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지구 행성인

지구촌 사회, 세계시민 등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 말에 숨겨져 있는, 불평등과 착취의 진실을 본다. 단면적인 단편적인 세상의 구조를 뒤집어야 비로소 ‘나’, ‘너’가 아닌 ‘우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구는 둥글다.’ 초등학생 때인가 싶다. 그때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교과서에 인공위성 사진과 함께 지구가 왜 둥근지, 그 설명이 적혀있었다. 우리는 이제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머나먼 과거만 하더라도 다들 지구가 평평하다고 굳게 믿었다. 우리를 지금까지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깊은 수렁에 빠트린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 당시 지구는 둥글다고 생각했다. 그 후, 약 200여 년 뒤 아리스토텔레스가 월식 때 달에 생기는 지구의 그림자를 이유로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당시로서는 꽤 충격적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도 그 당시 사람이라면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을 것 같다. ‘지구가 둥글다, 아니다 평면이다’로 논쟁하는 이들을 보면서 지구가 둥글면 뭐하고 네모나면 뭐하고 평면이면 뭐 어떠한가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구는 평면이다.’ 오늘날까지도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걸 믿다니 터무니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평한 지구를 믿는 이들은 학회까지 꾸려 국제적으로 회원 규모만 1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10만이라는 숫자에 압도당해 이들의 주장을 조금 더 들여다봤다. “지구의 중앙에 있는 북극을 중심으로 각 대륙이 배치돼 있고 가장자리를 이루는 바다의 끄트머리는 45m 남극 얼음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넘치는 것을 막아준다.” 이들은 중력도 믿지 않을뿐더러 우주정거장도 믿지 않고 인공위성 등등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과 증거로부터 대척점에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던 데카르트의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치면서 피식 웃었다.

자각(自覺) 1

지하철, 버스, 식당, 회사 어디를 가도 다들 ‘주식과 비트코인’ 이야기다. 핸드폰과 컴퓨터 화면으로 종일 그래프와 숫자만 들여다본다는 사람들도 있다. 며칠 전 회사 동료는 “방금 100만 원을 잃었다.”라고 하고선 울상을 지으며 밥 먹는 내내 한숨과 함께 “떨어지기 전에 팔아야 했는데”를 중얼거렸다. 또 다른 날에는 뒤풀이 자리에서 모 교수가 탄소중립 강의를 다니면서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주식으로 차 한 대를 날렸다며 슬픔을 토로했다. 놀이동산의 놀이기구 중 하나가 주식일까. 마치 주식이 롤러코스터라도 되는 마냥 울상이던 표정이 금세 미소를 띠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는 시장과 손잡고 함께 해결해야 해. 내가 왜 주식을 하는 줄 알아? 세상을 이해하는데 주식만큼 좋은 방법이 없어. 분쟁지역에 있는 기업에 투자하면 그 지역에 왜 분쟁이 일어나는가도 공부할 기회가 된다는 말이지. 활동가들도 시장과 계속 선 그으면서 기후위기 대응하려고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지.”

증권거래소를 영화에서 뉴스에서 하도 보니 눈 감고도 이미지가 그려진다. 중앙에는 엄청나게 큰 화면 하나가 그리고 여기저기 작고 큰 모니터들이 공간을 메운다. 화면에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주황색 등의 색의 숫자와 그래프가 올라갔다, 내렸다, 직진했다를 반복하며 열심히 운동한다.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숫자들은 잠도 없는지 종일 운동 중인데 올림픽에라도 나가보라 권유하고 싶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곳, 전기에너지를 얼마나 잡아먹고 있을까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냥 단순히 숫자일 뿐인데 값이 매겨져 의미가 잔뜩 부여된다. 다들 그 기의((記意)에 매달려 자신의 삶까지 투영해버린다. 밝은 빛을 발산하며 숫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동안,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경제라는 이름으로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가 있는 다른 지역(지방) 주민들의 삶이 착취된다. 그뿐인가. 주식이 오르내리는 동안에 그 기업에서 실질적인 노동을 하는 존재들이 착취되고 타자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숫자에 가려져 흐려진다.

진동이 울린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엄마다. 전화를 받기도 전부터 잔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주식 강의 듣다가 대박 정보를 알아냈는데 지금 삼성 주식 많이 사둬야 해.”

“아니, 나 주식 안 한다니까. 몇 번을 말해. 엄마도 하지 마. 제발 좀.”

“너 안 할 거면 돈을 나한테 줘. 내가 해줄게. 주식이 착취만 하는 건 아니야. 경제가 돌아야지. 투기가 나쁜 거지. 주식은 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그리고 생각해봐. 지금이야 젊으니까 모르지. 노후에는 어떻게 할 거야. 나이 들어서 돈 없으면. 응? 그리고 네가 엄마, 아빠 노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몇 푼 안 되는 연금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야.”

매번 대화는 같은 말들로 되풀이된다. 나는 매번 주식이 왜 나쁜지를 이야기하고 엄마는 노후에 어떻게 살 거냐며 받아친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엄마의 월수입은 코로나 이후 1만 원도 채 되지 않는다(코로나 이전이라고 별반 차이는 없다만). 현재 주식으로 달에 30에서 40만 원을 버는 엄마에게(물론 잃을 때도 많다고 알고 있다) ‘주식’은 얼마 되지 않을 연금을 보충해줄 수 있는 ‘노후자금’으로 작동한다. 돈이 없는 노후에 대한 공포를 물리적・심적으로 유예해주는 부적이 되고 말았다. 안전한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각자도생을 위한 방법 가운데서 ‘주식’은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는 행성인들. 그랬다. 관계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 하는, 착취에 눈감으려 하는 우리는 평평한 지구의 행성인이었다.

