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땅으로” : 탈성장으로 가는 사회와 개인의 과제

탄소감축의 시대에 체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물질생산을 인위적으로 줄여야 하는 시대를 생각할 때, 탈성장 시대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과제와 더불어 우리 개인의 과제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은유로서의 소농, 직접 행동으로서의 “다시 땅으로” 운동을 생각하며 탈성장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우리 스스로도 단련해야 하지 않을까?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이자 최종 목표를 단순하게 말해 보자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탄소의 급격한 감축이다. 문제는 탄소의 감축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탄소배출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인데 현 체제의 산업, 사회, 정치, 문화 등 체제의 본질 자체와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탄소배출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인데 현 체제의 산업, 사회, 정치, 문화 등 체제의 본질 자체와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감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 출처: Marek Piwnicki
탄소배출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인데 현 체제의 산업, 사회, 정치, 문화 등 체제의 본질 자체와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감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 출처: Marek Piwnicki

탄소감축이란 나머지 모든 사회에 대한 변화를 강제한다. 탄소감축을 해야만 한다는 과학적 결과는 나오미 클라인의 책 제목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2016)와 같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것이다. 어떤 기술사가는 18세기 이후 벌어진 자유무역의 등장과 식민지 출현, 사회혁명 등 당대의 주요한 변화를 석탄 에너지 사용을 모든 변화의 진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틀린 게 아닐 수 있다. 나아가 20세기 이후 벌어진 1·2차 대전과 소비문화, 민주주의의 확대 등을 석유의 보편적 사용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석탄과 석유를 문명 변화의 주요한 변수로 이해하는 바로 그 기술사가가 탄소감축에 대해 생각한다면 산업은 물론 사회체제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탄소 배출을 통해 바뀐 것들을 열거해 보고, 그것이 하나씩 둘씩 대체되거나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남아날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논쟁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전기차로도 수소나 암모니아 기술, 탄소포집기술로도 현재와 같은 대량생산_소비 체제는 유지 불가능하며 따라서 극단적인 감축의 시대, 빈곤한 시대로의 거대한 방향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은 것은 감축시대로의 진입 속도이다. 대량멸종의 시대는 생태계 변화 속도와 생태계에 종속된 생명체들의 진화 속도간의 ‘갈등’이 아닌가? 기후와 진화의 전면전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진화속도가 더 빠르다면 생명체는 다른 둔갑된 모습을 통해 종적 차원에서는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진화보다 생태계 변화 속도가 더 빠를 땐 멸종을 피할 수 없다. 우리 사회 체제가 그와 같다. 탄소감축의 속도와 체제 변화 사이의 속도전이 사회 유지의 핵심적 변수가 될 전망이다.

사회는 빈부격차 해소를 통해 탈성장으로

사회전체의 물질적 감축에 걸맞은 이데올로기의 변화, 에피스테메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탄소감축은 사회전체가 고르게 부담하지 않고 사회 약자들에게 집중되고 말 것이다. 사회 약자들로부터 한줌의 탄소마저 박탈한다는 것은 문명의 다기한 기술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됨을 의미한다. 자동차 문화는 공유 자동차 형태로 유지되어야 하며 육류문화는 대체육 등을 통해 키치화 되어야 하며 최소한의 에너지는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농업과 공공영역에 양보되어야 한다. 탄소소비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정의로운 테이블을 통해 사회 전체가 함께 합의해야 옳다. 공동체가 함께 물질 경제체제를 후퇴시키고 그 후퇴 속에서도 여전히 현대문화의 편리함을 공유하는 사회. 그것은 결국 탈성장 사회이다. 탈성장 사회는 탈탄소 사회로 이행하는 필수조건이다. 탈성장 경로와 탄소감축 경로로의 동시 이행을 상상하지 않고서는 탈탄소 사회를 꿈꿀 수 없을 것이다.

