 새로운 배치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이항구조를 만들어 내는 다수자인 남성, 백인, 인간, 어른의 권력구조 하에서 비대칭적 위치를 차지하는 항”으로서의 소수자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동물-되기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고 위계적인 이항구조를 지닌 다수의 권력구조를 뒤흔드는 전복적인 정치적 성격을 지님으로써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공격한다.”(142)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변경시킬 것이다. 동물 역시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동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자신의 종 내에서 혹은 종간 차이를 극복하면서 서로 관계맺고 교감할 수 있는 아주 능동적인 정서의 원천을 의미할 수도 있다. … 동물은 환경결정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변 환경에 반응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자율적인 행동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신체나 정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체이다.”(143/『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 인용)

들뢰즈․가타리는 다수자의 소수자-되기는 있어도 소수자의 다수자-되기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되기는 기존의 배치와 지위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동물-되기보다 소수자로서의 동물의 동물-되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소수자 동물의 동물-되기는 다수자인 인간이 이항구조를 허물고 동물-되기를 수행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소수자-되기의 추구는 다수자 중심의 정치를 뒤흔드는 전복성을 지닌다. 소수자로서의 동물-되기는 동물이 더 이상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열등한 존재, 즉 구경거리나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다양한 변용 능력을 지닌 생명체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괴물의 역사와 인간의 동물되기

부정적 동물되기. 우리는 지난 19-20세기 동안 인간을 동물이나 괴물로 바라보면서 구경거리 삼은 ‘인종 전시’의 끔찍함을 알고 있으며, 그로부터 또한 ‘동물원’과 ‘식물원’이 생겨났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물원의 울타리를 통해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구분하면서, 인간은 동물을 자신과 완전히 구분되는 타자로 설정할 수 있었고, 동시에 이를 통해 근대적 인간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간은 동물적 속성을 완전히 버린 채 동물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151-152) 인종전시는 인간을 동물로 보면서 구경거리로 만드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역시 하나의 동물-되기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인종차별주의는 2차 대전의 수용소 속에서 가장 극대화되어 나타났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두고 어떠한 감정도 갖지 않으면서 무감하게 인간을 학살하는 자의 동물성을 본 바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그들은 평범한 자들이었으며 ‘사유하지 않음’이라는 의미에서 ‘동물적’이었다. 짐승이자 괴물이 된 평범한 인간.

조에 차별주의에서 조에 평등주의로: 부정적 변신에서 긍정적 변신으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전체주의가 어떻게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을 제거하고 단순한 생명체로서의 조에를 만들어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것은 노예이자 동물이며,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추방된 자들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나치수용소의 ‘무젤만’(무슬림처럼 계속 엎어져 절을 한다는 의미로, 극한의 기아상태에서 혼이 나간 채 고개를 꾸벅거리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지시한다. 유대인에게 무슬림같다는 말이 주는 모욕과는 별개로 이 용어는 수용소에 함께 있던 유대인들이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고 마음을 다잡기 위한 용도로 유대인 자신이 쓴 말이기도 했다)들은 사실 부정적인 의미의 동물-되기보다 오히려 식물-되기에 더 가까웠다. “강제수용소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미 인간의 동물로의 변신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나치 강제수용서로 가는 기차에는 사람들이 가축처럼 빼곡히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차 자체가 가축 운송용 화물차이기 때문이다. … 모든 외적인 동물적 기능을 상실한 채 혈액순환, 호흡, 동화작용과 배설 같은 유기체적 기능만을 보존한 살아있는 시체인 무젤만은 말 그대로 식물인간이다.”(163)

하지만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통해 생성적 활력이 없이 주권권력에 의해 죽어가는 인간주체를 보여준 것에는 어떠한 삶의 희망이나 실천적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 사회문화적 생명성을 이어가는 비오스와 구별되는 죽어가는 생명에 가까운 조에 개념(‘조에 차별주의’)과는 다른 ‘긍정적이고 활력적인 조에’ 개념은 없는가? 브라이도티의 사유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보기에 인간의 자아가 언어를 통해 다른 타자들과 소통하는 존재라면, 인간 이외의 타자들 역시 자기조직적인 힘을 가진다. “비오스란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조에 역시 단순한 생명 이상의 기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문화의 영역에만 속하는 존재가 아니며, 그렇다고 자연에 귀속되는 존재도 아닌, ‘자연과 문화의 연속체’로 기능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조에 개념은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 너머의 비인간 존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이러한 ‘조에 평등주의’는 기존의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면서도 부정적인 의미의 동물-되기를 극복할 단초를 제공해준다.