자각(自覺) 2

우리가 이미 마주하고 있는, 마주할 기후위기라는 재난 앞에 우리의 삶은 어떤 판매대에 또 올라서게 될까? 
사진 출처 : Jordan Rowland
우리가 이미 마주하고 있는, 마주할 기후위기라는 재난 앞에 우리의 삶은 어떤 판매대에 또 올라서게 될까?
사진 출처 : Jordan Rowland

따닥따닥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앞, 뒤, 옆으로 책상들이 길게 붙어있다. 책상에는 모니터 두 대와 키보드, 전화기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통로도 비좁다. 자리에 앉아 나눠준 스크립트를 읽는다. 시간당 1만 원, 두 시간, 당일 지급. 이 문구에 끌려 지원했다. 며칠 동안의 차비를 벌 수 있겠다 생각했다. 저 멀리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읽고 있던 스크립트를 내려놓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핸드폰 가방에 넣어라. 끝까지 정기후원 유도하라 등등의 말을 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벽에 붙어있는 글에 눈을 옮겼다. 일하는 태도, 방법 등이 적혀있었다. 경영이념, 경영철학, 핵심가치, 서비스 정신 부분. 경영이념에 적힌 “고객 섬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신이 탄생했는데 내가 그동안 몰랐던 것일까. 고객이라는 신을 섬기는 종교단체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온 벽을 장식하는 문구에는 노동자의 의무만 있을 뿐 권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내가 앉은 책상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키보드 옆, 소화제와 먹다 남긴 커피가 있다. 소화제와 커피가 말한다. ‘소화가 안 되는데 소화가 될 동안의 충분히 쉴 시간이 없어요. 약 먹고 빨리 일해야 합니다. 잠도 오고 집중이 잘 안 되네요. 카페인이 필요합니다.’ 시간에 늘 쫓기는 시간 빈곤, 병가를 내자니 눈치 보이는 노동 현장의 노동감수성 빈곤. 다양한 형태의 빈곤에 시달리는 사회.

방송시나리오 종이 맨 위에는 방송일시, 프로듀서, 제작, 연출, 글・구성, 조연출, 서브작가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 그 아래는 누군가의 삶을 ‘가난’ 하나로만 초점화하여 편집된 이야기가 줄줄이 적혀있다. 아차 싶었다. 나도 책상 위 소화제와 커피를 그렇게 해석한 건 아닐까. 방송이 시작되고 잠시 후 여기저기 전화기에 불이 난다. 수화기를 귀에 대고 스크립트를 보며 그대로 읽는다.

“일시 후원도 좋지만, 정기적으로 아이들의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정기후원은 어떠실까요.”

“저도 형편이 좋진 않은데 방송보다가 너무 불쌍해서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딸내미가 준 용돈 조금 모아둔 돈이 있는데 그거라도 보내고 싶네요.”

TV 방송을 보고 전화를 하는 대부분의 사연은 이러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있는 현실. 익숙함을 넘어 기시감까지 느껴진다. 매해 겨울마다 뉴스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며 영웅이라 부르며 그 소식을 전하지 않는가. 찌릿. 다시 기시감이 느껴졌다. 교과서에서 봤던 ‘금 모으기 운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변주의 창의성조차 없다니. 매번 같은 방식으로 돌려막기 급급하다. 본질적 문제는 늘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이 땅에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이랑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 中

송금수수료와 3.3% 공제 후 통장에 찍힌 숫자, 18,340원. 나의 가난도 함께 팔린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 가사처럼 우리에겐 충격이 필요하다. 불평등은 이미 너무나도 오래되어 익숙해지고 말았고 “어쩔 수 없다” 말들이 오간다. 불평등을 해결할 의지조차 없기에 “분배”는 늘 우선순위가 되지 못했다. ‘분배’를 논하면 추상적이라거나 이상적이라며 여기저기서 전문가라는 이름을 달고 비판해대기 일쑤다. 우리가 이미 마주하고 있는, 마주할 기후위기라는 재난 앞에 우리의 삶은 어떤 판매대에 또 올라서게 될까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시금 생각해보자. 정말 둥근 지구에 살고 있는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저 과학 정보로 받아들이고 사는 건 아니었을까. 지평선 너머를 상상하지도 못하고 모든 희망을 놓아버린 건 아닐까. 던져진 질문에 나는 행동으로 나서자 마음먹었다. 평등, 공존 그리고 연결, 함께 사는 우리의 세상을 위해 오늘 나는 평면 지구에서 둥근 지구로 이주신청서를 작성한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난설헌

안녕하세요. 지구의 방랑자 난설헌입니다. 중학생 때 허난설헌을 좋아해서 활동명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허난설헌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이름으로 인해 웃지 못할 상황도 생기는데요. 아이돌 그룹 AOA 설현과 이름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설현으로 잘못 보고 부르기도 합니다. 처음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고는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식혜와 좀비를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즐겁게 살고 싶은 지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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