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마이클 하트 「정동되는 힘」①

로렌 벌랜트와 바뤼흐 스피노자는 둘 다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기획이 반드시 정동의 지형 안에서 형성되고,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기획의 열쇠는 우리의 정동되는 힘을 약함이 아니라 강함으로 인식하는 데 있으며, 우리가 비주권적 주체임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깨닫는 데 있다. 우리는 정동을 경유할 때에만 해방과 기쁨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은 마이클 하트 「정동되는 힘」 번역본 중 첫 번째 글이다.

※ 서지사항



로렌 벌랜트의 작업은 정념에 대한 탐구로 가득 차 있다. 즉 제도적 맥락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성적 만남과 미적 경험 안에서, 정치적 사안과 경제적 투쟁 안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정동되는 다양한 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정동을 통한 그녀의 여정이 가진 목적은 단순히 현대 사회에 살면서 야기된 정서적 손상이나 우리의 욕망이 좌절되는 방식을 기록하거나 목록화―애통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에 그녀는, 사람들이 이 세계 안에서 새로운 친교, 새로운 결속,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창출해내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고통‧쾌락‧불만‧갈망을 우리가 뒤따를 발자국으로 간주한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하고 위협적인 세계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거나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벌랜트는 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명명하기 위해 고전적인 생각―우리는 좋은 삶을 위해 힘쓰고, 인간적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을 되살려낸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심지어 좋은 삶의 기획을 향해 정동을 긍정하는 것은 이상한 조합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전적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 혹은 적어도 우리에게 전해져온 것은 우리를 노예 상태로 묶어두는 끈이 정념이며,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번영하려면 주권적 이성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벌랜트의 작업에서 좋은 삶을 성취할 유일한 길은 반드시 정동과 함께 그리고 정동을 통해 구축되어야 한다.

Portrait of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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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나는 벌랜트의 기획의 틀을 이해하려면 그것과 강하게 상응하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기획과 연관해 제시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스피노자를 잘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벌랜트는 비밀스런 스피노자주의자로 불릴 만하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의 힘에 의해 정동된다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며, 힘이다. 정동되는 힘을 이해하는 첫 번째 근사치로서, 그것을 실제로 세계 안에 있는 능력치, 그 다양한 힘들을 등록하고 느끼는 능력치라고 생각해보자. 일단 우리가 우리의 힘을 정동되는 쪽으로 개방하고 확대하면, 우리는 정동 중에서 선택하는 작업, 그래서 이로운 것을 반복, 확장하고 해로운 것을 막는 수단을 발견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바로 그것이 정동을 통한 길, 정동과 함께 하는 길, 기쁨과 번영을 향하는 길이다.

