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와 연구자 그리고 커먼즈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연구가 쏟아지고 있지만 연구자의 삶은 그와 달리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다. 풍요로운 연구와 빈곤한 연구자라는 이 기묘한 사회적 연결 상태를 바꾸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의 자율적인 재생산 커먼즈뿐 아니라 공적 지원의 공통화가 필요하다.

학술 활동은 많은 면에서 커먼즈(commons)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그 활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지식 자체가 그렇다. 지식은 인류 공통의 부(common wealth)이며 사회적 협력, 즉 공동 생산(commoning)은 지식 생산에서 필수적이다. 지식 생산의 도구라 할 수 있는 언어 자체가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며, 우리의 모든 연구 활동뿐 아니라 강의, 토론, 일상적인 대화까지 지식의 생산은 기존에 축적된 공통 지식에 기대며 그것을 또 확장한다. 커먼즈를 단순히 공유된 부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집합적 주체와 활동이 뒤얽힌 체계로 이해할 때 학술 활동은 커먼즈의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직간접적으로) 서로 연결된 연구자들이 공통의 부를 함께 생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연구자들은 학술 커먼즈의 일부로 존재한다. 그들 자신이 커먼즈일수록 연구자로서의 삶은 더욱 풍요로울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로서의’ 삶이 풍요로울지라도 연구자‘의’ 삶은 ― 연구자라는 말이 포함할 수 있는 직업적 범주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으므로 차이가 크겠지만 ― 대체로 그렇지 않다. 특히 비정규직 강사나 대학(원)생의 노동 조건은 그들의 삶을 ― 적어도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 빈곤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들이 덜 커먼즈적이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홀로 연구하고 글을 쓰더라도 그 과정은 기존의 공통 지식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늘 커먼즈의 일부로 존재한다. 그런데 왜 연구자의 삶은 풍요롭지 않은가?

사실 연구자들이 커먼즈일수록 풍요로워지는 건 연구자의 삶이라기보다 연구의 삶이다. 연구자들이 연구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고 지식을 나눌수록 연구 활동과 그 결과물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이 연구자의 삶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연구 활동 자체는 활성화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연구자의 삶은 그들의 노동 조건이 변함없는 한 여전히 척박할 것이다. 연구의 삶과 연구자의 삶 사이에는 어딘가 끊어진 고리가 있다.1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고리를 잇는 것이다. 풍요로운 연구와 빈곤한 연구자라는 이 기묘한 사회적 연결 상태를 바꿔야 한다.

연구자의 삶과 재생산 커먼즈

이 기묘한 연결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연구자와 비슷한 삶의 조건에 있는 이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가령 예술가가 그렇다. 예술가의 삶은 어떤 면에서 연구자의 삶과 유사하다. 우선 예술가가 연구자처럼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예술가의 작업 과정은 분명 연구의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직업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는 직업적 측면에서 볼 때 일반 임노동자와 차이가 큰데, 전자의 노동 환경이 후자에 비해 훨씬 덜 제도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예술가들은 서로 연결되려는 동기를 가지며, 그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는 공식적이고 제도화된 환경을 대신하는 성격을 갖는다. 연구자의 직업적 조건은 예술가에 비해 대체로 제도화의 정도가 높다. 그러나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인구 감소 그리고 불균형한 지역 발전 등은 대학에서 정규직 노동자(교수)가 되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고 – 다시 말해 제도(주로 대학이나 연구소)에 편입되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고 – 그에 따라 연구자의 노동 조건은 예술가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예술가가 노동 생산물의 판매나 정규적인 임금보다 각종 아르바이트와 지원 사업에 기대 생계를 유지하듯이, 연구자 역시 (연구 프로젝트와 강의를 포함하는) 각종 아르바이트와 지원 사업에 크게 의지한다.

