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자들의 숙명이라고 하여 배우는 자들에 비해 그 무게가 적을 것인가. 학습이란 엄청난 에너지를 이동하고 순환시키는 상호 관계다. 돌이켜 보건대 내게서 인출된 핵심과 표현이 제대로 착지했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내가 가르치는 아이의 눈빛과 표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국사’를 배우던 세대가 ‘한국사’를 가르치게 된 셈이다. 내가 6차 교육과정 시절 만들어 놓은 ‘앞 글자 따서 외우는 기술’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유용하다. 그 시절 교과서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통사적 서술인데 비하여 지금은 소위 분류사 식으로 변하기는 했다지만 결국 역사라는 과목은 일차적으로 흐름을 알아야 한다. 뼈대가 튼튼해야 그 바탕 위에 ‘의의와 한계’라는 해석을 쌓아 올릴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쌓아 올린 탑에 주요 인물의 치적과 업적이라는 줄기를 세우고 세부 특징을 가지치기하듯 꽂아 넣는 것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그래도 재미난 설화나 얘깃거리가 있어서 나름 수업 중의 활력소가 된다. 그런데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사건들과 인물들이 한정된 암기력을 압박해 온다. 게다가 주로 억눌리고 빼앗기는 사건의 연속이니 분위기도 암울하기 짝이 없다. 좌우지간, 일단 ‘그노무 순서’를 외우지 않으면 답이 없다. 수포자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사포(기)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게 이쯤이다.
바야흐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18631873)에 이르러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다. 그때였다. “흥! 병신”이라는 암기 팁이 완성되는 건. 여기에 강화도조약(1876)과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이 뒤따르니 오호라, 자연스럽게 “강조”가 붙는다. “흥, 병신 강조하네”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러고 나면 사람 이름 하나가 호명된다. 바로 임갑동. 아이들에게는 “갑동이 아저씨가 욕을 하는 거야. 성은 임 씨고.”라며 나름의 스토리텔링을 붙여 준다. 실체는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1894~1895)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장렬한 마지막은 갑오(1894)·을미개혁(1895)으로 이어져, 을미사변(1895)에 이거 기어코 을사조약(1905)까지 숨 가쁘게 내달려, 마침내 1910년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로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민중은 처절하게 빼앗기고 짓밟히고 능욕받는 삶을 살아간다. 조금은 장난스럽게 시작된 앞 글자 따기는, 어느덧 소위 당시 위정자들의 뻘짓까지 더해진 갑갑한 울화로 이어지곤 했다.

이 대목에서 꼭 짚고 싶은 게 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타령도 추임새가 있어야 살아난다는 법이다. 다소 일방적인 전기수의 이야기 공연이 되어 버리던 수업을 바꾸기 위해, 나는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을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입한 것이 마인드맵이었다. 예를 들면 1907년에는 워낙에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이 해에 대한매일신보도 창간되었고, 양기탁이 등장해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 창설의 주인공으로 연결된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복잡한 사건과 인물을 한눈에 시각화하기에 마인드맵 만한 것이 없다. 준비해 간 조각 단어들을 아이들에게 직접 이어보게 하고, 틀린 곳을 수정해 주며 보충 설명을 하다 보면 복습 시간은 어느새 즐거운 놀이가 되곤 했다. 나아가 숙제로 십자말풀이를 내주기도 했다. 한 단원을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꽤 효과적이었는데, 겹치는 단어들을 조합하다 보니 ‘정말 조약이 많기도 하구나’ 싶어 내심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십자말풀이를 수업에 써먹는 건 흔치 않은 ‘희귀템’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교과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 되었다.
교습자로서의 노력이 이렇듯 다각도로 이어졌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짜릿한 전율로 남아있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아이의 입에서 내가 가르친 내용이 고스란히 튀어나올 때다. 그 아이는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수원 영통에 살았다. 수능이 비교적 얼마 남지 않은 늦은 시기에 만난 아이였는데 유독 숙제를 잘 해왔다. 하루는 아이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어머니께서 난처하면서도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때문에 못 살겠어요.”
그 집에는 여느 가정집과 달리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화이트보드가 있었다. 나는 한 명을 가르치더라도 보드마카를 쥐고 판서를 하며 수업을 하곤 했는데, 아이에게 내준 숙제가 바로 ‘방금 배운 내용을 아무나 앉혀놓고 선생님처럼 수업하기’였다. 장난스레 “엄마를 앉혀놓든지, 곰인형을 앉혀놓든지 해봐”라고 했던 말을 아이는 곧이곧대로 듣고 매번 엄마를 청강생으로 앉혀두었던 것이다. 어머님의 자랑 섞인 하소연은 이어졌다.
“선생님이랑 판서를 똑같이 해요. 심지어 수업 때 들었던 예시나 농담까지 똑같이 따라 하더라고요. 좋기는 한데, 하루이틀 이어야 말이지 매번 받아주려니 정말 힘드네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흐뭇하던지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말았다. 다른 과목 공부도 곧잘 하던 그 아이는, 그해 수능 한국사에서 1등급을 받았노라고 어머니는 후에 기쁜 전언을 보내왔다.
과외 교사로 20여 년간 살면서, 딱 한 번 학생이 아닌 어머니께 수업을 해본 적도 있다. 개포동의 한 가정집이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몇 번이나 방문 앞에 서서 수업하시는 걸 귀동냥으로 들었는데요. 혹시 저한테도 잠깐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사진 출처: Javaistan
생각지 못한 부탁이었지만, 마침 다음 수업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흔쾌히 수락했다. 과목은 한국지리. 선상지(扇狀地)의 ‘선’ 자가 ‘부채 선(扇)’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 30분 정도 수업이 이어졌다. 수업이 끝난 후 어머니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어머, 너무 재밌네요!”
세상의 모든 일은 ‘꿍짝’이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안 그래도 슬프고 힘든 일투성이인 세상인데,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려면 더욱 그렇다. 돌이켜 보면 입을 꾹 닫은 조개처럼 마음을 닫고, 억지로 끌려 나온 사람처럼 앉아 있는 학생과 두 시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가르침과 배움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내가 보낸 에너지가 아이에게 닿고, 그 아이가 다시 그 에너지를 흘려보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돌고 돌아 서로를 일깨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