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공규동은 2022년 3월 26일, 웹진 『생태적 지혜』에 공개된 글1에서 한병철(1959~)이 제기한 리추얼 개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리추얼의 종말』2 에서 리추얼(ritual)은 의례(儀禮)이다. 의례는 관혼상제와 같은, 삶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규정하며 종교 행사에서 더욱 확실하게 관찰된다.”3
오늘날, 관혼상제나 종교행사 따위의 리추얼은, 근거가 불확실하며 개인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만드는 겉치레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여러 정치체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각각이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지는 방식의 많은 부분을 답습하면서, 중요한 풍습 가운데 하나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한병철은 이러한 리추얼들이 미래 세계에서, 전통적 풍속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일면으로 순기능을 하리라고 보았다. 또한 한병철은 ‘진정성’이라는 것과 리추얼을 대비시켜 리추얼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아래 인용하는 공규동의 글은 한병철의 ‘진정성’ 개념을 리추얼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
“리추얼의 반대쪽에는 진정성이 있다. 여기서 진정성은 즐거움, 슬픔, 가치 등 모든 인간의 감정과 판단을 포괄한다. 누군가의 부고를 들었을 때, 리추얼에서는 슬프지 않더라도 아이고, 아이고를 밤낮으로 외쳐야 하지만 진정성에서는 자신이 슬프지 않다면 슬픔을 나타내지도 않아도 괜찮다. 리추얼의 대척점에 놓인 진정성의 세계는 에고를 중심에 놓는다. 여기엔 공동체의 여지가 없다. 에고를 중심에 놓을 때, 각각의 에고는 상호간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집합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에고 중심의 진정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활발한 소통을 원칙으로 삼는다. 낱낱의 에고들, 개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한다.”4

이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진정성이란 ‘주체적인 동시에 독립적이고자 하는 인간이 자신의 그러한 의지를 타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드러내는 생각과 감정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정성은, 에고를 중심으로 세계에 대응하는 주체적 개체들이, 세계의 최소단위를 이루면서 끊임없이 충돌하는 장(場)으로써의 세계에서, 서로에게 각자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발신하는 현상의 최소한이라고 설명하여 볼 수 있다. 여기에서의 주체적 개체가 견디지 못하고 결단코 허용하지 않으려는 행위의 예에 딱 들어맞는 것이, 장례식에서 형식적으로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보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진정성 없이 건성건성 슬픈 척하네!’라고 말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정성이란 한 사람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자유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각 개인들에게 진정성을 기대하고 자기 자신 또한 진정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지금 여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논의에서의 개인은 소유권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5에 의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소유권적 개인주의는 인간은 곧 그의 능력과 그의 소유물이라는 생각 위에 구축된 사상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내가 일해서 얻은 결과물이나 재산이 궁극적으로 나의 존재 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사회는 독립된 개인들이 각자의 이익과 소유물을 교환하는 시장이다. 이는 신분 질서가 온존한 상태에서는 그것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 논리라 할 이러한 사상은 개인의 사유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정당화함으로써 아직 자본주의화가 덜 된 곳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할 수 있도록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지나치게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로 만들고, 빈부 격차나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할 것이다.
리추얼
한병철과 공규동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이 경계하는 진정성의 밑바닥에 소유권적 개인주의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을 듯하다. 그리고 한병철과 공규동의 논리는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의 현단계라고 할 수 있는 정동자본주의[affective capitalism]에 대해서는 더 잘 들어맞는 논리인 듯하다. 정동자본주의는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동[affect]을 자본 축적과 이윤 창출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다. 한병철과 공규동은 진정성 또한 정동 나아가 상품의 일종이 될 수 밖에 없음에 주목할 것이다. 이런 상상은 다음의 인용문들에 보이는 한병철과 공규동의 생각과 연결될 때 구체성을 획득할 것이다.
“온갖 의례, 리추얼에는 진정성이 없으며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사실 공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 성과만이 의미 있는 지표이며 나머지는 텅 빈 의미가 되고 만다. 리추얼은 삶에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삶을 안정화한다. 리추얼에서 역할을 찾을 때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6
“반면에 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리추얼의 사회 속에서 개인은 무대의 배우로서 역할을 해야한다. 이미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으며, 그 속에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성당의 미사를 예로 보자. 역할을 맡은 자들은 신앙심 여부와 상관없이 노래를 부르고 행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추얼에서 역할을 부여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무슨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분명하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고 소통을 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발언권을 얻기 위해 증명해야 하는 에고 꾸미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7
한병철과 공규동은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는 상태에서는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필요없다고 본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사람들이 진정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면 그렇게 해서 드러난 진정성은 플랫폼에 수집되어 상품화될 뿐이라고 주장할 듯하다. 인용문 속에 “리추얼은 삶에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삶을 안정화한다. 리추얼에서 역할을 찾을 때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라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리추얼은 ‘사람의 삶에 구조와 역할을 부여하여 삶을 안정화하고 공동체에 자리를 지정하여 주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사가 일상의 일부분인 삶에서, 개인에게는, 역할이 있고, 역할을 부여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 있으며, 이미 정해진 것이 많기에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고 소통을 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으며, 발언권을 얻기 위해 증명해야 하는 에고 꾸미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공규동과 한병철은 생각한 듯하다.
