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의 정치 온라인토론회] 녹색정치의 재건과 정동의 재구성

이 글은 2020년 6월 11일 진행된 《정동의 정치 온라인토론회》 중 두 번째 발제문 〈녹색의 정치_녹색정치의 재건과 정동의 재구성〉이다. 정동 강렬도와 녹색 특이점의 만남, 판짜는 자와 나서는 자의 만남을 그려낸 녹색정치 혁신에 대한 모색과 전망을 담고 있다. 정동의 정치는 정동노동의 판짜기를 통해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 등 녹색정치가 꽃필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양육하는 소농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녹색정치의 정동의 강렬도는 미리 주어지는 전제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할 과제라는 점을 이 글은 지적하고 있다.

녹색정치의 미래는 정동정치에 달려 있다

2020년 총선 이후, 녹색당, 정의당 등 소수정당은 더욱 위축되고 모색과 전망의 시간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그간 녹색정치의 일정표는 기후위기와 생태계위기 등으로 굉장히 빠르게 움직였지만, 시민들에게 직접 체감되도록 몸에서 느껴지는 속도, 온도, 밀도, 강도 등 정동(affect)에 맞추어져 있지 않았다. 정동의 정치는 곧 몸의 정치이기 때문에, 제한, 유한성, 한계를 명확히 갖는데도 가속주의적인 일정표가 정동의 느린 속도를 추월했다. 먼저 판단하기 전에 느끼고 감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선거법 개정 등의 제반 여건은 더욱 소수정당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형국이었다. 결국 녹색정치가 혁신과 전망의 새로운 상황에 놓여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제 정동의 정치를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정동(情動)이란 개념이 녹색정치에 전면에 등장할 만큼 일상어도 아니고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맥락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수면 아래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나는 정동에 관한 강의가 열릴 때 “꼼짝 안할 때 생각이 많은가? 움직일 때 생각이 많은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꼼짝 안 할 때’를 지목한다. 여기서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을 감정(emotion)이라고 한다면 ‘움직일 때의 마음’은 정동(affect)이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정동에는 슬픔, 기쁨,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가적으로 감정노동은 외면적으로 친절하지만 감정소모가 있다면, 정동노동은 사랑할수록 사랑의 능력이 증폭된다고도 구분되는데, 이는 감정의 유한성과 정동의 무한성에 대한 비교로도 나타난다.

우리의 마음의 완고함은 근대적인 표상주의에 따라 사물, 생명, 자연을 가시적인 표상, 관념, 견해로 판단하는 능력으로 나타나기 일쑤다. 이에 따라 감정, 감성, 정서 등은 수동적으로 표상이 촉발하는 바에 머문다. 그러나 정동은 그러한 완고한 마음이 아니라, 비표상적인 흐름이며 이행하고 횡단하고 변이될 때의 마음이다. 여기서 감정과 정서(affectio)는 능력 개념이라면, 정동(affectus)는 힘과 에너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감정과 정서 등이 수동적인 표상에 머무른다면, 정동은 표상과 표상을 넘나드는 강도와 속도와 같은 힘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동은 비표상적 흐름이다. 이를테면 아이가 울고 있다. 그러면 나도 역시 슬픔이 촉발된다. 그런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고 사탕을 주는 등의 정동을 발휘한다. 그러면 아이가 방긋방긋 웃는다. 그러면 나에게도 기쁨이 발생된다. 이렇듯 정동정치는 사물과 생명의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서 서식하는 정동의 강렬도에 따라 배치하고 재배치하는 미시정치를 의미한다. 그래서 돌봄,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 등과 정동이 동의어처럼 취급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정동정치(affective politics)가 일종의 미시정치이자, 생활정치이며, 소수자정치인 이유는, 정동(affect) 자체가 갖고 있는 강도, 속도, 온도, 밀도 등의 이행의 구성요소 등은 우리가 살림, 돌봄, 모심, 보살핌 등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근대의 책임주체(subject)의 권리, 의무, 책임, 믿음의 양상은 결국 “이것은 컵이다”라고 표상의 자기동일성(identity)을 규정할 수 있는 선험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主人公)을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컵에서 바로 냅킨으로 표상을 횡단하며, 냅킨과 컵의 배치를 가지런히 놓는 등의 재배치하면서 정동을 가한다. 사실상 표상과 표상, 의미와 의미, 기능과 기능을 연결하는 이음새로서의 정동이 역할을 기존에는 자동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녹색정치의 주제로 등장하기란 참 어려웠다. 정동이 생성과 등장을 원래 그랬던 것 아니었어,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것은 하나의 강렬함이 만든 혁명적인 순간을 그려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합리주의적인 정치양상은 의미와 가치를 상위에 두고, 기능과 작동을 하위에 두는 양면적인 형태로도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와 기능 사이를 연결시키는 전달벨트로서의 ‘조직 내 정치’ 양상에서 다의미적이고 다기능적인 정동정치에 대해서는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과도 같이 여겨지고는 했다. 이제까지 녹색정치의 기본적인 작동방식이 ‘엄밀한 기능’과 ‘확실한 의미’를 따지는 합리주의 양상이라면, 사실상 판 자체를 구성하는 정동정치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정동정치의 이중분절이 드러난다. 나서는 자와 판짜는 자가 그것이다. 물론 나서기와 판짜기가 선행되어 있지만, 일단 개념을 파악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자(者)라는 수행자의 의미를 달았다.

