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 – 팬데믹과 생태적 마음

팬데믹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세상과 깊게 연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는 사회, 자연, 생명, 미생물 등과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마음 속에는 생태적 연결망이 갖고 있는 다이내믹한 요소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역동적이고 활기차게 이행하고 횡단하고 변이된다. 우리에게는 정동과 활력의 판을 짤 능력이 있으며, 용기와 의지를 갖고 생명위기 시대를 헤쳐나갈 주체성 생산을 할 수 있는 생태적 마음, 역동적인 연결망의 마음,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이 있다.

1. 들어가며 : 팬데믹 상황에서의 생태적 마음의 작동양상

팬데믹 상황이 터지자, 많은 사람들이 고립되고 외로워졌다. 그만큼 우리의 생태적 마음은 연결되기를, 관계 맺기를, 교감하기를 원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생태적 마음은 다이내믹 시스템으로서의 에코시스템(ecosystem)이 갖고 있는 깊이의 마음, 넓이의 마음, 높이의 마음으로 유래하지만, 각각의 마음 자체로 보면 잡동사니처럼 조각나 있다. 깊이의 마음은 우리 심연 속에 밑바닥 감정으로 떨어질 때 되튀어 오르는 주체성 생산이 가능하다는 낙관과 신념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생명 그 자체의 역동성에 따라 출구전략을 구사한다. 넓이의 마음은 사물에서 유래된 마음, 기계에서 유래된 마음, 자연에서 유래된 마음이 혼재면을 그리는 그야말로 얇고 잡동사니와 같은 마음이다. 넓이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 여백이 많아서 각각의 사물, 기계, 자연, 인간, 생명의 자리를 내어줄 만큼 여유롭다는 점을 의미한다. 높이의 마음은 우리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높게 설정할 때 살 만한 의미를 갖게 됨을 뜻하며, 우리는 늘 새로운 높이를 통해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이 모든 생태적 마음이 순간 정지화면 속에 머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 팬데믹 상황이었다. 우리는 팬데믹의 각각의 키워드를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태적 마음이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를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2. 사회의 기능정지와 재건의 움직임들

사회적 거리두기 : 코로나 상황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생태계에 심각한 와해와 해체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는 사교적이고 경관적인 미리 주어진 무차별 사회의 위기였지, 끊임없이 구성되고 생성되고 재건되는 간(間)공동체, 간(間)네트워크 사회의 위기는 아니었다. 여기서 무차별사회는 관계도 없는 사람의 소식과 정보를 접하고, 관계도 없는 사람과 거래를 하고, 관계도 없는 사람과 벽을 맞대고 사는 자본주의 사회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접촉경계면을 사라졌지만, 사회를 재건하고 구성하려는 수많은 실험과 시도가 있어 왔다. 이러한 간(間)공동체사회는 낯선 기후난민과 제 3세계 민중에 대한 ‘환대’와, 친밀한 로컬에서의 마을 사람들의 ‘우애’ 사이에서 거리조절을 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관계없음의 무차별사회, 즉 자본주의로부터 탈주로를 개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거리조절의 판이 개방되자 우리는 2~3인으로 강건하게 구성된 소규모 집단을 통해 우리를 관계가 주는 깊이와 잠재성에 대해서 더 천착하게 만들었다.

팬데믹 상황에서의 자가격리의 일상화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와 자연, 생명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며, 다시 분리와 격리 이후의 재연결작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진출처 : cottonbro
팬데믹 상황에서의 자가격리의 일상화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와 자연, 생명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며, 다시 분리와 격리 이후의 재연결작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진출처 : cottonbro