이 과정의 첫 걸음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realistically)’ 잘 살펴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주권적 주체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벌랜트는 올바르게도 우리의 개별적 주권을 가정하거나 정치적 주권권력을 구성 및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표준적인 윤리적 명령’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주권적 개인을, 칼 슈미트의 정치적 공식에 따라, ‘결정하는 일자’로 간주해보자.2 벌랜트는 이 서술의 두 요소인 ‘일자’와 ‘결정’ 모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주권적 결정은 자기-통제의 환영, 즉 “객관적 상태로 오인된 환상” 위에 거주한다.3 벌랜트가 말하길, 사람들은 늘 자기 확장 기획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결정에 대해 유의미한 통제권을 거의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은 생각을 양적인 용어로 표현한다.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개인의 힘 혹은 제한된 주체들의 힘은 그들의 힘과 자연 전체의 힘 간의 관계에 비례한다. “인간이 존재하려고 애쓰는 힘은 제한되어 있으며, 그 힘은 외부 원인의 힘에 의해 무한히 능가된다.”4 오직 신(혹은 자연 전체)만이 자기-원인인데, 그에게는 외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바깥 세계의 힘이 우리 자신의 힘을 너무 많이 능가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세계에 정동하거나[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우리 자신을 자율적으로 정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타자들에 의해 정동된다[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의 주권적 의사 결정 능력도 미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슈미트 격언의 나머지 반쪽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다. “일자”는 결코 결정하지 못하며, 작용하거나 작용받지 않는다. 주체는 결코 일자가 아니다. 벌랜트가 제시했듯이, 작용인과 인과성은 통일체로서가 아니라 “인격적 수준에서뿐 아니라 제도적 수준에서의 분산된 환경 메커니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5 스피노자도 이것을 수학적‧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한다. 그가 설명하길, 하나의 신체 혹은 한 개인은 무수한 부분들이 서로 일치하고, 따라서 일관된 방식으로 소통할 때에만 형성된다.6 하나의 신체에게 본질적인 것은 관계이다. 즉 신체는 관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살아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체로 생각하는 대신 다양체들 간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분산된 풍경의 일관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결정의 장소 혹은 작용하거나 작용받는 장소를 식별하기 위해, 우리는 일자가 아니라 다자(多子)들 간의 일관된 관계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힘이나 통일성 혹은 우리 자신의 자율적 지배력 등의 상대적 결여에 애통해하자는 것이 논점이 아니다. 사실 스피노자는 주권적 주체라는 환상을 유지하면서 우리가 정념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꾸짖는 그러한 현자들을 조롱한다. “철학자는 정념을, 우리가 악하다고 비난받게 만드는 것으로, 인간들이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탄에 빠뜨리고 힐난하는 것이 그들 철학자들의 관습이다. 혹은 마치 철학자의 목적이 사람들을 저주하는 일에서 다른 누구보다 더 열심인 것처럼 보이려 하는 데 있는 듯하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으며, 나아가 그들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과도한 찬사를 퍼붓고 현실에 존재하는 것에는 비방을 쏟아내는 법을 익혔을 때 자신들이 최정상의 지혜를 획득하고 있다고 믿는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들이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철학자들이 써내려갔던 것은 대부분 윤리가 아니라 풍자였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정치이론을 결코 고안해 낸 적이 없다.”(『정치론』, 1장 서론)7 대신 실천적인 정치이론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정념’에 주로 사로잡힌 곳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벌랜트는 비주권자의 지형을 “중단interruptions”이나 “중지intermissions”라는 용어로 제시하는데, 이는 주권적 주체의 자기 확장이라는 허구적 노력을 깨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용어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왜냐하면 벌랜트가 분명히 밝혔듯이 이 용어들은 예외가 아닌 규범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중단과 중지 속에 산다.)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  by Duke University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283586107756405294/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
사진 출처 : Duke University

그래서 우리가 ‘결정하는 일자’라는 용어로 이론화를 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실재론적 관점은 우리를 힘이 없다고 비난하는가?8 스피노자도 벌랜트도 그저 우리 세계의 재앙을 이야기하고, 우리가 겪은 손상을 열거하는 것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상대적 힘의 결여를 인정하는 일은 비주권적 주체들의 윤리와 정치를 이론화하고, 우리의 힘을 증가시키려는 해방의 기획을 이론화하기 위한 견고한 출발점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정동되는 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동되는 힘’은 좋은 삶과 번영을 위해 애쓰는 비주권적 주체들이 이용할만한 길을 가장 밝게 비춰주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는 다른 어떤 스피노자 연구자들보다도 정동되는 힘을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윤리적․정치적 기획을 위한 풍부한 장을 구성하는 방식을 탐구한 유일한 사람이다. 들뢰즈가 자주 언급한 스피노자 해석의 시금석은 그 누구도 “하나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신체의 구조가 무엇인지”(『에티카』, 3부 정리 2 주석[한글본] 163쪽)를 아직 규정하지 못했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러한 미지의 장은 저항할 수 없는 부름을 가한다. 『암흑의 핵심』(조셉 콘래드)에서 찰스 말로가 자신이 가진 아프리카 지도의 한 가운데 있는 어두운 텅 빈 공간에 이끌렸던 것처럼, 들뢰즈도 하나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신비로 끌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단지 앎에의 욕망에 의해서만 추동된 것은 아니다. 벌랜트가 말했듯이, “그것은 정치적 문제이다. 물론 그것이란 몸이다.”9 이는 들뢰즈와 스피노자가 완전히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조심스럽게 따르는 스피노자의 경로는 간접적인 것이다. 즉 하나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이 어떻게 정동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설명했듯이, “하나의 몸은 그것을 구성하거나 혹은 정확히 같은 것에 이르는 관계의 총화(ensemble)에 의해, 그것의 정동되는 힘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10 몸의 구조는 그것이 정동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의 정동되는 힘이 지닌 본성을 알지 못한다면 이해될 수 없다.11

