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콜로키움 특집]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지구에는 인간 외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동물과의 공존의 문화에 문제는 없는가? 그리고 왜 지금 이 질문이 인간에게 필요한가? 이 글은 제7회 생태적지혜연구소 콜로키움 《동물과 더불어 삶, 동물되기와 공생명 이야기》에서 박종무 저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2021, 리수)에 대한 발제문으로 발표되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많은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많은 생명들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특히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들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우리 주변의 다양한 동물들

먼저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동물들을 살펴본다. 1,500만 명이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할 만큼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동물에 대한 인식도 많이 변화되어 7월 19일 ‘동물은 사물이 아니다’라고 민법을 개정하겠다고 예고했다. 대부분의 반려동물들은 보살핌을 받으며 키워지지만 버려지거나 학대당하는 반려동물 또한 적지 않다. 한해 평균 13만 마리 가까이 버려지고 있고 이 중 절반가량은 10여일 만에 죽음을 맞고 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도시에서 내몰리고 유일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네발달린 동물은 길고양이다. 길고양이에 대한 학대는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또 다른 동물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은 동물원이다. 서울대공원과 같이 전시동물의 복지가 제공되는 곳도 있지만 많은 동물원의 동물들은 좁은 공간에 갇혀 전시되고 있다. 그래서 같은 장소를 맴돌거나 머리를 흔드는 등 무의미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정형행동을 하는 전시동물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용되어지는 동물로 실험동물이 있다. 실험동물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지며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동물실험의 효용성과 고통에 대한 논란으로 동물실험을 줄여야 한다는 논의들이 있지만 실제로 동물실험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가축들이 있다. 이 가축들은 생산성 향상을 이유로 공장식 축산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닭은 용도에 따라 육계와 산란계로 구분되며 최근 육계는 32일만에 도축이 되며 산란계용 닭들은 부화되자마자 수평아리는 성감별되어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암평아리는 좁은 닭장에 4~5마리가 갇혀 사육된다. 좁은 곳에 갇혀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곁의 닭을 쪼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병아리 때 부리를 잘라버린다. 돼지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좁은 곳에 밀집 사육을 하는데 이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 옆을 돼지를 물어뜯는 데 이를 막기 위해 태어나서 며칠 되지 않아 송곳니를 잘라버린다. 어미 돼지는 끊임없이 임신을 강요당하고 그 스트레스로 새끼를 죽이지 못하도록 스톨에 갇혀서 새끼를 돌본다.

동물이라는 생명은 다양한 인간의 목적을 위해 고통을 당하다 죽음을 맞는다. 철저히 수단으로 쓰여질 뿐이다. 다른 영역의 동물들도 마찬가지지만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가축을 대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일말의 존중이 없이 철저히 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010년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구제역 양성 판정을 받은 가축은 153마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이유로 인근 농장에서 사육되던 가축까지 포함하여 350만 마리 가까운 가축들이 살처분을 당했다. 이러한 가축 살처분 행위는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살처분 행위가 가축전염병 예방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구제역의 폐사율은 5% 미만으로 열악한 사육환경으로 인해 평상시 20% 가까운 폐사율이 발생하는 축산 환경을 고려했을 때 심각한 전염병이 아니다. 또 지금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감염되지만 그들에 대해 전염병 목적으로 안락사와 같은 방역 조치는 결코 취하지 않는다. 가축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가축을 대량 도살하는 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또 동물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대하도록 하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동물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가 당면한 기후 위기와 생태계 위기,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기에 이 두 가지를 좀 더 깊게 살펴본다.

질소를 고정하는 하버보슈 공법과 공장식 축산

하버-보슈 공법을 이용한 화학비료의 등장은 곡물의 과잉생산을 낳았다. 과잉생산된 곡물은 누군가 먹어야만 했다. by freestocks.org 출처 : https://www.pexels.com/ko-kr/photo/69170/
하버-보슈 공법을 이용한 화학비료의 등장은 곡물의 과잉생산을 낳았다. 과잉생산된 곡물은 누군가 먹어야만 했다.
사진 출처 : freestocks.org

과거 농촌에서는 역축으로 사용하는 한두 마리의 소와 몇 마리의 돼지 그리고 닭을 사육하였다. 그렇게 사육하던 형태가 지금과 같은 공장식축산으로 전환된 것은 세계적 정치경제적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먼저 16-18세기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확고해졌다. 자본주의는 이윤의 획득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는 경제 체제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생산을 확대한다. 이러한 경제 체제 하에 농축산환경의 변화를 촉진시킨 것은 프리츠 하버의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하는 하버-보슈 공법의 발명이다. 전통적으로 농부들은 농업 부산물을 퇴비로 만들어 순환시킴으로써 지력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하버-보슈 공법을 이용해 만든 암모늄 화합물로 인공적인 비료가 생산됨으로 인해 토지는 자체 순환을 초과하는 농작물을 과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작물의 과잉 생산은 곡물 가격을 하락시켰고 이는 더 많은 작물을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또 과잉 생산을 유발하여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과잉 생산된 곡물은 농업 공황을 유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위험 요소를 해소하기 위하여 1954년에 농산물 무역 촉진 원조법 PL480호를 제정하여 잉여농산물을 제3세계에 전가하였으며, 이렇게 제공된 잉여농산물은 제3세계의 농업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붕괴시켰다. 미국 내에서 낮은 가격에 과잉 생산된 옥수수와 대두는 새로운 소비처를 찾아야 했고, 새로운 시장은 가축의 사료였다. 목초지에서 사육되던 소들은 좁은 축사에 갇혀 사육되었으며 가축을 방목하여 키우는 농가들은 가격 경쟁력 밀려 파산하였다.