자가격리 : 또한 팬데믹 상황에서의 자가격리의 일상화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와 자연, 생명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며, 다시 분리와 격리 이후의 재연결작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비상사태의 일상화는 오히려 생명의 막과 생태계의 경계와 같은 범위한정기술을 통해서 가까이-지금-여기-당장을 복원해 냈다. 사실상 근접거리의 국지성 속에서 가장 유효한 삶의 양식이 돌봄과 살림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극소수의 가족, 형제, 이웃, 친구와 함께 ‘강한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를 재창조해냈다. 그 속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상에서 우주, 세계, 사회, 성, 자연, 생명 등을 재발견해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통속적인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으로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해내고 구성해내야 할 우리 안의 자연과 생명에 대해서 깨닫는 계기로서 대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 사물, 자연, 생명의 깊이와 잠재성을 재발견하는 계기를 갖는다는 점은 우리 자신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마스크 : 마스크가 사람들의 얼굴을 덮자 사람들의 정체성(Identity)과 얼굴에 대한 고정관념은 파괴되었다. 우리는 여러 가면을 횡단하는 사람, 내면의 진실한 가면이 별도로 있지 않은 사람이 되었고, 자연과 생명의 얼굴, 즉 머리로 자신의 얼굴성을 사유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생명의 연결망에서 얼굴은 정체성이 아닌 특이성(singularity)일 뿐이다. 공동체의 판이 깔리고 강렬도가 뜨거워지면, 가수가 아닌데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생기고 아나운서가 아닌 데도 사회를 보는 사람, 댄서가 아닌데도 춤을 추는 사람이 생긴다. 여기서 가수, 댄서, 아나운서는 정체성이라면, 이것들이 아닌데도 행동한 사람은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마치 당나귀 귀에 속닥이고, 새들의 지저귀고, 꽃들이 흔들거리듯 대화가 오갔다. 웅성거림, 소음, 잡담이라고 간주되던 주변부와 곁의 사유가 재건되었다. 정체성을 분명히 하던 직분, 역할, 기능으로서의 주체(subject)나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자아(ego)로서의 방식이 아니라, 특이성이 표현될 때의 몸짓, 색채, 음향, 이미지, 맛 등이 우선이 되는 대화방식이 작동했다. 표정을 읽지 못한다는 난감함과 접촉경계면에서의 교감의 두절을 뛰어넘는 익명성, 특이성, 유한성 등의 실존의 양상이 마스크가 되어 우리의 얼굴을 가렸지만, 우리는 새로운 특이성의 지평으로 향했던 것이다.

3. 돌봄과 살림의 정동(affect)

자기돌봄의 시민성을 전제로 K-방역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서로돌봄의 방법론에 대해서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사진출처 : engin akyurt
자기돌봄의 시민성을 전제로 K-방역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서로돌봄의 방법론에 대해서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사진출처 : engin akyurt

돌봄 : 팬데믹 상황에서는 시민들이 앞장서서 자기돌봄을 전제로 한 서로돌봄으로 이행했다. 팬데믹 상황에서는 위생과 섭생, 스케줄 관리, 손 소독 등의 일상적인 자기돌봄의 행위양식이 펼쳐진다. 그것은 생태시민성1의 형성과정과 일치하는데, 일단 이는 의존과 동일시 중심의 근접거리 ‘사랑노동’이 아닌 관계 자체에서의 거리조절의 과정이 끊임없이 이루어진 ‘돌봄노동’(=우애노동)으로의 이행이며, 원거리 존재에 대한 ‘연대노동’으로의 이행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자기돌봄의 시민성을 전제로 K-방역이 이루어진 과정에서 동시에 우리는 서로돌봄의 방법론에 대해서 잘 깨닫게 되었다. 무조건적인 희생과 젠더불평등, 밀착된 동일시 관계는 최소화되었고, 관계 자체가 끊임없이 거리조절, 힘 조절, 초점조절에 따라 미학화되고 윤리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관계 자체가 갖고 있는 전통적 차원의 접촉경계면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것의 윤리와 미학과도 같은 숨은 전제로 서로 조심하고 신중하고 주의하는 모습이 일상화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돌봄을 희생시킨 서로돌봄은 환상이거나 종교적 맹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과정에서 강건한 돌봄모듈, 교차성 돌봄, 돌봄의 사회화와 가치화 등의 중요성이 떠올랐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관계 자체가 갖는 새로운 측면에 대해서 알아갔던 ‘사회적 학습의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플랫폼 : 팬데믹 상황은 접촉경계면을 최소화하고 비대면 소비 형태의 플랫폼자본주의를 정착시켰다. 그것은 OTT, 배달플랫폼, 유튜브, 넷플릭스, 구글, 페이스북, 줌과 같은 플랫폼 등이 삶의 양식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는 계기가 된다. 플랫폼노동자는 필수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가지면서 먹거리, 생활필수품, 의약품 등을 유통시켰다. 동시에 플랫폼 내에서 정동(affect)2를 발휘하고 웃고 울고 즐기고 향유하면, 그 이득은 모두 플랫폼이 가져가는 정동자본주의(=플랫폼자본주의)3 양상으로 성장주의 세력은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러나 정동(affect)은 우리의 관계가 초래하는 생명력과 활력이다. 우리의 관계의 판 자체를 자본주의가 장악하게 된 배경은 팬데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생태계, 네트워크, 공동체라는 관계의 판 자체는 오히려 공유자산이자 커먼즈(commons)라는 점은 더욱 분명해졌고, 그것이 사유화되거나 자본에 전유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깨달았다. 여기서 커먼즈는 우리가 공유하는 공유재, 공통재, 공유자산과 같은 물, 불, 흙, 바람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관계망이나 지식, 지혜와 같은 비물질적인 것도 커먼즈에 속한다.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커먼즈의 방어가 얼마나 중요한 시기가 되었는지를 부지불식간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살림 :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경제의 기능정지 속에서 폐색(閉塞)되고 협착(狹窄)된 상황으로 머물 것이라고 판단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살림과 돌봄이라는 용기 있는 행위양식이었다. 자연과 생명, 미래세대에 대한 양육자로서의 인간형이 이 시기 동안 크게 부각되었다. 경제의 기능정지를 능가하는 살림의 역동적인 대응은 우리 안에 있는 생태적 마음이 다이내믹 시스템으로서의 생태계를 가능케 하는 작동양상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자원이 있어야 활력이 생기는 성장주의 방식이 아닌 활력(=살림)이 자원(=경제)보다 앞서 작동하는 탈성장 전환사회의 전모도 드러났다. 물론 살림꾼, 가정주부, 돌봄자 등의 엄청난 활력소진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었다. 어떻게 탈성장 전환사회에서 활력이 발생될 수 있는지, 어떻게 기능 정지된 경제에 대한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 살림과 돌봄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지 등이 그것이다.