이들의 불안정한 삶은 두 가지 상반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먼저 이들의 불안정한 삶은 그들의 노동이 저렴하게 전유되는데 기여한다. 예를 들어 “집합적 상징자본”2의 구축에 집착하는 도시 정부는 소위 ‘문화적인’ 풍경을 저렴하게 조성하기 위해 예술가의 불안한 삶을 활용한다. 대표적인 방식은 정해진 예산 안에서 기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금이 예술가의 불안한 삶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기금이 지원하는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이다. 그럼에도 예술가의 불안한 삶은 이들이 계속해서 그러한 기금에 매달리게 만들고 그 기금은 예술가의 불안정을 해결할 수 없는 과제로 남겨두면서 예술가의 불안정에 기대고 그것을 재생산한다. 사회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숫자가 많아야 기금을 통한 ‘문화적인’ 풍경의 조성도 원활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의 노동은 저렴하게 전유되지만 사회적으로 예술은 활성화된다. 연구자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회적으로 많은 연구 프로젝트가 수행될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많은 불안정 연구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이 대표적이다. 그들의 불안한 삶은 그들을 연구 프로젝트라는 저렴한 일자리의 노동자로 만든다. 그들이 없다면, 그들의 삶이 불안정하지 않다면, 대학의 수많은 연구 프로젝트는 수행될 수 없을 것이다(교수는 거들 뿐). 그러나 그 프로젝트는 결코 그들의 삶을 안정화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연구자보다는 연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연구 기금 역시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연구 기금 지원 기관인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의 첫 화면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창의적 연구와 인재양성을 지원합니다.” 이건 정확한 표현인데, 연구재단이 지원하는 건 연구자가 아니라 연구이기 때문이다(인재양성이라는 것도 같은 말인데, 인재양성을 지원한다는 건 인재를 길러내는 과정을 지원한다는 말이며, 그 과정이란 결국 연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연구재단의 기금이 연구자의 불안한 삶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구재단은 사회적으로 연구 활성화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연구자인 ‘나’의 안녕을 보장하는 뜻은 아니다. 연구재단에 중요한 건 연구의 활성화지 연구자 개인의 안녕이 아니다. 그럼에도 연구자의 불안정한 삶은 이들을 기금에 의존하는 존재로 만들며, 이는 다시 연구를 활성화한다. 즉 논문을 쓰게 한다. 연구자는 논문을 써야 기금에, 각종 일자리에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연구자를 각자도생의 길로 인도할 뿐 그들의 불안정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지원을 받거나 일자리를 얻겠지만 사회적으로 연구자의 불안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연구는 활성화되지만 연구자 개인의 삶은 불안정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처럼 예술과 예술가의 관계와 연구와 연구자의 관계는 각각 그 활동의 활성화가 수행자의 불안정에 기댄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연구자의 불안한 삶은 이들을 저렴한 노동의 수행자로 만들지만, 다른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서로 연결되려 하는 예술가들처럼 연구자들 역시 서로 연결되어 ― 이미 지식 커먼즈의 일원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 다른 방식의 삶과 연구를 모색할 수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비제도권 학술 단체, 즉 대학 외부의 독립 연구소, 공부 모임, 연구 공동체 등이 그 사례다.

정정훈은 현재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두 가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첫째, 비판적 학문의 장이 대학 내에서 소멸해가고 있다. 둘째, 비판적 학문을 전공해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다. 정정훈은 비제도권 학술 단체를 이러한 이중적 위기의 상황에서 연구자들이 선택한 전략으로 이해한다. 즉 대학 밖 학술 단체는 “연구를 위한 경제적[인 기반과] 교류관계의 기반 그 자체를 연구자들 스스로가 구축해가는 활동”의 성격을 갖는다.3 이러한 지점은 우리의 맥락에서 흥미로운데, 연구자들이 “교류관계의 기반”, 즉 연구의 삶뿐 아니라 “경제적”인 기반, 다시 말해 연구자의 삶을 함께 해결하려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들은 분리되어 가는, 혹은 기묘하게 연결되는 두 가지 삶을 다른 방식으로 이으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앞서 제기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제도권 학술활동은 실비아 페데리치가 말하는 재생산 커먼즈의 성격을 포함한다. 사진 출처: Jason Leung
비제도권 학술활동은 실비아 페데리치가 말하는 재생산 커먼즈의 성격을 포함한다.
사진 출처: Jason Leung

그들이 택한 그 다른 방식, 즉 비제도권 학술 활동은 그들의 연구와 삶을 위한 토대라는 점에서 일종의 커먼즈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것은 단지 연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연구‘자’를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서두에서 언급한 지식 커먼즈와는 차이가 있다. 즉 그것은 실비아 페데리치가 말하는 재생산 커먼즈의 성격을 포함한다. 페데리치는 재생산의 물질적 수단을 강조하는데, 그것의 공통화(commoning)가 “세계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세계시장을 매개로 빼앗은 상품 흐름과 우리의 재생산 활동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4 현재 우리 일상의 재생산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면, 재생산 공통화는 “재생산을 자본의 사물의 척도에서, 자본의 가치에서, 자본의 명령선에서 끊어내는 방식이다.”5 비제도권 학술 활동 역시 (비)물질적 수단을 공유하면서 다른 재생산 방식을 만들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활동을 재생산 공통화라 부를 수 있다.

공적인 것을 공통화하기

그러나 도시에서 우리가 얼마나 재생산 커먼즈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일상의 재생산을 얼마나 담보할 수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연구 공간을 공유한다고 해서 재생산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비제도권 학술 활동은 그 의의가 분명하지만 자원이 부족하다. 때문에 많은 비제도권 학술 활동 연구자들이 대학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많은 경우 대학과 연결되어 있고 그에 의지한다. 그렇다면 정정훈의 말처럼6 대학 밖 학술 활동의 과제는 여전히 어떤 쓸모를 연구자들에게 – 비록 문제적인 방식일지라도 – 제공하는 대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전유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대학의 부는 우리가 생산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정당하다. 우리는 이미 대학에 많은 돈을 ― 빚까지 져가며 ― 냈고, 대학은 그 돈뿐 아니라 많은 공적 지원을 받는다. 또한 우리는 대학에서 많은 지식을 함께 생산했으며, 향후 기업이 활용할 노동력을 스스로 계발하는 노동을 하면서도 그에 맞는 임금을 받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돈을 냈다(이런 점에서 학생은 비임금 노동자라기보다 마이너스 임금 노동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를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대학이라는 공공기관을 공통화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대학의 변형은 필수적이다.

