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 ⑤

2020년, Covid-19 팬데믹이 닥쳐왔다. 때마침 아버지는 「산재보험 보상·재활 서비스」 절차상 치료 및 요양 기간이 종결되었다고 판단, 장해등급 심사를 받게 되었다. ‘장해등급심사’란 더이상 치료와 요양을 해도 뚜렷하게 나아지지 않을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통상 재해 발생 2년 뒤), 그럼에도 신체 등에 장해가 남은 경우 해당 장해의 등급을 결정하기 위한 심사를 말한다. 아버지는 한 차례 요양 기간을 연장하여 거의 4년이 지난 뒤에야 장해등급 심사를 받게 되었다. 해당 등급에 따라 장해급여가 달라지므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Ⅵ. 돌봄과 노동의 위기 (2)

2020년 성탄절을 앞두고 공간을 꾸미는 직장 동료와 나, 그리고 청년공간 뒷북 ⓒ동그랑
2020년 성탄절을 앞두고 공간을 꾸미는 직장 동료와 나, 그리고 청년공간 뒷북 ⓒ동그랑

2020년 12월 31일부로 청년협동조합에서의 근로 계약이 끝났다. 다른 형태로 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해 주었지만, 언제까지고 알 수 없을 아버지 돌봄을 병행하며 반상근으로 그만큼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할 순 없겠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이젠 1인 가구가 아니라 2인 가구이며 모아놓은 돈도 넉넉지 않으니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격지심 혹은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어쩌면 뒤늦게 2인 가구가 살아갈 만큼의 적정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Covid-19 펜데믹으로 격주 주말과 연휴 때마다 했던 아버지 직접 간병(돌봄)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더이상 ‘반상근’과 ‘직주근접’이란 조건으로 일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 선택지는 넓어졌다.

2021년 1월부터 3월까지는 거의 백수로 지냈다. 달리 말하면 진로 탐색기랄까. 안전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강의도 듣고 책도 보고 인터넷으로 일자리 정보를 뒤지며 지냈다. 그러다 처남 형님(아내의 오빠)과 전화로 서로 안부를 묻던 중 내게 강원도에 있는 한옥학교에서 한옥 목수 일을 배워보면 어떻겠느냐 제안해 주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 해당 한옥학교 출신이 있는데 일을 잘 하더라며 혹 목수 일에 관심 있으면 알아보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형틀목수와는 물론 다르지만 어쨌든 나무를 다루는, 집을 짓는 목수라… 그것도 한옥을 짓는 목수라니! 일단 뭔가 있어 보였고, 기술이 있고 건강만 하다면 정년 없이 계속 일할 수 있는 분야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도 목수였으니 삼대 째 ‘목수’를 직업으로 삼는다면 내가 진로 선택에 있어 몹시 추구했던 ‘신념’과 ‘가치’라는 기준에도 부합한다 생각했다.

한옥학교에서 부재를 조립하며 실습하고 있다 ⓒ동그랑
한옥학교에서 부재를 조립하며 실습하고 있다 ⓒ동그랑

그렇게 4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간 강원도의 한옥학교에서 한옥 목수 일을 배우게 되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 경험, 커리어와는 상당히 다른 결의 일이었다. 그야말로 육체노동, 블루 워커다. 비록 짧은 기간의 배움이지만 몸만 쓰는 일은 아니더라. 다분히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몸도 머리도 그리고 팀워크도 좋아야 했다.

수료를 앞둔 9월 말, 인스타그램 DM으로 메시지가 왔다. 가끔 인스타그램 개인 계정에 한옥학교에서의 일상을 사진과 글로 남겼는데 그걸 보고선 본인은 ‘한옥목수 오야지’(이하 오야지)인데 자기 팀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비교적 젊은 팀이고 지금 현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문화재 복원 현장이라고 했다. 난 이미 그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고 뜻밖의 제안에 한편으론 영광스럽기까지 했다. 수료도 전에 현장과 바로 연결되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일단 현장이 경기도 파주에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일하는 동안은 파주와 가까운 김포의 동생네 집에서 지내되 아버지 역시 김포 요양병원에 계시는 데다가, 비록 주중에는 아내와 떨어져 지내지만 아주 멀어지는 것도 아니니 다닐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한옥학교 수료 직후 현장을 찾아가 오야지를 만나 현장과 팀 소개를 듣고는 다음 주부터 출근하겠다 했다.

