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평화운동] ①생명평화결사의 태동과 생명평화운동

우리 사회는 경쟁과 편가르기,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 되어 있다. 지리산 천일기도로부터 출발한 생명평화 운동이 시작된 지 20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생명평화결사’ 활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미얀마 사태는 물론 개발폭력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된다. 우리 안의 폭력의 본능을 잠재우는 것으로부터 제도와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제도화된 폭력들을 걷어내어야 한다. 우리 내면의 무지, 분노, 증오, 불신, 적개심을 넘어서야 생명평화의 세상이 싹틀 것이다.

1. 근대화의 굴절과 폭력

한반도를 중심으로 둘러싼 공간들은 지난 200여 년 동안 이른바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다양한 ‘폭력’의 전시장이었다. 인간세계에서 인간에 의해 자행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한반도와 그 주변공간에서 이루어졌고 일부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조선왕조의 폭정에 저항하는 민중봉기와 진압으로부터, 천주교의 전래를 둘러싼 폭력적 박해, 개항을 둘러싼 서구세력과 조선의 폭력적 대결, 동학농민에 대한 일제와 조선관군의 학살, 3,1운동에 대한 폭력적 진압,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일제의 폭력,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념과 노선을 달리한 이유로 서로에게 가한 폭력들, 해방공간에서의 근대국가 설립을 둘러싼 좌우의 폭력과 분단, 6.25전쟁과 이후의 남북대결과정에서 행해진 상호폭력, 5.18등만을 이야기해도 넘쳐난다. 여기에 더해 성폭력을 비롯한 사회적인 폭력과 개인의 행동으로 드러난 인간의 폭력을 감안하면 가히 폭력의 세기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 남단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 역시 국가폭력에 맞서며 권력과 위정자들을 적대시하고 집회 및 시위에서는 국가폭력에 맞서는 방어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 했다. 우리는 논쟁을 정당화 했고, 용기 있게 싸우는 투사를 선호했다. 회사를 비롯한 직장에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을 고무했으며,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인생 성공의 길이라는 것이 사회의 주류 인식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전투로 인식하거나 진영논리로 인식하여 조그만한 일에도 편가름이 일어나 대립하기 십상이다. 우리사회는 자고 일어나면 미디어의 주요뉴스가 폭력이다. 일반인들의 살인, 강간, 폭행, 사기 등은 물론이고 국회에서도 언어뿐만 아니라 물리적 폭력이 일반화 되어 있다. 온천지가 개발 현장이고, 우리가 먹기 위한 대부분의 농산물의 생산과정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인간중심의 사회이다. 당연히 자연은 인간의 삶에 복무해야 하는 하위적 인식대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땅을 소유하고, 자원을 소유하고, 급기야 생명을 소유한다. 그리고 땅과 자원과 생명이 이윤추구를 위해, 그리고 인간의 복리를 위해 개발되고 파괴되는 것을 당연시 한다. 생명의 존엄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근대 이전, 다른 생명과의 조화 속에 우리가 살아왔고 조화로운 문명을 유지했다면, 근대문명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폭력의 문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이다.

우리의 삶은 평화롭지 못하다. 우리의 삶은 공생에 익숙하지 않아 왔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웃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과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근대문명이 가져온 자연에 대한 인간우위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국가와 자본의 폭력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내면의 폭력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생명평화결사’를 처음결사하고 생명평화탁발 순례를 통해 한반도에 평화의 화두를 던진 실상사 회주 도법(道法)스님은 다음과 같이 평화를 말한다.

“평화라는 말은 싸움, 전쟁에 대한 상대적 표현이다. 싸움과 전쟁의 원인인 무지, 불신, 불만, 갈등, 대립, 분노, 증오가 없는 상태 즉 싸움과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인 것이다. 화목과 평화의 원인인 이해, 신뢰, 비움, 나눔, 관용, 만족이 있는 상태 즉 신뢰와 사랑이 작동하는 상태가 평화인 것이다. 이 정도일 뿐이다. 그 밖의 특별한 무엇이 있지 않다. 평화는 그 어디에 있는 것도, 그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주체적으로 평화의 삶을 살아야만 실현되는 것이 평화이다. 그 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 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 도법은 ‘생명존재로서의 주체적 자각’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정체성에 기초해 늘 ‘깨어 있으려는 집중력’을 길러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나 자신부터 평화가 되어야 하고 평화를 유지할 깨어있는 힘이 필요하단 이야기로 들린다.