커먼즈를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대안적인 삶과 연구는 기존의 질서를 그냥 내버려둔 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면서도 기존의 것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므로 커먼즈는 저항과 구성이라는 두 가지 선을 지닌다. 저항이 없는 구성은 자기기만이며 구성이 없는 저항은 기존 질서에 갇힌다. 대안적인 삶과 연구를 위한 커먼즈는 대학 밖에서 새로운 활동을 꾸리는 일뿐 아니라 기존의 질서, 즉 대학을 바꾸는 일이 함께 진행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대학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커먼즈로 작동하고 있다. 대학의 구성원은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무상으로 혹은 저렴하게 누릴 수 있다(물론 학생의 경우 이미 돈을 많이 냈다. 그리고 최근의 대학은 과거에 비해 학내 구성원들에게도 점점 폐쇄적으로 되고 있고 각종 서비스의 상업화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대학은 일종의 빗장 커먼즈(gated commons)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학의 높은 등록금과 운영 실태를 감안해 볼 때 그곳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인들만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값비싼 시설을 갖춘 고급 아파트 단지와 비슷하다. 두 곳 모두 공간을 재생산하는 노동자 ― 경비원, 조리사, 청소부 등 ― 의 노동의 저렴화에 기댄다는 점도 비슷하다. 세계적으로 빗장 공동체가 불평등이 심한 지역에 많이 있으며 또 그 불평등을 다시 강화한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지금 우리의 대학 역시 국내의 심화되는 불평등이 각인된 하나의 표식이자 그 불평등에 다시 기여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대학의 부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생산한 것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부다. 그리고 대학만큼 도시에서 많은 자원을 갖춘 곳도 드물다. 그곳에는 웬만한 공공 도서관보다 더 많은 장서를 갖춘 도서관, 강의실·강당·세미나실·공연장·운동 시설 등 다양한 공간, 대학 밖보다 더 걷기 좋은 보행 환경, 무료로(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 더 저렴한 식당 등이 있다. 대학을 되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학술 활동에 대한 공적 지원을 늘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공적 지원을 공통화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Scott Graham
학술 활동에 대한 공적 지원을 늘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공적 지원을 공통화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Scott Graham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이 글의 목적은 대학 개혁 방안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대학 개혁이나 연구 지원 등이 대부분 연구자가 아니라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어떤 지원 제도가 연구자를 지원한다고 말할 때에도 사실 그런 적은 거의 없다. 그러한 제도의 효과는 언제나 연구의 활성화였을 뿐이다. 물론 그러한 지원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나’는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혜택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연구자의 사회화된 불안정을 전혀 해소하지 못하며, 우리를 다른 길을 모색하기보다 더욱 경쟁에 몰두하는 주체로 만든다. 또 운 좋게 지원을 받더라도 그것은 지루하고 따분한 일을 요구하며 우리를 소모시킨다. 우리는 영수증을 모아 붙이고 보고서를 쓴다. 이러한 일 역시 우리를 고립시킨다. 결국 우리를 지원한다고 하는 제도들은 혜택을 받지 못한 우리와 운이 좋은 우리 모두를 고독에 빠뜨린다. 그러니 학술 활동에 대한 공적 지원을 늘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공적 지원을 공통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지원 방식을 정하고 우리가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조직하고 국가에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비제도권 학술 활동을 통해 대안적인 조직을 경험하고 있다. 남은 일은 여기에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것뿐이다.


  1. 권범철, 「지식 커먼즈와 연구(자)의 삶」, 『지식을 공유하라』, 박서현·정경희 엮음, 빨간소금, 2022, 33쪽.

  2. 데이비드 하비, 「지대의 기법」, 『반란의 도시』, 한상연 옮김, 에이도스, 2014.

  3. 정정훈, 「비제도권 지식운동의 궤적과 동시대의 지식운동 연구를 위한 시론」, 문화연구 제8권 2호, 2020, 21쪽.

  4. 실비아 페데리치, 「시초축적 시대 공유재의 정치와 여성주의」, 『혁명의 영점』, 황성원 옮김, 갈무리, 2013, 245쪽.

  5. Massimo De Angelis, “The strategic horizon of the commons,” in Camille Barbagallo, Nicholas Beuret and David Harvie, eds., Commoning: with George Caffentzis and Silvia Federici (London: Pluto Press, 2019), p. 219.

  6. “대학이 비판적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가 된 것은 변화되어야 할 문제지 회피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정정훈, 앞의 글, 7쪽).

이 글은 성신여자대학교 인문도시사업단에서 주관한 컨퍼런스 〈학술커먼즈로 바라 본 지역과 대학〉(2022.6.10.) 발표문이다.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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