정동정치는 ‘나서는 자’보다 ‘판 짜는 자’에 더 주목한다. ‘나서는 자’는 돌발흔적처럼 나와 너 사이의 정동의 강렬도에 따라 ‘우리 중 어느 누군가’인 사이주체성 형태로 홀연히 등장한다. 사이주체성의 의미 양상은 ‘사건으로서의 의미’이라는 점에서 책임주체에게서 보이는 ‘권리(=권력)으로서의 의미’와는 구분될 것이다. 돌연 개념적 인물, 이야기구조를 가진 인물, 나서서 발언하는 인물 등이 등장하게 되는 기반이 공동체적인 관계망과 배치이다. 그러나 ‘나서는 자’의 의미화의 영역 이외에, 또 다른 영역에 있는 ‘판짜는 자’의 정동의 지도화의 영역이 존재한다. 판 짜는 자는 수면 위로 등장하지 않지만 열심히 움직이고 주변을 살피고 배경에서 준비동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경우의 수를 타진하면서 사랑, 욕망, 정동, 돌봄, 살림 등을 발휘하며 열심히 정동의 지도를 그린다. 이에 따라 ‘나서는 자’보다 더욱 다양한 경우의 수의 잠재력에 대해서 주목하며, 매번 판과 구도를 바꾸어가면서 민감하게 정동의 지도를 그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판짜는 자’이다. 정동정치는, 구성원 모두가 판짜는 자가 되는 상태에 이르는 공동체적인 배치의 상황에서 웅성거림, 밀도, 속도, 온도, 강도에 감응하는 정동의 미시정치를 타진한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나서는 자’들조차도 이러한 관계망이라는 판의 강렬도 자체가 홀연히 출현시킨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녹색정치에서 모두가 ‘판짜는 자’가 되는 상태가 바로 고도로 성숙된 정동정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판짜는 자는 ‘고도로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된’ 작동양상을 보이며, 모든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내는 집합적 배치를 의미한다. 결국 그것은 우주이자 세계 자체를 만들어내는 판짜기이다. 갑자기 ‘나서는 자’가 엄밀하고 뚜렷하고 확실한 발언을 한다. 그러면 배치가 갖고 있는 배경음과 화음은 이 특이점에 수렴되고 수축된다. 그리고 발언이 끝나면 다시 강렬도를 가진 웅성거림의 배경음과 화음으로 확산되고 분산된다. 이러한 수축과 팽창의 지속은 녹색정치의 탄력성(resilience)이자 유연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축과 팽창을 통해서 탄력성과 유연성, 민감성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정동의 정치의 생태적 지혜이자 암묵지이며 노하우이다. 하지만 ‘나서는 자’의 엄밀성, 확실성, 합리성, 계획, 시나리오 등이 정동하는 몸, 집단적 배치로부터 벗어나 몸이 갖고 있는 고유한 속도, 온도, 밀도, 강도 등에 입각한 정동정치를 배신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몸은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녹색정치는 주변, 곁, 가장자리에 있는 몸의 정치, 정동의 정치를 개방한다. 우리의 소수자의 감수성은 그저 권리(=권력)의 감광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소수성(minority)에도 있다. 우리 안의 소수성은 사실상 정동의 실존의 차원이다. 자신 내부에 명확하고 엄밀한 구분이나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비표상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 안의 광기, 바보, 생명, 식물, 미생물 등의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 곁, 가장자리에서 서식하는 정동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알려주는 일관된 방향성과 진실의 강렬도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모두가 ‘판짜는 자’이기 때문에 선수이자, 모두가 처음 겪게 되는 정동의 사건을 직면하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판이 녹색정치의 판일 수도 있다. 몸 살림과 마음 살림 등을 통해 정동에 따라 움직이는 법을 체득하려 할 때, 이미 우리의 몸이 정동의 판짜기를 직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수행하여 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정동에 있어서도 자생성, 자연 치유력, 자가면역, 독립성 등의 자연주의의 신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정동에도 미시정치가 필요하다. 녹색정치는 “자연주의가 더 이상 생태주의가 아니다”라는 현재의 상황에서의 정동의 미시정치를 적극적이고 자율적으로 구성해내야 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정동은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 아닌 것이며, 끊임없는 구성적 실천을 필요로 한다