물론 이런 식의 평등주의가 역으로 무수한 다양성과 존재론적 차이를 가진 비인간존재를 ‘동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고, 그래서 각각의 존재들이 가진 종적 다양성뿐 아니라, 개체적 다양성의 문제를 간과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차이 개념이 인간과 동물을 본성적으로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도록 소통과 감정적 교감의 측면에서 생명체를 바라보고, 나아가 그것을 통해 인간-동물-기계의 경계가 확고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 종류의 존재가 모두 서로 관계 맺으면서 상호침투될 가능성을 남겨두는 데 있다는 점에서 ‘통일되고 동일하고 닫힌 조에’ 개념과는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인간은 결코 생물학적으로 죽고 나서야 자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며, 늘 새로운 만남과 감응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에서 해방을 위해 낡고 고정된 것의 죽음을 경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동물-되기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에 의해 억압되어 온 동물적인 강도(또는 강렬함)들로 실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생명에너지로서의 강도에 대한 접근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다.”(170) 우리가 낯선 외국어를 말할 때 벌어지는 일을 생각해보라. 입에 붙지 않은 어떤 말을 발화할 때 우리는 마치 동물적인 소리를 내듯 새로운 악센트를 부여하거나 웅얼거리면서 새로운 진동을 표현하는 장에 들어간다. “외국어, 즉 ‘낯선 혀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조류학자인 동시에 새이다.’ 즉 악센트를 가지고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동시에 노래를 하는 셈인데, 이로써 그는 노래하듯 말하고 말하듯 노래하는 새를 관찰하고 모방하는 조류학자를 넘어 새 자체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동물-되기는 인간에게 숨겨진 신체적 비밀을 드러내며, 동물과의 경계를 허묾으로써 인간의 주체성을 확장하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173)

포스트휴먼 시대의 동물되기와 기계되기

그렇다면 이러한 동물-되기가 미래에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이성과 몸의 분리에 대한 비판은 동물에 대한 평가를 변경시킨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동물성을 지니고 있음이 강조될 수 있다. 즉 동물은 인간 외부의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 내부의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는 통상 ‘욕망하는 기계’로 알려진 접속과 절단의 신체성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욕망하는 기계는 유기적인 신체를 갈기갈기 찢고 절단하며 조각난 신체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절단을 통해 기계적 배치를 바꿈으로써 매번 새로운 주체성과 의미가 만들어질 수 있는 변신과 생성의 기회가 열리게 된다.”(179)

베르그송의 ‘지속으로서의 생명’이나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 장회익의 ‘온생명론’, 가타리의 ‘기계적 배치’ 개념 등은 공통적으로 생명이나 동물 개념을 개체적 수준으로 파악하지 않고 생태계나 생명권과 같이 상호관계의 망 속에서 이해한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장회익은 “유기체로서의 개별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면서 그 안에 생명현상을 이루어낼 이 전체 체계를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해 ‘온생명’이라고 부른다. 온생명은 개체로서의 낱생명과 그것의 나머지 부분, 즉 이러한 낱생명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외부적 조건인 보생명을 포괄하는 개념이다.”(188) 온생명 개념은 외부의 도움 없이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자기생성적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기계 역시 인간의 생존을 돕고 그의 인식과 판단력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생명 시스템 내에 들어올 수 있다.

바렐라나 가타리 역시 기계와 생명체를 명확히 구분하는 입장과 거리를 두면서 양자의 공통적 속성에 주목한다. 근본적으로 모든 생명과 사물, 상황이 그 구성요소들이 서로 맺고 있는 배치와 관계망에 의해 기계 개념에 포함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가타리는 이러한 관점을 더욱 확장시켜 기술기계 역시 이러한 배치(온생명, 생명의 자기조직화) 속에서 자기 생산성을 지니며 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생명과 동물의 개념은 그것의 개체적 차원이나 종적 차원을 넘어서 그것들을 구성하는 공동체나 생태계, 연결망의 차원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명이나 기계 개념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기계-되기와 동물-되기가 만날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기생산적이고 자기조직적인 생명력 있는 에너지를 ‘거대한 동물’ 또는 ‘우주적 기계’라고 부른 바 있다.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인간에 의해 항상 같은 방식으로 의미화되고 계열화되었던 것들이 그 의미화에서 벗어나 감각적이고 신체적 양상을 표출할 때 인간은 동물-되기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주체성 발산과정, 즉 동물-되기는 기술기계에도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브라이도티가 ‘거대한 기계동물’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그것은 분자적인 차원에서 움직이는 생명에너지들의 자기변신을 전제하는 것이다. 기계-되기와 동물-되기는 그런 점에서 미리 선재한 본성을 전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적지향적 기능주의와도 대립한다. 다양하게 배치를 바꿀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기계-동물-되기는 생명과 변화의 생명력의 자기표현인 것이다.


  1. 정항균은 스피노자 역시 데카르트와 다르지 않은 인간중심주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통합한 스피노자는 동물에 감정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동물의 감정과 인간의 감정은 다르며 양자가 본성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동물의 도살을 금하는 그 규정이 건전한 이성보다 오히려 근거 없는 미신과 여성적인 동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고려하고 동물을 마음대로 이용하며 또한 우리에게 가장 편리하도록 그것들을 다루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는 자연에서 인간과 교류하며 우정 어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인간이 동물을 비롯한 다른 개체의 보존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88-89) 그는 스피노자와 달리 라이프니츠에게서는 인간의 동물-되기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동물이나 인간 모두 영혼을 지닌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신의 피조물로서 이들이 가진 공통점을 강조한다. …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가 모든 신체의 변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89-91) 라이프니츠가 여전히 신학적 맥락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에 그러한 변신은 “신이 정한 자연적 법칙에 따라”(93) 이뤄지는 타율적인 변신에 불과하지만, 동물 모나드가 지배 모나드인 이성적 정신의 소유와 포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인간의 동물-되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95)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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