성장에 중독된 사회에 관하여 칼 폴라니는 빈부의 격차가 곧 성장 중독 사회를 낳는다고 말하고 있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칼 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전환』(2009)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가 이중운동에 대한 설명이라고 한다. 자본의 무한 팽창을 허용하면서 민주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영구 성장 체제가 등장했다. 사회적 불평등이 방치되는 과정에서 유권자들은 더 발달된 복지혜택 요구한다. 정치권력은 포퓰리즘 정책을 유지하면서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 자본과 노동, 두 진영의 요구에 사회 경체체제가 대응하는 방법은 쉬지 않는 성장과 해외 자원 개발이다. 시장의 유지와 사회 유지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식민지’도 경영하고 해외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다. 국민국가, 팽창주의 제국주의의 얼굴은 무한성장의 또 다른 얼굴이다. 생태적 약탈과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이중 약탈이 없이는 영원한 성장은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탈성장 사회는 성장이라는 ‘상식’이 자리 잡게 된 본질적 원인인 이중운동에 대한 해소가 필요하다. 이중운동 중에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당연히 노동과 복지 영역이 아닌 자본의 무한 축적을 사회가 허용했다는 점이다. 성장으로부터 한 사회 체제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빈부의 격차가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개인은 성과주체를 넘어야 탈성장으로

미야지마 히로시는 지구의 빈곤 지역은 극한의 가난 때문에 고통 받고 있고 선진국은 끝없는 경쟁 속에서 피로해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빈곤과 피로에 대해 역사학도로서의 고민의 결과로 서구중심사관을 넘는 동아시아 역사관의 새로운 해석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글로벌 사우스의 빈곤 문제와 선전국의 피로문제를 시대적 과제로 정리하고 그에 부응하며 제시하는 내용은 의외로 소농사회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글은 깔끔하게 소농사회가 왜 빈곤문제와 피로문제에 대한 대책인지 말하지 않는다. 독자로서 짐작을 통해 그 맥락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소농사회는 중국 송대에 시작한 과거제, 수도작1과 함께 시작된다. 중국은 명나라 말기, 조선과 일본은 그보다 조금 후대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소농사회는 토지의 소유와 상관없이 그 가족의 노동력에 의지한 독립적인 농업경영이 사회적 생산의 기본 모듈이 되는 사회이다. 유럽의 농노제나 인도의 농업노동자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었다. 세계사적으로 아주 예외적인 경영 방식으로 한중일 삼국에는 독립적인 경영 주체 방식(소농)이 아닌 농업 종사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노비들도 대부분 개인의 재산이 허락되었고 토지 임차인으로서 개인의 노동에 따라 더 많은 이익을 개인화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동아시아 수도작 농업방식에 따른 사회 시스템인 소농사회를 하나의 은유로서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지배층의 세습은 비교 대상 문명권에 비해 느슨했고 노동 종사자는 가족과 지역 공동체 단위로 노동하며 개인이 노력에 대한 결과를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조건에서 생활했다. 독립경영인에 알맞은 주체화된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 노동은 자연을 향하고 생산물이 곧 성과인 한계 속에서 살아야 했던 소농의 모습을 현대의 피로에 대한 전략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모든 존재는 쉴 수 없다. 궁전을 장식하는 금과 보석은 투자되지 않은 화폐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Jean-Philippe Delberghe
오늘날 모든 존재는 쉴 수 없다. 궁전을 장식하는 금과 보석은 투자되지 않은 화폐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Jean-Philippe Delberghe

나아가 현대인의 피로에 대한 이야기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는 『피로사회』(2012)를 통해 후기근대사회의 특징으로 개인의 자기 착취와 그에 대한 우울증과 피로에 대해 말한다. 개인은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 속에서 ‘Yes, I Can’과 ‘좋아요’에 방치된 가운데 모든 가능성이 열린, 가능성의 감옥에 갇혀 있고 말한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이 만들어지던 시대에는 히스테리가 대표적 정신질환이라면 그것은 금기의 아버지가 타자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의 과잉긍정 사회는 그 누구도 나에게 금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부정적인 존재로서 축출 대상이 된다. 결국 개인은 자신과 싸울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개인이 책임을 묻고 탓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며 따라서 현대의 중요한 정신질환은 우울증이 된다. 신자유주의 사회, 바로 성과사회는 ‘너는 할 수 있다’는 말로 가득 차 있다. 타자가 없기 때문에 개인 스스로 더 많은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간다. 독일에서는 연봉이 상당한 축구 골키퍼, 로베르트 엥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자기착취 속에서 끝없는 성취압박의 공포를 해결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슬라보예 지젝도 책을 못 쓰면 불안해하고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과사회의 모든 개인은 자신이 소진될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바타이유는 『저주의 몫』(2022)에서 데팡스를 설명하면서 런던시 시청사를 장식하는 금은 휴식하는 화폐로 더 증식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오늘날 모든 존재는 쉴 수 없다. 궁전을 장식하는 금과 보석은 투자되지 않은 화폐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 금장식들은 베르사이유 궁전의 벽에 있어서는 안되며 선물시장에 투자되어 더 많은 투자 이익을 낳고 있어야 더 아름다운 법이다. 성장중독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강요된 주체는 바로 성과주체이다. 그들은 어떤 성과에도 만족할 수 없다. 더 많은 증식의 운동자체가 미학적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성과주체는 자신의 착취를 거듭하여 결국 소진되고 우울증에 빠져서야 멈춘다.