습(習)
공규동과 한병철은 리추얼은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게 제시하였지만, 지금 당장 리추얼 속에 자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정성마저도 수집하여 상품화하는 쳇바퀴 돌리기를 멈추지 않는 정동자본주의가 그런 자리매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자리매김의 어려움은 단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런 어려움이 대단히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논어』에서 볼 수 있다.
“공자(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同志(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君子(군자)가 아니겠는가.””8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열)乎아 有朋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溫이면 不亦君子乎아]9
이는 『논어』 맨 앞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기에서 배움[학(學)]과 익힘[習(습)]은 禮(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로 통칭되는 육예(六藝)에 관한 행위들이라 할 수 있다. 육예는 예의차리기·노래하고 춤추기·활쏘기·말타기·마차몰기·글씨쓰기·셈하기일 것이다. 첫 번째로 꼽힌 禮(예)는 ‘사람사이 혹은 사람과 귀신사이에서 인사치레10 하기’ 혹은 ‘사람사이 혹은 사람과 귀신사이를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다소 번거롭고 형식적이지만 반드시 해야 할 행위를 하기’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리추얼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병철과 공규동은 리추얼을 하는 것이 쉽다고도 어렵다고도 단정하지 않았다. ‘인사치레’를 두고 생각해보면, 리추얼은 쉽지 않다. 먼저, ‘치레’는 겉모습을 꾸미는 일, 대가를 치르는 일, 살다보면 피해가기 어려운 일을 겪어주기 따위를 뜻한다. 말치레, 인사치레, 돌치레 등이 이에 속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인사치레는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인사치레와 손자에게 하는 인사치레는 같을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아침에 하는 인사치레와 잠자리 드시기 전에 올리는 인사치레는 달라야 할 듯하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인지 습(習) 앞에 붙은 시(時)라는 글자의 해석은 섬세함을 요구한다. 일단 시습(時習)을 ‘시간이 나면 복습한다’로 해석하는 것은 잠시 보류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에 앞서 ‘상황[時]에 맞는 행위가 몸에 배게 한다’로 해석해보는 쪽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러니까 시습은 여러 가지 조건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작업이고 이는 결코 쉽사리 행하여지지 않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보면, ‘同志(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有朋自遠方來]’는 글귀는, 주변에서는 이 섬세한 작업을 인내하여 줄만한 이웃을 찾기 어려웠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논어』 속의 세계에서 습(習)을 추구하는 자는 드물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의례의 습을 권하는 『논어』의 첫 문장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君子(군자)가 아니겠는가’ 라는 문장으로 이어졌다. 이는 의례를 몸에 배게 하려는 자들에게 소수자 되기를 감수할 것을 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하나 더 가능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의례[리추얼]을 몸에 배게 하려는 자는 소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개체의 독립과 개성의 추구를 미덕으로 꼽는 문화는 정동자본주의의 등장 이후에도 그 새로운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자리매김 되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성의 추구가 인간을 고립시키는 면에 주목하면서, 개체 간의 연결이 인간을 독립과 주체라는 요구의 중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리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 전망을 살펴보고, 『논어』를 매개로, 한국문화전통 위에서 그와 같은 전망이 어떻게 작동할런지에 대한 상상을 곁들여보았다. 공규동과 한병철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리추얼 속에 내 몸을 맡기는 선택은 정동자본주의 속에서는 소수자로 남을 각오 없이 할 수 없는 선택 같았는데, 그런 현실을 더 실감나게 느끼게 하여 준 계기는 『논어』가 제공해 준 듯하다.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가 리추얼을 추구한다는 것은 정동자본주의의 압박을 자초하는 것인 동시에, 아직은 외로움도 감수해야만 하는 선택일 것이다.
공규동, 「탈성장, 데팡스와 리추얼의 복원 이야기」,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기획),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3-06-05, 112~122쪽. 이 글은 2022년 3월 26일, 웹진 『생태적 지혜』에 게재되었던 것이다. ↩
한병철(지음), 전대호(옮김),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김영사, 2021-10-15. [Han, Byung-Chul, Vom Verschwinden der Rituale ; Eine Topologie der Gegenwart, Ullstein Verlag GmbH, 2018-09-21.] ↩
공규동,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탈성장, 데팡스와 리추얼의 복원 이야기」, 119쪽. ↩
앞의 책, 119쪽. ↩
C. B. 맥퍼슨이 홉스와 로크 등의 사상을 분석하며 정립한 용어 ↩
공규동,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탈성장, 데팡스와 리추얼의 복원 이야기」, 121쪽. ↩
앞의 책, 119~120쪽. ↩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論語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1,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0, 17~18쪽.↩
앞의 책, 17~18쪽. ↩
‘치레’는 겉모습을 꾸미는 일, 대가를 치르는 일, 아기가 돌 전후로 크게 앓는 일 따위를 뜻한다. 말치레, 인사치레, 돌치레 등이 이에 속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