들뢰즈는 정동되는 힘의 두 가지 층위를 보여준다. 첫째, 행동하는 힘에 상응하는 정동되는 힘, 둘째, 정동되는 힘을 구성하거나 채우는 정서/변용affection의 질과 그 질이 변형될 수 있는 방식. 첫 번째 층위에서의 논증은 정동되는 힘을 중요하게 만들고 고양시키는 데에 바쳐진다. 주권적 주체가 외부 힘에 영향을 받거나 움직여지지 않는(혹은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자신을 상상하는) 반면 그리고 주권을 목표로 하는 기획이 타자의 영향을 최소화하려고 애쓰는 반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 의해 정동되는 것을 ‘덕’으로 생각해야 한다. 가장 강한 자는 최소한으로 정동되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최대 그리고 최고의 방식으로 정동되는 자이다. 여러 방식으로 정동되면 될수록 더욱더 살아있는 것이며, 정동되길 중단하고 세계를 차단하는 만큼 더 많이 죽는 것이다.12 그러므로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우리의 행동하는 힘과 우리의 정동되는 힘 간의 상응 혹은 등가성을 읽는다. 모든 제한된 주체들에 대해, 즉스피노자의 용어로는 모든 존재 양태들에 대해 들뢰즈는 “본질은 행동의 힘과 동일하며, 행동의 힘은 정동되는 힘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13 들뢰즈는 여기서 실제로 두 힘, 즉 정동하는 힘과 정동되는 힘 간의 동일성이 아닌 등가성을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이러한 들뢰즈의 등가성 주장이 『에티카』를 무심하게 읽는 독자들에게는 곧바로 눈에 띄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 분야의 학자들에게도 널리 인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일정부분 다음의 정리에 의거해 자신의 해석을 입증하는데, 비록 그것이 몸과 마음의 평행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목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이를 통해 두 힘, 즉 행동하는 힘과 정동되는 힘 간의 등가성을 주장한다.14 “나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하나의 몸이 한 번에 많은 일을 하는 다른 것보다 혹은[vel] 한 번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 받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비례해서, 그것의 마음은 한 번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다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한글본] 114쪽) 이러한 진술에서 상응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혹은”을 등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어내야 한다. 즉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는 힘을 가진 하나의 몸은 또한 여러 방식으로 정동되는 능력을 가진다. 들뢰즈는 또한 [같은 주석에서] 다음 두 번째 구절을 인용하는데, 여기서도 “혹은”은 등가성을 표시한다. “인간의 신체를 엄청나게 많은 방식으로 정동될 수 있게 배치하는 것이 무엇이건 인간에게 이롭다. 즉 몸을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정동될 수 있게 혹은[vel] 다른 몸들을 정동할 수 있게 할수록 그만큼 더 유용하다. 반면 몸을 이러한 일에 유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해롭다.”(『에티카』, 4부 정리 38[한글본] 267쪽) 여기서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동하는 힘과 그에 상응하는 정동되는 힘이 이롭다고 주장하고는, 재빨리 이어지는 정리에서 “선”은 우리에게 이롭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며 “악”은 우리가 해롭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처럼 우리의 정동되는 힘의 상응과 긍정은 중요한데, 그것이 윤리적‧정치적 활동을 위한 대안적 경로를, 더욱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기 때문이다. 당신(혹은 타자들)에게 스스로 삶을 통제하거나 이성의 명령에 따르라고 명하는 대신, 당신이 정동될 수 있는 범위와 수를 늘이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당신의 세계와 당신 주위의 사람들을 느끼고 그들에게 감정을 표하기 위해 당신의 힘을 탐색하고 확장하라. 결국 [자기통제를 하라는] 첫 번째 길―이 길은 근본적으로 금욕적이다―은 당신의 힘이 외부 힘에 의해 능가되는 정도에서 차단된다. 자기-통제와 숙달의 길을 가려고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보라. 하지만 아마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정동되는 길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정념에 사로잡힐 수 있고, 그것들을 실행할 수 있고, 정념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이 길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고 선하다(혹은 이롭고 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념을 통한 이 대안적 길은 결국 빛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단테의 하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정념에 관련된 어둠은 없다. 정념 또한 다른 힘들만큼 덕이 있는 힘, 즉 정동되는 힘을 구성한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최고의 접근권을 가진 실재 있는 그대로의 힘이며, 몸과 쾌락의 장을 밝히는 힘이다.15

