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철학하기] ⑯ 모든 예술은 삶터의 이야기다

티머시 모튼의 ‘생태적(ecological)’이라는 말을 ‘삶터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며 ‘마을에서 철학하기’를 써내려가는 과정을 되짚어보니 나의 지난 시간, 음악, 영화, 고요라는 비인간 존재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All Art is Ecological- 모든 예술은 삶터의 이야기다

『All Art is Ecological』(2018, 국내 미출간)

『All Art is Ecological』은 2018년 출간된 티머시 모튼의 책이다. ‘모든 예술은 생태적이다’라는 제목이 끌려 인터넷으로 직구했다.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 원서를 샀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잊을 때쯤 책이 도착했다. 작고 얇고 예쁜 책이다. 그런데!!! 『생태적 삶』(김태한 옮김, 2023, 도서출판 앨피)의 내용 중 일부가 거의 그대로 들어 있는 걸 몰랐다. 예술을 어떻게 생태철학으로 풀었을까 궁금했는데 아쉬웠다.

제목에 왜 art와 ecological을 같이 두었을까? ‘예술’은 피카소처럼 유명한 화가들이 하는 거라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생태적’이라는 말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 같아 지금까지 읽어온 모튼의 사유와는 결이 맞지 않는다. 물론 모튼이 ‘예술’과 ‘생태적’이라는 말을 추상적인 뜻으로 쓴 게 아니란 걸 이해한다. 그렇지만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말은 없을까?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단어를 다른 말로 바꿔보고 싶어졌다.

모튼의 사유에 결을 맞춰서 ‘상호연결’, ‘얽힘’, ‘공존’ 같은 단어를 떠올려보았지만 역시 추상적이다. 한자어여서 그런가? ‘내 이야기’, ‘나와 환경’, ‘세상에서 숨쉬기’로 차츰 범위를 넓혀 봐도 뭔가 부족하다. ‘삶터’? 삶터에는 나도 있고 일도 있고 내가 세상과 맺는 관계도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의 삶터는 마을인데 이 에세이의 연재 제목이 ‘마을에서 철학하기’이다. 제대로 찾아왔나 보다.

삶터의 이야기는 다 예술이다

그럼 내 삶도, 내 이야기도, 내 주변도 다 예술이야? 라고 물으면 모튼 선생님이 “빙고!”라며 웃을 것 같다. 이번 글은 내가 어떻게 내 삶터의 이야기를 예술로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는 걸 주제로 삼았다.

생태적 글쓰기

‘마을에서 철학하기’ 연재는 한 달에 두 번 5일과 20일을 마감으로 쓰고 있다. 전업 작가가 아니니 일과 글쓰기를 병행해야 하고 글이 술술 써지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나름의 고충이 있다. 가장 큰 고충은 글감이 꼭 마감에 임박해서야 떠오른다는 점이다. 마감 훨씬 전에 후딱 쓰자고 마음을 먹지만 잘 안 된다. 어쨌든 써야하니 대체로 5일쯤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시작한다. 뭘 쓰지? 우선 좀 읽자. 이 에세이의 텍스트로 삼고 있는 모튼의 『The Ecological Thought』를 펼친다. 1월부터 새로 읽기 시작해서 요즘은 9페이지를 읽고 있다. 아주아주 진도가 느린 책이다. 읽다 보면 앞으로 돌아가서 ‘여기서 왜 이 단어를 썼지? 이런 유머를 쓰다니! 문장구조를 그림 그리듯 쓰셨네. 모튼 선생님 천재!’ 하면서 도돌이표 읽기를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싶은가? 이 문장과 내 삶은 어떻게 연결되나?’ 이런 질문들이 글감이 된다. 반대로 삶에서 질문이 생겼을 때 책의 한 구절에서 힌트를 얻을 때도 있다. 희미하고 엉성하던 생각들이 생활 이야기가 만나 확 드러나면 주제가 선명해진다. 그때부터는 본격 글쓰기가 시작된다.

처음엔 좀 느슨하게

이제 글을 써야지라고 스스로에게 주는 신호가 있다. 유튜브에서 노래를 몇 곡 찾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튼 하켓의 ‘Do You Remember Me?’, 마돈나의 ‘Hung Up’,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튼의 ‘When You Believe’ 순이다. 지난번 에세이를 쓸 때 왜 이 노래들이 신호가 되었을지 의문이 들었는데 요즘 노래를 잘 모르기도 하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히 빠른 곡이어서 이제부터 바빠질 거라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 것 같다. 20세기 스타라는 공통점도 있다. 그들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20세기의 내가 된 기분으로.

글에 힘을 빼고 싶지만 힘 조절이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사진 출처 : Glenn Carstens-Peters

주로 저녁 8시나 10시 이후 초고를 쓰게 되는데 이때는 약간의 긴 소음이 필요하다. 넷플릭스에서 ‘리틀 포레스트’ 일본판을 틀어둔다. 여러 번 본 영화라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스토리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자연의 소리, 음식 하는 소리,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배경음이 되어준다. 한국어판을 틀지 않는 이유는 대사가 또렷하게 알기 쉬워 잘 들리면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초고를 쓸 때

초고는 어떨 땐 촘촘하게 써지지만 어떨 땐 완전 엉성해서 최악의 경우 처음부터 새로 쓰기도 한다. 잘 써야지 하는 힘이 과도하게 들어갈 때 생기는 일이다. 힘을 빼고 싶지만 힘 조절이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본글 쓰기

초고 작업을 마치고 본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갈 때는 음악도 영화도 모두 끈다. 초고를 쓰고 수정이 잘 되면 본글은 하루이틀 사이에 쓰게 되니 초고를 다듬을 때부터 삼일 정도는 외부자극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가제목을 붙여 두고 글을 쓰는데 본글을 쓰다보면 제목이 툭 튀어 나온다. 이 순간은 반갑다. 마무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생태적 글쓰기의 호흡

어떤 면에서 일하고 읽고 글 쓰는 일은 숨 쉬는 것과 비슷하다. 마을 현장에서 일하며 에너지를 쓰는 것은 ‘날숨’이고, 읽고 쓰기며 의미를 채우는 것은 안으로 들이켜는 ‘들숨’이다. 요즘 고민되는 것은 들숨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다. 행사의 후기나 마을에서 있었던 생활에세이를 쓰는 데 비해 철학 에세이는 몇 배의 시간과 고립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튼의 생태적 사유는 모든 것이 연결 되어 있다고 했는데 정작 글을 쓰기 위해서는 ‘분리’가 필요하다. ‘분리’도 연결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을까?

날숨과 들숨을 합해서 숨이라고 하듯, 분리와 연결도 합해서 무언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이야기도 예술인가

이렇게 쓰고 보니 무슨 거창한 대작이라도 집필하는 작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A4 두세 장 분량의 글을 쓸 뿐이다. 예전에는 작가는 글을 막힘없이 술술 쓰고, 화가는 붓질 몇 번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줄 알았다. 소설가들이 글쓰기의 고충을 말할 때도 ‘잘 하면서 괜히 하는 엄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튼의 책을 읽고 생태철학 에세이를 쓰면서 창작은 결코 뚝딱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을 견뎌야 하는데 그 시간을 지나며 읽고 쓰면 쓸수록 모튼의 사유가 내 삶에 깊숙이 들러붙어 나를 흔들고 변화시키며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생태적 글쓰기이다.

글을 쓰는 공간은 음악 소리와 영화 소리가 들리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진다. 나 혼자 고독하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요’라는 비인간 존재와 함께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고요한 사유를 들이마시며 내 삶터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김진희

만화리 비조마을에 살며 만가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마을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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