2.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어울림 무늬'는 생명평화 결사의 상징적 로고로서  해와달(우주)의 신령한 기운 아래 새와 물고기, 짐승, 그리고 나무와 풀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명평화의 정신을 상형화 한것임, 생명평화결사의 평생교사인 안상수(날개)선생이 창안한 것임
어울림 무늬’는 생명평화 결사의 상징적 로고로서 해와달(우주)의 신령한 기운 아래 새와 물고기, 짐승, 그리고 나무와 풀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명평화의 정신을 상형화 한것임, 생명평화결사의 평생교사인 안상수(날개)선생이 창안한 것임

“생명평화결사운동은 그 근원을 따져보면 90년대에 일어났던 ‘지리산 살리기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지리산 살리기 운동’을 통해 지리산의 ‘생태적 가치’, ‘종교적 가치’, ‘민족사적 가치’를 발견하고 뒤이어 2001년부터 실상사를 중심으로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 지리산천일기도〉가 시작되었다. 2003년 들어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고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겠다는 등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는 상황에서 천일기도가 끝나는 날인 2003년 11월 15일에 〈지리산생명평화결사〉가 창립되었다. 이후 〈지리산생명평화결사〉는 2004년 3월 1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도법스님을 단장으로 하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순례가 전국단위에서 행해짐에 따라 ‘지리산’이라는 명칭이 특정 지역에 한정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2005년 전국운영위원회에서 공식명칭을 〈생명평화결사〉로 확정지었다.”1

〈생명평화결사〉의 태동은 그 자체로 한반도에서 ⓵‘생명운동의 평화운동으로 확장’과 ⓶‘적대적 대결과 분노의 투쟁으로 상징되던 한국 사회운동의 질적 전환’을 상징한다. ⓵과⓶는 같은 원인을 갖는 사건이지만 의미와 자기발전의 궤적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원인이라 함은 갈등 및 사회문제해결의 방법이 ‘평화’로 등장했다는 지점이다. 어찌되었든 사회운동 일반은 2000년대 생명평화결사의 태동이후 ‘평화’라는 언어와 방법을 많이 운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각종시위가 ‘비폭력 평화집회’를 바탕으로 한다든지 시위방법으로 ‘삼보일배’, ‘단식농성’, ‘촛불집회’ 같은 방법을 택한다든지 등이다. 물론 이것은 생명평화결사의 공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평화의 기운이 점점 확장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 정점은 2016년을 달구었던 ‘광장의 촛불’을 통한 혁명이었을 것이다.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보자고 하면, 1980년대 원주를 중심으로 한 ‘생명운동’의 제창 이래 주로 ‘농(農)’을 매개로 한 생협운동 및 공동체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었다. 즉, ‘공생’, ‘협동’, ‘생태’ 등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생명공동체운동을 동심원적으로 확장 하던 중이었다. 생협운동, 유기농업운동, 귀농운동, 마을공동체운동, 공동체운동, 대안교육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생명평화결사의 활동은 생명운동의 전통적 가치와 운동 범주를 뛰어넘어 ‘평화’라는 가치를 전면에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생명평화결사의 초동 주인공들이 다양한 직업(스님, 신부, 목사, 원불교 교무, 시인, 농부, 교수, 시민사회 활동가, 교사 등)인 것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에 다양한 영역에서 ‘평화’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4년 3월 지리산 노고단에서 출발한 생명평화탁발순례는 전국의 모든 지역을 2008년 12월까지 순행하였다. 도법스님을 필두로 한 탁발순례가 5년간 진행되는 동안 전국곳곳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삶의 생명평화를 서약(誓約)한 등불들의 숫자(약 3000명)를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평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2

각 지역마다 다양한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순례단을 마중했으며 순례단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함께 걷고, 지역의 아픈 곳(과거나 현재의 폭력의 현장이나 흔적)을 찾아 함께 이야기하고 같이 ‘생명평화 100배 절 명상’을 올렸다. 순례단원들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한반도 100여년의 근대화 역사과정에서 증오와 분노와 상호 폭력으로 수많은 희생과 죽음으로 상처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서 또 다른 폭력들이 행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평화의 순례를 도는 과정 중에도 여전히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근대문명과 한반도 현실은 여전히 생명이 인간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의 삶과 마음이 폭력에 길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생명평화결사의 초대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이병철 선생은 ‘생명평화운동’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운동의 핵심은 내가 먼저 평화가 되겠다는 우리의 서약이다. 이것은 내가 먼저 주체가 되겠다는 것이다. 기존운동의 핵심은 세상의 불합리함을 지적, 비판, 시정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 운동은 내 자신을 운동의 대상과 목적으로 삼는다. 자기를 치료하고 해방시키는 것이 곧 세상을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노, 탐욕, …. 내 속의 신성을 드러냄을 제약하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 내 속에 있는 병적인 요소들을 치유,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곧 세상을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수많은 논리, 세상을 치유, 해방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어찌 보면 정의란 이름으로 세상을 해방시킨다는 이름으로 수맣은 전쟁, 폭력이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더 많은 고통과 폭력, 아픔을 낳고 있다. 더 이상 생명의 논리라던지, 대립, 갈등을 악순환 시키는 그런 논리는 지양해야 한다. 그런 방식으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더 많은 문제와 악순환을 유발시키는 것이라면 이제는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돌아봐야 할 시기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전쟁을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탐욕, 분노, 증오들이 전쟁을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탐욕에 눈멀고, 분노에 타오르고 증오하고 있다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없다. 결국은 모든 갈등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마음 속에 있는 폭력들, 분노들, 분별심들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 내면의 평화, 마음의 평화가 있을 때, 내가 내면으로 평화로울 때 세상은 평화가 되는 것이다. 내면이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외면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평화’는 사회적인 가치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인간 내면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평화는 일상의 삶을 평화로 수행(修行)하거나 전환하지 않고는 시작되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의식의 진화과제이기도 하다.