미국에서의 이러한 농업의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 또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1955년 체결된 PL480호에 의거한 대량의 밀, 면화, 옥수수 등 잉여 농산물의 수입은 대체할 수 있는 저가의 곡물이 수입됨으로 인하여 주곡이었던 쌀농사를 비롯한 밭작물들이 낮은 가격을 강요받게 되었다. 또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생산비 이하의 낮은 곡물가의 강요와 농산물 수입 개방으로 인하여 농민들은 생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지속적으로 이농 현상이 벌어져 1960년대 70%에 이르던 농업 종사자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1980년에는 28.9%에 이르렀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농민들에게 농업 외 수입원으로서 축산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축산업은 우리나라 환경에 적합한 산업이 아니었다. 먼저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많은 면적이 산지로 되어 있어 축산에 활용할 만한 초지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가축에게 먹일 사료가 생산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현재의 축산은 전적으로 외국에서 수입된 사료에 의존하고 있다. 다양한 보조금을 받은 생산비 이하의 저가 곡물을 공급받아 생산되는 외국의 축산 농가와 외국에서 수입된 사료를 먹여 사육하는 국내의 축산 농가는 처음부터 가격 경쟁이 되지 않는 구조였다. 따라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고정적인 사료비, 인건비, 토지 임대료 등을 제외하고 외국 농가와 가격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좁은 공간에 더 많은 개체수를 사육하는 공장식 축산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햇볕 한번 제대로 쬘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밀집 사육 축산은 가축의 면역력을 저하시켜 전염성 질환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다윈의 진화론과 인간중심주의

다음으로 동물을 인간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것을 용인하도록 만든 배경으로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생명에 대한 평가를 인간중심적으로 하는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모두 뿌리가 깊지만 서양이 좀 더 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으며, 데카르트는 동물을 비롯한 자연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며 인간이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다. 그에 비해 벤덤에 이르러 고통 받는 존재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격적으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을 동물까지 확장한 철학자로는 피터 싱어와 톰 리건이 있다. 싱어는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서, 리건은 ‘삶의 주체’로서 동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소위 하등동물이나 식물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시키는 한계를 안고 있다. 그들 또한 인간 중심주의의 변형인 생명을 동물 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 우리 인류가 당면한 기후 위기와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데 한계를 갖는다. 2019년 UN은 50만~100만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발표했다. 고등동물만 우리가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면 이들 대부분의 멸종 위기에 처한 생명들에게 우리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2050년 인류는 100억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구는 인간만으로 가득찬 행성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by Nicholas Green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nPz8akkUmDI
2050년 인류는 100억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구는 인간만으로 가득찬 행성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Nicholas Green

이러한 사고는 너무나 뿌리 깊게 생명을 인간 중심적이고 위계적이며 개체로 생명을 판단하는 생명관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이런 경향에 다윈의 진화론은 큰 영향을 끼쳤다. 다윈은 생명이 진화되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생명의 이해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생명을 상호 경쟁적이고 또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로 이해함으로 인해 생명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켰다. 생명은 때로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공존한다. 진화 자체가 홀로 생존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아니라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생물이 공진화이다. 그렇기에 생명은 개체로 보이지만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며 다양한 생명체가 다차원적으로 공진화하고 공생하는 생명공동체인 공생명인 것이다. 그렇기에 유기체에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감염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며 그 자체가 생명의 역동적인 모습이다. 생명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러한 상호적응의 시간을 거쳐 동적 평형을 이루어왔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사태는 유기체와 바이러스가 유지하고 있던 상호적응의 관계를 인간의 행위가 교란시킴으로써 발생한 문제이다.

생명의 관계를 인간 중심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로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는 인간 행위의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프리츠 하버가 질소를 고정하는 방법을 발명한 후 사람들은 그가 인류의 복지를 증진했다며 환호하면서 노벨상을 수여하였다. 생산된 화학비료는 곡물생산량을 증가시켜 인류의 기아 문제에 도움을 주는 듯 했다. 하지만 20억 명에 불과하던 인구는 90여년 만에 78억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늘어난 인구는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소비하였으며 기후위기를 가속화시켰다. 이렇게 상태가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인간중심적 사고는 문제의 본질을 깨닫기 보다는 2050년경 인류가 100억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며 그 때를 대비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2050년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의 인구 폭증의 문제를 식량 증산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초국적 석유화학 산업계와 곡물축산업계가 원하는 바이며 지금의 문제를 미래세대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또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는 부합할지 모르지만 자연을 그만큼 빠른 속도로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성장에 대한 맹목적 환상은 정말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또 그러한 경향 속에서 소비되어지는 동물과 자연의 무수한 생명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되었다.

양육강식이 아닌 공생으로 바라보는 세계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 인류가 우월한 존재여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존가능한 것은 지구 생태계의 순환을 담당하고 있는 세균을 비롯한 분해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식물 그리고 동물이 이루고 있는 다차원적인 생태계 덕분이다. 그 생태계는 35억년의 생명의 역사를 통하여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진화 되어져 왔다. 그 속에 바이러스도 포함되며 바이러스는 다른 유기체를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상호적응 되어져 왔다. 또 생명은 때로 경쟁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공생하여 왔다. 약육강식이 생명의 기본적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인간 사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대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많은 문제는 우리 인류의 문제이다. 기후위기와 생태계 위기를 눈앞에 둔 우리는 우리 인류의 행위가 자연의 생명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좀 더 깊이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박종무

지구 생명의 근원은 해님이라고 믿는 생태주의자. 해님의 에너지를 받는 지구 모든 생태 구성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희망한다. 특히 동물들이 생태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아픈 동물을 치료하고 동물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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