정념의 윤리적‧정치적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정동되는 것이 양성되는 힘임을 인식하는 것은 좋은 첫 걸음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정동되는 힘을 긍정하고 확장하는 것은 아직 정치적 기획이 아니다. 정동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의 상응은, 이 점에서는 단지 잠재적인 것에 불과하다. 눈가리개를 하고 더 많은 화살을 쏘아보는 것이 과녁을 맞힐 기회를 더 늘릴 수 있듯이, 정동되는 힘을 키우고 그래서 상호작용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기쁜 마주침을 경험할 잠재력을 배가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적 기획은 그것[잠재력]을 위태롭게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좋은 것, 즉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오는 것을 지속하고 반복하게 만들 방법을 발견해야만 한다.

※ 다음회에 계속…..


  1. 나는 여기서 벌랜트 자신의 작업과 확실히 잘 들어맞는 그녀의 퀴어 현상학의 특성을 다른 말로 바꿔 표현한다. “퀴어 현상학은 정서적 손상의 징후가 되는 증거를 모으는 것과 주로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살아갈 방법을 위해 새로운 시작을 창출하고, 미개척의 삶을 제공할 갈망과 친근감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것 혹은 삶을 만들고 건설하는 실천을 다시 상상하기 위해서 타자들을 위한 기회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아웃사이드한 친근감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것과 관련된다.” Berlant, L., Cruel optim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1, p. 198.

  2. Schmitt, C.,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trans. Schwab, G.,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한글본]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정태호 옮김, 살림, 2012.

  3. Berlant, Cruel optimism, p. 97.

  4. Spinoza, B., Ethics in collected works, trans. Curley, 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4부 정리 3. [한글본]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옮김, 피앤비, 2011, 239쪽.

  5. Berlant, Cruel optimism, p. 114.

  6. [옮긴이주] 해당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크기가 같거나 다른 약간의 물체들이 다른 물체들로부터 압력을 받아 서로 접합할 때, 혹은 약간의 물체들이 같거나 다른 속도로 운동하면서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어떤 일정한 비율로 전달할 때, 우리는 그러한 물체들이 서로 합일되어 있다고 말하며, 또 그 모든 것들이 다함께 하나의 물체 또는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물체 또는 개체는 물체들의 이러한 합일에 의해 다른 물체들과 구별된다.” 『에티카』, 2부 정리 13 정의([한글본] 117쪽).

  7. Spinoza, B., Political treatise in complete works, trans. Shirley, S., Indianapolis: Hackett, 2002, p. 680. [한글본]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정치론』, 김호경 옮김, 갈무리, 2009, 17-18쪽.(본문의 인용문은 한글번역본을 따르지 않았음.)

  8. 벌랜트는 주권적 주체라는 수사를 포기하는 것이 중속당하는 주민의 투쟁을 침식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를 의문시하며, 그에 따라 전략적인 주권 주장과 같은 것이 정당화되고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어떤지―비록 그녀가 이 길을 택하지 않는다 할지라도―를 의문에 붙인다. “누군가는 자기-관계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주권적 인격체․공민의 대중정치나 시민사회 정치를 포기하게 되면 불평등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집단들에게, 주권적 대의와 권위 등의 절차를 규정하는 특권, 그리고 인간을 자기비준의 방식으로 개념화하는 특권을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Berlant, Cruel optimism, p. 98. 이러한 질문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왜 전략적인 주권 주장이 정치적으로 생산적이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지면상이든, 주제상이든] 넘어서는 것이다.

  9. Berlant, Cruel optimism, p. 267.

  10. Deleuze, G., “L’affect et l’idée,” Course lecture at the Université de Paris VIII, Vincennes, 24 January, 1978, Available at www.deleuzeweb.com in the original French and English translation. [한글본] 질 들뢰즈 외, 「정동이란 무엇인가?」,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46쪽.

