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살리는 구조 신호와 노동절

노동자들에게 기후위기는 먼 문제가 아니다. 기업과 정부에만 기후위기 대응을 맡겨놓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을 잇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기후위기는 노동과 환경 사이의 끊어진 매듭을 다시 이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2021년 노동절을 달력에서 확인해보니 토요일이다. 법으로 정한 유급휴일이지만 주 5일 근무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쉬는 날 하루가 아쉽게 되었다. 한국에서 월급이나 시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 대다수에게 노동절은 주로 이런 측면에서 관심이 되겠지만 이날의 시작이 상당히 진지했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총파업이 일어났고, 경찰의 발포와 조작으로 희생당했던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날이기 때문이다. 제2인터내셔널이 1889년에 이날을 처음으로 노동절로 선포했다. 5월 1일에는 해방 정국에서도 노동자와 좌파 조직들에 의해 큰 기념식이 치러졌지만 이승만 정권이 이를 ‘근로자의 날’로 대체한 이래 다시 노동절의 날짜와 이름을 되찾은 것은 1994년에 와서였다.

노동절은 5월의 첫날이기에 영어로는 ‘메이 데이(May Day)’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를 국제적으로 공용되는 구조요청 신호인 ‘메이데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단어를 붙이고 띄어 쓰는 차이지만, 사실 전혀 다르다. 구조 신호는 메이데이를 세 번 연속으로 붙여 사용하며, 어원도 실은 영어가 아니라 불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를 오고 가던 항공편의 무선사가 혼동없이 함께 쓸 수 있는 단어를 제안한 것인데, ‘나를 도와달라(m’aider)’는 불어와 비슷한 영어 발음으로 ‘Mayday’라고 표기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어원이야 어쨌듯 간에, 고통과 위기 상황에 처한 한국의 취약 노동자들이 외치는 절절한 구조 신호로서 “메이데이=메이 데이”로 해석할 만도 했던 것이다.

1987년 민주항쟁과 7, 8, 9월 노동자대투쟁 이래 많은 민주노조가 생겨났고 한국 노동자들의 조건도 그때와는 다르게 되었다. 물론 1970년대와 80년대의 군부독재 하에서도 지난한 투쟁을 이어온 개인과 조직들이 있었지만, 1987년에도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 구호였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던 게 사실이다. 노동자들의 급여와 처우가 급격히 개선되었고, 여전히 충분치는 않지만 법정 최저임금도 시나브로 올랐고 양대 노총을 합하여 1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노동조합의 우산 아래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노동조합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많아졌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주장이 노동조합 내부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고, 원청과 하청 노동자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와 갈등도 심각하다. 생활 조건이 개선된 것에 비례하여 개인주의화되고 물질적 생활수준의 유지에 몰두하게 된 노동자들의 보수화도 지적된다. 급변하는 사회에 둔감하거나 변화의 요구에 오히려 역행하는 노동조합의 관성은 노동자들을 민주주의 전위 투사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공룡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후위기 대응과 여기에 요구되는 도전에 아직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모습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제조업 노동자 295만 명 중 온실가스 다배출 분야에 종사하는 1백만 명 가까운 노동자가 정의로운 전환의 잠재적 대상이 될 것이라고 추산한다. 
by Josue Isai Ramos Figueroa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qvBYnMuNJ9A
제조업 노동자 295만 명 중 온실가스 다배출 분야에 종사하는 1백만 명 가까운 노동자가 정의로운 전환의 잠재적 대상이 될 것이라고 추산한다.
사진 출처 : Josue Isai Ramos Figueroa

그런데 한국의 노동자와 노동조합들에게 기후변화, 그리고 그 대응에 수반되는 산업과 일자리의 변화는 굶어죽는 북극곰만큼 먼 문제가 아니다. 인권학자 조효제 교수가 최근 출간하여 주목받고 있는 󰡔탄소 사회의 종말󰡕은 기후변화를 구체적인 인간이 겪는 고통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문제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이 책에는 이러한 인간 사이의 문제로서 노동자와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주제도 등장한다. 조효제 교수는 산업연구원의 한 조사를 인용하며, 2017년 기준으로 제조업 노동자 295만명 중 석유화학, 자동차, 정유, 플라스틱, 시멘트, 철강, 조선 등 온실가스 다배출 분야에 종사하는 84만명, 그리고 핵산업과 화력발전산업 등을 합하여 거의 1백만 명 가까운 노동자가 정의로운 전환의 잠재적 대상이 될 것이라고 추산한다. 축산업 농가를 제외하고도 그렇다.