재난지원금 : 경제가 작동하지 않자, 임금을 통한 소득보전이 어렵게 되었고, 브이자 경제유형의 불평등구조는 가속화되었다. 수많은 돈이 풀렸지만, 가장 유효한 방법은 직접 시민들에게 돈을 주는 기본소득뿐이라는 점도 드러났다. 소득보전의 문제가 화두가 되고 결국 재난지원금으로 현실적인 맥락이 형성되었다. 팬데믹 이전까지는 기본소득은 식자층의 이상이자 꿈, 이념이었지만, 이제 현실적인 정책이 되었으며, 현실에서 가동 중인 제도가 되었다. 그것은 노동과 소득, 자본과 소득의 고리를 끊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물, 공기, 땅, 바람이 우리 자신을 키워준 커먼즈였듯이 공공영역 역시도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함을 적시한다.

4. 마치며 : 팬데믹 시대의 생태적 마음

우리를 키워준 것은 절반은 바람이고 절반은 햇빛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팬데믹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세상과 깊게 연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 자신은 사회, 자연, 생명, 미생물 등과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 어느 한구석이 고장 나면 그것 역시 우리 자신의 문제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사태를 반영하는 감광판만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는 생태적 연결망이 갖고 있는 다이내믹한 요소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역동적이고 활기차게 이행하고 횡단하고 변이된다. 우리는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정동과 활력의 판을 짤 능력이 있으며, 용기와 의지를 갖고 생명위기 시대를 헤쳐 나갈 주체성 생산을 할 수 있는 생태적 마음, 역동적인 연결망의 마음, 마음을 응시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애와 낙관을 잃지 않으며,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1. 생태시민성은 거리조절의 시민성, 양육자로서의 시민성, 참여적 시민성, 판까는 자의 시민성 등을 일컫는 것으로 권리주의에 포획된 기존 시민성 논의를 뛰어넘는 생명과 자연과 어우러지는 색다른 시민성 논의로 향한다.

  2. 정동(affect)는 힘이자 에너지, 활력으로서 스피노자에게 기쁨, 슬픔, 욕망을 지칭한다. 정동은 움직일때의 마음이라면, 감정과 정서는 꼼짝 안할 때의 마음이다. 포크와 나이프를 보고 날카롭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감정과 정서라면 그것을 나란히 배열, 정렬, 배치, 정동해서 ‘맛있다’로 이행하는 것은 정동이다. 즉, 정서변환양식이 정동인 것이다.

  3. 성장주의 세력들은 산업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라는 네 가지 지층을 중층화하면서 성장의 마지막 파티를 열겠다고 나섰던 것이 팬데믹 상황의 현실이었다.

이 글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녹색연합 발간) 2022 여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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