  11. 들뢰즈는 경주마와 작업용 말은 같은 종에 속하지만 정동의 관점에서 보면 닮은 점이 거의 없다고 설명한다. 경주마의 정동되는 힘은 경주견인 그레이하운드와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작업용 말의 정동되는 힘은 소와 더 많은 것을 공유한다. Deleuze, “L’affect et l’idée,” 1978. [한글본] 『비물질노동과 다중』, 47-48쪽.

  12. 인간의 몸은 그것이 “많은 방식으로 정동되는 일을 완전히 할 수 없게 될 때” 파괴된다. Spinoza, Ethics in collected works, 1985, 『에티카』 4부 정리 39 증명. [한글본] 268쪽.

  13. Deleuze, G., Expressionism in philosophy: Spinoza, trans. Joughin, M., New York: Zone Books, 1992. p. 225.(수정된 인용) 영역자인 마틴 조그힌Martin Joughin은 “정동되는 힘(pouvoir d’’être affecté)”을 일관되게 “정동되는 역량(capacity to be affected)”으로 해석한다. 나는 좀 더 문자 그대로의 “정동되는 힘”을 선호하는데, 그것이 이 힘과 행동하는 ‘힘’ 간의 상응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한글본] 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권순모 옮김, 인간사랑, 2003, 305쪽.

  14. 들뢰즈는 p. 383의 각주 14([한글본] 위의 책, 301쪽)에서 이 구절과 우리가 뒤이어 언급할 구절을 모두 인용한다. 참고적으로 스피노자가 이 구절들에서 사용한 “혹은” 즉 라틴어 “웰(vel)”은 그의 유명한 정식 “데우스 시웨 나투라(deus sive natura)”, 즉 ‘신 즉 자연’에 사용된 것—이는 통상 두 용어 사이의 등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된다—과는 다르다. [하지만] 내 생각에, 들뢰즈는 올바르게도 인용된 구절들에서의 ‘웰(vel)’도 등가성으로 해석한다.

  15. 이 글에서 내가 애쓴 것 중 일부는 정동되는 힘에 초점을 둠으로써 푸코의 ‘쾌락의 정치’와 들뢰즈의 ‘욕망의 정치’가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로 그 둘이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가 푸코에게 썼던 짧은 편지인 「욕망과 쾌락」([한글본]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엮음,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푸른숲, 1997, 98-115쪽에 수록됨)으로 돌아가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1976년 들뢰즈는 푸코의 『성의 역사』 1권을 읽었다. 하지만 그 즈음 정치적 논란으로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갔기 때문에 들뢰즈는 『성의 역사』에 관한 편지를 썼고 그들 모두와 친구였던 프랑수아 에발드(François Ewald)에게 그것을 푸코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편지는 푸코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 특히 그에 몇 해 앞서 출판된 그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의 비교를 강조한다. 들뢰즈가 말하길, 그와 가타리가 ‘끝없이 생산적인 욕망’에 초점을 맞춘 반면, 푸코는 그[들뢰즈]가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라고 본 쾌락에 관심을 둔다. 들뢰즈는 이를, 푸코가 억압가설을 비판하고 대신 권력을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과 연결시키는데, 그에 반해 들뢰즈‧가타리는 권력을 반응적인 것으로, 즉 욕망을 억압‧억제‧회복하는 응답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그보다 10년 전 쯤에 쓴 스피노자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두 기획―욕망과 쾌락―이 다른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길에 있음을 볼 수 있다. 푸코가 몸과 쾌락을 반격을 위한 집결지로 규정할 때, 그는 정동되는 힘을 긍정하고 그것을 정치행위의 제 1의 장으로 지시한다. 우리는 단순히 수동적 정서에 지배되는 우리의 정동되는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이 정서를 능동적으로 만들고 그래서 우리의 기쁜 마주침을 증가 및 지속시키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서 쾌락의 정치와 욕망의 정치가 완전히 중첩된다.

박성진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공분야인 영문학에서는 낭만주의에, 비전공분야인 철학에서는 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에 관심이 많다. 문학과 철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연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빗발쳤던 낭만주의 시대에 쓰인 시들을 좋아하고,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상상력을 좋아한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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