물론 이 숫자는 잘 따져봐야 한다. 내가 왜 전환의 대상인가 하고 억울해 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정의로운 전환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일방적 구조조정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을 것이다. 축산농가 뿐 아니라 메탄 배출량이 많은 쌀농사 농민을 포함할 것인가도 문제다. 그런데 사실 어느 분야나 사업장이 전환의 대상에 들어가고 말고 하는 것 뿐 아니라, 더 중요한 문제는 ‘대상’이라는 규정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상은 객체, 즉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와 동사에 자신을 내맡긴 목적어다. 북극곰과 기후난민 뿐 아니라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도 기후변화 대응과 일자리 전환은 필연적이다. 그것을 기업과 정부에 맡겨 두고 고용과 처우에 구체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관점과 요구를 가지고 독자적인 또는 공동의 구상과 대응을 할 것인가 하는 선택지가 있는 것이다. 가만히 기다리거나 방관하고 있으면 ‘대상’이 되고, 그 다음에는 방어와 보상 요구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단지 대상이 아니고자 한다면 스스로 주어가 되고 동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조효제 교수는 노동운동 뿐 아니라 환경운동, 시민운동, 인권운동을 잇는 정의로운 전환을 제안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의 양대 축이라고 하는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적응’의 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온실가스 감축과 사회 불평등 감축을 함께 달성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과 녹색사회로의 적응을 함께 추진하는 ‘이중 감축과 이중 적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큰 사회적 메시지와 동력이 요구될 일이다. 기존 산업의 정의로운 전환 뿐 아니라 어떤 생산과 어떤 노동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필요할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기반으로서 노동자의 이중의 의미에서의 자유, 즉 신분상의 자유와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를 말했다면, 이제 ‘노동해방’도 이중의 의미에서의 해방이 요청될 것도 같다. 노동자 개인에게 의미를 갖지 못하는 지루하고 고역스러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지구와 노동자 및 지역사회에게 모두 해로운 지속가능하지 못한 생산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말이다. 더 적은 노동시간, 양적 성장이 아닌 성숙과 나눔을 위한 경제, 이를 뒷받침할 소득 보장 모두가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의 화두와 요구가 충분히 될 수 있는 때다.

실은 역사 속에서 노동조합의 출발도 그런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자본의 채찍 앞에서 스스로의 삶을 지키려는 지역사회와 공동체의 조직이었고, 생계와 환경을 함께 지키는 조직이었다. 서구에서든 한국에서든 노동조합, 협동조합, 환경운동 조직은 별개가 아니었다. 운동의 분화와 전문화 속에 그리고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 깊어진 각자의 구획 속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다. 기후위기의 시대는 노동과 환경 그리고 노동자와 가깝고 먼 이웃 사이에서 끊어졌던 매듭이 다시 이어질 것을 요구한다.

다시 메이데이 이야기로 돌아오면, 항공기 운항 중에 비상 구조신호를 호출할 수 있는 것은 비상 상황에서이다. 조종사는 비상선언(Emergency Declare)을 통해 지금의 상황이 다른 상황 보다 우선 처리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이에 따라 관제 당국은 이 비행기가 가장 먼저 조치될 수 있도록 한다.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하자고 하는 이들은, 그리고 노동의 정의로운 전환이 여기에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노동절에 구조 신호로서의 메이데이를 떠올려도 괜찮을 것 같다. 노동자와 노동조합도 기후비상의 구조 신호를 함께 발하고, 자연과 사람들 모두의 착취에서 한계를 넘어선 산업 자본주의가 활주로에 잘 내려앉도록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어원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 부여로서, 2021년의 ‘메이 데이’에는 기후위기의 ‘메이데이’를 외쳐보면 어떨까.

김현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10년간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에너지체제의 정의로운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연구했으며, 에너지 전환, 도시 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지금은 탈핵신문 운영위원장으로 신문 발간을 돕고, 기후위기를 알리는 교육과 탈성장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안토니오 그람시』, 『정의로운 전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를 되찾자』, 『GDP의 정치학』,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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