급여는 수습 기간 3개월 동안 일당 9만 원이라고, 다른 곳보다 많이 주는 편이라는 얘길 해왔다. 미심쩍기도 했고 사실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현장 위치나 오야지의 명성, 팀 분위기 등이 괜찮다 생각해 받아들였다. 한편으론 근로계약서를 쓰지도 않고 4대 보험 얘기는 꺼내지도 않기에 찜찜했지만, 이 바닥 관행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이 찜찜함은 나중에 내게 불이익으로 돌아온다.)

문화재 복원 및 보수 현장에서 다른 목수와 함께 초보 한옥목수로 일하고 있다 ⓒ동그랑
문화재 복원 및 보수 현장에서 다른 목수와 함께 초보 한옥목수로 일하고 있다 ⓒ동그랑

첫 출근 날, 같이 일하게 된 목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현장을 둘러보고선 바로 “전 목수”라 불리며 할 일을 지시받는 등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목수가 된 것만 같았다. 일은 예상보다 고됐고 날은 추웠다. 긴장하며 밉보이지 않으려 그저 열심히 시키는 일들을 해나갔다. 그렇게 출근 첫날이 지나고, 둘째 날이 되었다. 그날은 사실 아버지의 고관절 수술이 있는 날이었다. 지난 추석 연휴 때 간병인이 아버지를 침상에서 휠체어로 옮기다가 놓치는 바람에 그대로 병실 바닥에 떨어져 고관절이 부러졌던 것이다. 이미 이틀이나 지나 그 소식을 전한 병원 측도 간병인에게도 배신감과 괘씸함을 느꼈지만 지금 당장은 아버지 상태가 중요했다. 바로 큰 병원으로 모셨으면 수술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시기를 놓쳐 버렸단다. 또 당시엔 흡인성 폐렴을 앓고 열도 있어서 바로 수술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라 수술 가능한 상태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나서야 아버지의 골절된 기존 고관절 일부를 제거하고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고관절 반치환술’을 하게 되었다. 그날이 곧 내가 현장에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인 것이다. 출근 이튿날 휴가를 내는 게 그렇게 눈치 보였다. 결국 동생이 본인 직장에 사정을 얘기해 어렵게 반차를 내고 수술실 앞을 지켰다. 동생 덕에 안심하면서도 불안한 마음 역시 있었다. 한참 무거운 부재를 나르고 있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다른 목수들과 무거운 부재를 함께 나르고 있었기에 바로 받지 못했고, 이제 현장 2일 차여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 후로도 몇 차례 울리는 동생의 전화를 바로 받질 못했다. 일하는 내내 불안했고 당황했다.

아버지는 고관절 반치환술을 받은 직후 상태가 안 좋아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동그랑
아버지는 고관절 반치환술을 받은 직후 상태가 안 좋아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동그랑

애써 침착하기로 마음먹고 일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서야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버럭 화를 내며 아버지가 수술 직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했다. 상태가 좋지 않다고. ‘고관절 반치환술’ 자체는 잘 되었으나 폐렴이 문제였나 보다. 폐에 물이 차고 기흉이 심한 상태인 데다 자가 호흡이 안 되어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고 있어 자칫 사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현장 일이 끝나려면 아직 2시간이나 더 있어야 한다. ‘이를 어쩌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씨발! 왜 또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안심하고 있었는데 씨발! 뭐야 이게!?’ 연신 속으로 욕을 삼켰다. 일은 당연히 손에 잡히질 않고 당장은 목수 1인분의 몫도 못 하고 있지만 맡겨진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집중하기 어려웠다.

‘일단 침착하자. 퇴근하고 병원에 가 보자. 괜찮으실 거야.’ 다시 애써 침착해지기로 하고, 오야지에게 아버지 일로 주말 동안 곁을 지켜야겠다고 말했다. 사실 중환자실에 있는 아버지 곁을 지킬 순 없었다. 비록 같이 있을 순 없으나 마음으로나마 오롯이 아버지 곁을 지키고 싶었던 게다. 일요일,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를 보고 왔다. 다행이다. 폐도 펴지고 수치들도 점차 안정되어 간단다. 위기를 넘긴 것이다. 아버지와 몇 마디 주고받고는 손을 꼭 잡아드렸다. 힘내시라 사랑한다 말씀드렸다.

