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⑨ 일자리 따라 순천에서 광양으로

시간이 흘러 큰아들이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보성댁 작은어머니댁 막내아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다. 보성댁 남편 상덕씨는 광양 성당에 일자리를 얻고 가족이 광양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 살면서 첫 딸아이를 얻는다.

보성댁은 큰아들 입학식에 입던 옷이나마 깨끗하게 손질해 입혀 함께 손잡고 갔다. 
사진 출처 : Mark Gayn
보성댁은 큰아들 입학식에 입던 옷이나마 깨끗하게 손질해 입혀 함께 손잡고 갔다.
사진 출처 : Mark Gayn

순천으로 나와서 한 해 가고 두 해 가서 큰아들이 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는 설렘에 남들처럼 새 옷에 새 신발 장만해서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먹인 것이 없어도 버럭버럭 크는 키를 따라 발도 쑥쑥 커서 신발만 겨우 새로 장만해 줬다. 보성댁은 작은어머니네 막내아들이 란도셀을 매고 짤랑짤랑 가는 양을 부럽게 보기만 했다. 작은어머니네는 장사 수완이 좋은 작은아버지 덕에 먹고 사는 게 넉넉했다. 거기에다 작은어머니는 아이를 잘 받는 이름난 산파여서 작은어머니의 벌이 또한 적지 않아 살림이 넉넉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는 막내아들에게 새 옷, 새 신발, 새 가방 장만해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성댁은 큰아들 입학식에 입던 옷이나마 깨끗하게 손질해 입혀 함께 손잡고 갔다. 작은어머니도 막내아들 손을 잡고 참석했다. 교사가 아이들 이름을 불러 줄을 세우는 데 작은어머니네 막내 갑은이와 큰아들이 같은 줄에 서 있는 걸 보고 둘이 같은 반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갑은이는 막내로 귀염을 받고 자라서인지 천성인지 성격이 괄괄하고 활달했다.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대장 노릇 좀 하는 모양이었다. 보성댁의 큰아들 정식은 아버지인 상덕씨를 닮아 잘 생기고 키도 컸지만 순하디 순해서 누구 하나 쥐어박고 싸울 줄을 몰랐다.

아들의 국민학교 입학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갑은이가 큰아들과 함께 들어 왔다.

“엄마, 학교 다녀 왔습니다아.”
“아, 학교 끝났어? 어? 갑은이도 같이 왔어?”
“네 누님, 안녕하셔라?”
“그래 집에 안 들르고 바로 왔어?”
“예, 정식이가 자꾸 즈그 집 가자 그래서요.”
“정식이가?”
“예, 엄마가 나가 삼춘보고 우리집 가자 그랬어요.”
“그럼 점심 아직 안 먹었겠구나. 같이 밥 먹자.”

밥 먹는 입이 느는 건 없는 살림에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간간이 보성댁 살림을 살펴 주시는 작은어머니를 생각하면 갑은이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엄마, 엄마. 오늘 학교에서 우리반 아그들이 나 때릴라 그랬거든요?”
“어? 먼 아들이? 왜?”
“이잉, 근디 삼춘이 말개줘서 나 안 맞았어요.”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어?”
“예, 삼춘이 쌈 잘 해서 우리반 아그들이 다 져요.”
“와, 삼춘이 그렇게 쌈 잘 해?”

같이 밥을 먹던 둘째 용식이가 덩달아 신이 나 했다.

“이! 우리 반에서 제일 잘 해.”
“아이고 그래도 아그들이랑 쌈하고 글믄 못 쓴다.”

이제 여덟 살밖에 안 되는 애들이 싸움을 해봐야 얼마나 하랴 싶었지만 마음이 여리고 착해 누구 하나 때리고 쥐어박는 걸 못 하는 큰아들이 반 아이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형편인 모양인데, 동갑이면서도 삼촌이라고 지켜주는 갑은이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개구쟁이여서 작은어머니가 은근히 골치 아파했지만 그 어린 사촌 동생 때문에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면서 지들끼리 투닥거리는 일도 없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어이, 우리 광양으로 가세.”