3. 구조적인 폭력을 넘기 위하여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생명평화탁발순례의 한 장면. 생명평화결사 제공.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생명평화탁발순례의 한 장면. 생명평화결사 제공.

‘폭력’은 인간이라는 생명 내면에 축적되어 인간이 만든 문명에 내재적으로 구조화된 측면이 있다. 생명은 원핵세포생명이 진핵세포로 그리고 다세포 생명으로 진화했다. 이 과정에서 세포생명과 다양한 요소들은 서로 경쟁과 협동을 통해 생존을 유지하고 점차 복잡한 생명으로 진화 해왔다. 생명이 진화하면서 생존본능에 따른 무리짓기를 통해 ‘협동과 경쟁’을 내면화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 폭력’이 아주 오래된 내면화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경쟁이라는 호전적 본능은 잔인할 정도로 약자와 생존을 위협하는 그룹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으며 인류의 진화사는 폭력의 진화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를 통틀어 폭력은 점차 감소 해왔다. 세간의 인식이, 현대문명이 폭력적이라 할지라도 인간사회의 폭력이 감소해 온 역사3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문제는 근대국가에 의한 대량 살상무기의 위협과 국가와 자본의 결탁 아래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개발폭력으로 인한 생명의 위기이다.

생명평화결사의 ‘평생교사’이자 『삶과 온생명』의 저자인 장회익 전 서울대 교수는 근대국가 폭력성의 본질을 다음과 말한다.

“인간이 지닌 이러한 본능적, 문화적, 제도적 호전성은 현대국가의 성격 안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사실상 현대국가라는 것은 이러한 성격을 바탕으로 근대적 물질문명과 제도적 장치가 추가되어 형성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전적 성격이 현대국가 안에서도 계속 긍정적 기능을 하리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이 설혹 현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유용한 기능을 했다 하더라도, 강력한 살상무기의 등장을 비롯해 상황이 크게 달라진 오늘날에는 오히려 역기능의 가능성이 크게 우려되고 있다. 핵무기를 포함한 현대 전쟁의 가공할 파괴력을 감안할 때, 우리가 만일 전쟁을 조장해내는 이 성격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한다면 인류 자멸의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국가 체제의 위험성은 한마디로 본능적으로 각인되고 문화적, 제도적으로 고양된 인간의 호전성이 살상무기 체제가 극대화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지닌 이러한 호전성은 우선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판정 능력을 마비시킴으로써 적정한 행동의 범위를 넘어서게 만들게 되고, 이러한 행동은 다시 분쟁을 격화시켜 일방 또는 쌍방에 치명적 피해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설혹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판정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이 지닌 호전성은 이를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행위를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쟁의 상황에 이르러, 막대한 불이익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적개심에 의해 불합리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보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폭력’은 ‘평화’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된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안의 폭력의 본능을 평화의 본능으로 잠재우고, 인류가 만들어놓은 다양한 제도와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제도화된 폭력들을 걷어 내는 일을 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사회와 지구상의 다양한 폭력들을 보고 있다. 가까운 예로 동아시아의 미얀마 사태를 들 수 있다. 우리가 40여 년 전에 광주에서 겪었던 상황과도 흡사한 인간의 제도화된 폭력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것은 군인들의 폭력이 아니라 거기에 ‘평화’로 맞서는 미얀마인들과 전세계 평화의 양심들이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및 지자체 주도의 개발폭력과 생명의 위기를 마주보아야 한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인간의 욕망이 불러오는 다양한 폭력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지, 분노, 증오, 불신, 적개심이다. 우리 안에 내재된 폭력의 본능을 넘어 ‘생명평화’의 희망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우는 일이다.


  1. 생명평화결사 2대 운영위원장 황대권의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hwangbau)/2014.1.2.에서 인용

  2. 『생명평화 탁발순례 5년의 기록』, 생명평화결사, 2010년

  3.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 북스, 2014

류하

원주에서 근대문명을 넘어갈 요량으로, 이런 저런 고민을 이웃과 함께 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개문류하(開門流下;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라)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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