고관절 반치환술 후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동그랑
고관절 반치환술 후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동그랑

‘반상근’도 ‘직주근접’도 아닌 조건의 할 일을 드디어 시작했건만 출근한 지 겨우 이틀째 되는 날 돌봄 상황은 이렇듯 여지없이 찾아왔다. 그렇다고 당장 그만둘 순 없었고, 아버지도 점차 안정되어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그 후로도 두 달간 한옥 목수 일은 계속할 수 있었다.

그 두 달 동안 나는 추웠고 심지어 아팠다. 워낙 고된 일이니, 출근 전 새벽에 근처 공원에 나가 꾸준히 근력운동을 했음에도 언제부턴가 허리가 아프더니 우측 엄지발가락이 저리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오야지에게 말해 하루 일을 쉬고 병원에 다녀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허리디스크 초기 증상이란다.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산업재해였고 청구하여 치료받으면 될 일을 당시엔 미련하게도 쉬지 않고 이 파주 현장 일까지는 끝마치고 싶었다. 퇴근하고 한의원으로 직행해 침을 맞고 허리에 파스를 붙이면서 그렇게 통증을 감수하며 결국 다짐대로 파주 현장 일까지 끝마쳤다.

한편으론 스스로 대견하고 뿌듯하기도 했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내와 계속 떨어져 전국에 있는 현장을 전전하며 한옥 목수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과 물음 끝에 그만두기로 했다. 오야지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당연한 권리이자 충분히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것을 쩔쩔매다 겨우 그만둔다 말했다.

물론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내세울 만한 이력은 아니지만 ‘허세’ 정도는 부릴 수 있을 만한 ‘3대째 목수’라는 타이틀도 아쉬웠고, 그나마 조금 배운 기술을 현장에서 더 써먹지 못하는 것이 아까웠으며, 저임금·고강도‧고위험을 감수하고 얼마간 일하면 언젠가 고임금‧기술자‧오야지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같은 희망도 접어야 했으니. 그러면서도 근로기준법 미준수가 기본값인 한옥 목수 현장 일을 경험하고 나니 산업재해로 6년 넘게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처럼 언제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생각되어 아찔하기도 했다.

한편 아버지는 ‘고관절 반치환술’ 후 요양병원에서 다시 지내게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를 몇 년째 돌봤던 – 그러나 아버지를 떨어뜨려 고관절 골절을 야기한 – 간병인에게 더이상 간병을 맡기긴 어려웠다. 그동안 고마운 마음이 물론 컸지만, 해당 사고 이후 독립 보행이 더욱 어려워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니 안타까웠고 그렇게 된 원인이 간병인에게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화가 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하고 민망한 상황. 이런 상황은 돌봄 현장에서 사실 자주 일어난다. 어쨌든 결국 다른 간병인에게 아버지 돌봄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6년 사이 벌써 열 번이 넘는 간병인 교체다. 당사자인 아버지에게 못 할 노릇이라는 생각도 잠시, 간병인 덕에, Covid-19 덕에 나는 간병을, 직접 돌봄을 면할 수 있었다. 불편한 죄책감이 들면서도 자유로운 일상에 만족하는 모순된 감정 사이에서 나는 이렇게 노동의 위기를 겪고 돌봄의 위기를 마주하게 된다.

동그랑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시인-되기'는 여전히 요원하고 문단에 등단한 적 역시 없다. 대학 졸업 후 개신교 선교단체 간사로 3년 간 일하다 2016년, 목수로 일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상시 간병과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자 하던 일을 관두고 격주 주말과 명절 연휴 때마다 병원에 들어가 그를 돌보게 된다(최근 3년간은 Covid-19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한 인연으로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일상을 지원하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사무국장으로 1년, 이후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모여 만든 청년협동조합으로 이직해 커뮤니티 매니저로 3년을 일했다. 2021년, 기술을 배워봐야겠다 싶어 한옥목수 일을 배우고 실제 문화재 복원 및 보수 현장에서 초보 한옥목수로 일을 하다 열악한 근무여건(근로기준법 미준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결국 그만두게 된다. 짧게라도 배운 기술과 일 경험이 아쉬워 비록 목수는 아니지만 2022년엔 수원 화성행궁 복원 현장에서 인턴 공무로 6개월 간 일했다. 2023년 현재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활동가로, 프리랜서 작가 및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 필명 ‘동그랑’은 강화도에 딸린, 동검도에 딸린, 무인도 동그랑섬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섬 안의 섬 안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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