저녁을 먹던 상덕씨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예? 광양이요?”
“이, 신부님이 나더러 광양 공소회장으로 가믄 어쩌겄냐고 하시대.”

광양에 성당이 없어 일요일이면 순천에 있는 성당으로 미사하러 오는 사람이 제법 되더니 드디어 광양에 땅을 사서 공소를 설치하고 두루두루 관리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일전에 들었었다. 광양에는 아는 사람도 없는디……. 아그들은 누가 봐주제? 걱정부터 앞섰다.

“공소회장으로 가믄 많지는 않아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올 것이고, 성당 땅에 살 만한 집이 있어서 거기서 살믄 된께 집세도 안 나가고 사는 게 쫌 낫지 않겄는가?”

순천에서 광양으로 이사가다

사실 순천으로 와서 사는 2, 3년 동안 여수머리에서 가지고 나온 쌀은 집세로, 아이들 입성으로, 이러저러한 자질구레한 살림으로 시나브로 없어져 갔다. 굳이 친정에 갖다 퍼주지 않아도, 집도 절도 없는 순천으로 나올 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꽉 쥔 주먹에서 흘러 나가는 모래알처럼 무망하게 사라져가는 쌀가마니를 헤아리며 보성댁의 마음은 늘 위태로웠다. 그렇다고 저 고물대는 자식들 입에 쌀밥 한 그릇 맘껏 먹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러는 중에도 신앙심이 깊은 두 부부는 아이들 데리고 성당에 열심히 다녔고 성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상덕씨를 눈여겨 보던 신부님이 상덕씨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보성댁의 남편 상덕씨는 한 마디로 점잖은 사람이었다. 보성댁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큰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없었다. 호두에서 떠나오기 전, 시어머니의 심술 앞에서 보성댁을 한 번 때린 후로 큰소리를 내는 경우도 더군다나 때리는 일은 더욱 없었다. 거짓을 말할 줄 몰랐고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모른 체하지도 못했다. 없는 살림에 누구에게 후하게 베풀 형편은 되지 않았지만 밥 한술이라도 나눠 먹으려 했다. 그런 성격 탓에 장사로 돈을 버는 사람이 못 되었으리라. 비록 정식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국문과 한자는 쓰고 읽는 것을 배워 학교 다닌 사람 못지않게 쓰고 읽었다. 천성이 책 읽는 것을 좋아하나 책을 사서 읽을 형편은 아니었고 쉽게 접하는 것이 성당에 가면 있는 《경향잡지》에 이런저런 종교 서적이라 그런 책들을 가져와서 열심히 읽어 어쩌다 보니 교리라든가 하는 건 고등학교, 대학교 다녔다는 사람들보다 뒤처지지 않았다. 신부님이 공소회장으로 가도록 권유를 한 데에는 그렇게 상덕씨가 종교적 지식을 쌓아 올린 것도 작용하였다.

어쨌거나 그렇게 살림을 광양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광양으로 이사가게 되던 날, 섭섭해 하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뒤로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기차를 타러 갔다. 많지 않은 살림이지만 다섯 식구 살림이라 이고 지고 갈 수 없어 삼륜 트럭에 싣고 상덕씨와 성당에서 가까이 지내던 요셉씨가 같이 먼저 갔다.

보성댁은 순천에서 광양으로 이사를 간다. 가족은 집과 삶의 공간이 바뀌어도 늘 함께 한다. 이사를 다니면서도 아이를 낳고 자신의 역할을 이어나간다. 
사진출처 : pxhere
보성댁은 순천에서 광양으로 이사를 간다. 가족은 집과 삶의 공간이 바뀌어도 늘 함께 한다. 이사를 다니면서도 아이를 낳고 자신의 역할을 이어나간다.
사진출처 : pxhere

성당은 기차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 금방 찾아갈 수 있었다. 삼륜차는 이미 살림살이를 내리고 무거운 짐은 집안으로 들여놓고 요셉씨는 삼륜차와 함께 돌아가고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집을 보게 된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와! 우리 이제 이 집에서 살아요?”
“와, 진짜요? 진짜요?”