소농사회, 땅의 예찬하는 사람들

탈성장 사회로의 이행은 불가피하다. 이행기에서 혁명이 혹은 전쟁이나 어떤 붕괴가 있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탈성장 사회 이외의 체제란 생태적 한계로 수용되지 못할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과 개인적인 성과주체의 극복을 위한 수행의 과정이 없이는 탈성장 사회로의 평화로운 이행이 불가능할 것이다.

한병철은 오늘날 사회를 자기착취의 무한반복이 일어나는 피로사회로 규정하고 이곳에는 타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가 없는 세상에서는 사랑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두 남녀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광경도 결국 두 사람이 서로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타자가 없는 세상, 그래서 결국 누구에게도 잔소리 듣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칭찬을 들을 수 없는 사회. 아무도 ‘잘했다. 이제 좀 쉬어라’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자기 자신을 칭찬할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는 사회. 따라서 각 주체는 끊임없이 성과를 내야 하며 성과를 타인에게 과시할 때에만 안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성과주체를 극복하는 길을 한병철은 별도로 말하지 않는다. 그의 여러 저작들 중 『땅의 예찬』(2018)을 통해 엿봐야 한다.

한병철은 『땅의 예찬』에서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라 말한다. 사진 출처: Jonathan Kemper
한병철은 『땅의 예찬』에서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라 말한다.
사진 출처: Jonathan Kemper

스스로 정원을 가꾸며 느낀 아포리즘에서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원의 생명들은 본인이 멋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시간은 저만의 시간과 성장의 질서를 갖는다. 마우스로 꽃 아래에 존재하는 스크롤을 잡아 앞으로 당길 수 없다. 남들보다 빨리 1억을 모을 수도 있고 남들보다 빨리 더 큰 성과를 더 빨리 만들 수는 있어도, 꽃 한송이를 빨리 피울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정원의 존재들은 제각각 뚜렷한 시간의 질서를 유지한다. 정원을 ‘타자의 구원’이라고 말하며 ‘정원은 구원의 장소’라고 격상시킨다. ‘지구는 피를 흘리고’ 있으며 생명이 없는 ‘작지만 꽃이 피어나는 행성에 산다는 것’을 늘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탈성장의 행동주의 노선 중에서 ‘다시 땅으로’ 운동이 탈성장 행동의 핵심이다. 자급자족하는 삶,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생태적 삶, 지속가능한 삶…. 탈성장의 이념에 철저하게 부합되는 삶의 모습이란 ‘소농의 삶’으로 검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원, 농지를 가꾸는 개인의 주체야말로 성과주체를 극복하고 타자와 시간을 매 순간 느끼는 경험을 누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68혁명기 히피들의 탈주선으로 선택되기도 했던 ‘다시 땅으로’ 운동은 반소비주의, 반화폐주의, 공동체 건설 등 실천 가능한 모습으로 탈성장 사회의 조각을 지금-여기에 실현할 수 있듯,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 텃밭을 일구길 바란다. 텃밭에서 땀을 흘리며 피로한 주체를 단련하고 자연이 주는 성과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란다.


  1. 논에 물을 대고 손모내기를 하는, 우리가 아는 논농사 방법이다. 수도작은 지역의 특수성, 강수량의 변동, 공동체 공동 작업 등이 생산과정에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서양식 노예 노동이나 수동적 농노 방식의 농업 노동으로는 재배가 불가능하다. 수도작은 소규모가 대규모보다 적합하며 아주 주체적인 농민의 자발적 관리가 필수이다. 따라서 저자는 수도작과 가족단위 소농시스템과 국가적인 과거제의 변동을 하나의 변동체제로 묶는다. 필자의 추가설명.

두더지

쌍둥이를 낳아 공동육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 하여 나를 상징할 수 있는 동물을 찾다가, 나는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두더지라고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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