망해 먹은 지주가 살던 집을 샀다더니 넓은 터에 넓은 집이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넓은 대청 마루방은 신자들이 모여서 미사를 드리거나 공소예절을 드리는 장소로 이용을 하였다. 순천에서는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았는데 부부가 사용할 안방 말고도 아이들끼리 잘 방을 따로 줄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보성댁네가 순천으로 이사한 후 종종 작은아들을 찾아와 단칸방에서 같이 자다가 가곤 했는데 여기에서는 시어머니가 주무실 방을 따로 드릴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혼자 잠들기보다는 손자들 옆에서 자는 것을 더 좋아하였지만. 그러고도 방이 남아 교리 공부를 하는 장소도 따로 있었다.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넷째를 낳아

행랑방에는 다압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원래 살던 지주네 집에서 행랑살이를 하던 사람이라 했다. 집이 팔리면서 갈 곳을 아직 구하지 못해 행랑에 머물고 있었다. 뜰의 건너편에는 외양간도 있어서 소 한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 행랑살이하는 집에서 기르는 소라 했다. 행랑살이의 마지막 새경 삼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 집에는 열두엇 먹은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소를 몰고 나갔다 오곤 했다. 큰아들은 심심하면 소 몰고 나가는 뒤를 따라가 한나절을 놀고 오기도 했다. 몇 달을 그렇게 함께 살다가 다압댁은 자기집을 구해 나갔다. 이유야 어쨌건 몇 달을 한 울타리에서 살았다고 서로 정이 들어 섭섭한 마음으로 그들과 작별하였다.

광양에 이사하기 직전에 보성댁은 넷째를 가져 이사하고 달이 지나 몸을 풀었다. 먼저 아들 셋을 가졌을 때와 달리 입덧이 심해 고생을 많이 하고 아이를 낳으니 딸이었다. 처음에 아이를 낳고 아들들을 보성댁에 쉬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더니 자꾸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 갓난아이가 궁금하기도 했고 못 들어오게 하니 더 들어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광양으로 와서도 형들과 자지 않고 보성댁 옆에서 자던 셋째 응식이가 자주 칭얼거렸다. 네 살밖에 안 되었으니 동생의 존재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기도 했을 것이다.

일주일쯤 지나자 보성댁은 더이상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첫국밥도 끓여주고 산후 빨래도 도와줬지만 그뿐이었고 이젠 보성댁이 아이들도 돌봐야 했고 집안 살림도 살펴야 했다.

아들 셋을 낳고 처음으로 딸을 낳으니 남편 상덕씨가 무척 좋아했다. 아들만 셋을 연달아 보다 딸을 보게 되니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들 셋을 돌보며 집안 살림도 살펴야 하는 보성댁은 갓난아이가 운다고 곧바로 안고 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남편 상덕씨가 집에 있을 때면 틈만 나면 아이를 안고 살았다. 혹 눕혀 두었는데 ‘에-’하는 소리만 나도 상덕씨가 바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이가 우는 소리를 못 참아했다.

“예말이요. 그렇게 안아 줘 버릇흐믄 손을 타서 못 쓴단 말이요. 애기가 좀 울기도 하고 그러는 거제. 뭘 그리 안아싼다요.”
“이 알았네 알았어. 알았응게 그만 하소.”

보다 못한 보성댁이 한소리 하면 잠시 보성댁 눈치를 보는 듯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보성댁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없는 무뚝뚝한 상덕씨였지만 딸을 안고 있으면 입이 벙글어져 다물 줄 몰랐다. 한편으론 나 몰라라 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저리도 좋을까 싶었다. 보성댁 자신이 아들 없이 딸만 넷인 집안에서 자라다 보니 딸이란 존재가 그리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첫딸을 가졌을 때 입덧을 심했는데 둘째, 셋째 딸을 가졌을 때도 입덧이 심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자리보전하고 누웠다가 닭고기 한 그릇 먹고 나면 기운을 차려 일도 하고 성당에도 갈 수 있게 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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