정동경제의 개방과 생태적지혜의 방어

플랫폼은 외양적으로는 공동체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정동의 추출과 채굴을 목표로 한 자본주의의 변형체이다. by Pixabay, 출처: www.pexels.com/ko-kr/photo/www-267350/
플랫폼은 외양적으로는 공동체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정동의 추출과 채굴을 목표로 한 자본주의의 변형체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녹색정치에서 상당히 혼란과 혼동이 일어나는 부분이 바로 정동경제(affective economy)의 등장과 관련된 부분이다. 정동자본주의, 혹은 플랫폼자본주의의 등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묘한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플랫폼자본주의, 정동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일컬어지는 정동경제의 양상에서 플랫폼은 외양적으로는 공동체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정동의 추출과 채굴을 목표로 한 자본주의의 변형체이다. 플랫폼에서 웃고 울고 즐기고 기뻐하다보면 그것의 정동효과가 바로 플랫폼 자체나 개인의 수익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녹색정치에 있어 공동체와 플랫폼 간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점에 있다. 플랫폼은 공동체적 관계망과 배치에서 생성되는 정동 자체의 추출과 채굴을 목표로 한다. 이에 따라 정동이 갖는 강렬도는 녹색정치의 활력과 에너지로서가 아니라, 자본화(=적분)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플랫폼으로서의 작동은 정동을 부추기고 활성화하려고 하면서도 대상화하고 이용하며 이를 빨아들이는 ‘코드의 잉여가치’의 영역에 따라 작동한다. 코드의 잉여가치는 권력의 잉여가치이자, 적분, 응고, 수렴, 채굴, 추출을 통한 공동체에 대한 질적 착취 양상이다. 반면 공동체에서의 정동은 활력과 생명에너지로서, 공동체 자체를 탄력적으로 만들고 유연하게 만들고 활성화하는 원천이 된다.

플랫폼의 이득은 운영자 개인이 가져가지만, 사실상 플랫폼의 작동양상은 적분, 집중, 수렴을 통해서 유지되는 구조를 갖는다. 반면 공동체에서는 커먼즈(Commons)가 그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공통의 규약과 규칙을 만들고, 미분, 분산, 민주주의를 통해서 거대한 무의식의 행렬을 그려낸다. 문제는 공동체와 플랫폼의 경계의 모호함으로 인해, 미분과 적분, 분산과 수렴, 민주주의와 집중 사이의 묘한 경계지점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특히 사회적 경제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경계는 더욱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욕망의 자본화와 자본의 욕망화’라는 두 영역의 교차지점에 사회적 경제가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는 욕망가치, 정동의 강렬한 가치, 생명가치, 꿈 가치, 돌봄 가치 등이 중요해진 작금의 상황에서 대두된 플랫폼과 공동체간의 동근원적(同根源的)인 영역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정동정치에 있어서는 권력이 형성되도록 하는 적분, 집중, 수렴 수행하는 개인의 시야에서는 공동체는 플랫폼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공동체는 이러한 ‘나서는 자’로서의 개인의 적분(積分, integral)을 다시 미분(微分, differential)으로 바꾸는 ‘판짜는 자’의 정동정치의 힘과 에너지의 작동을 전제로 한다. 이에 따라 적분과 미분, 수축과 팽창, 집중과 민주주의 사이에서의 긴장관계는 “끊임없이 조직을 혁신하라”는 요구와 “배치를 영구적으로 재배치하라”는 목소리 등으로 나타나는 미시정치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플랫폼은 커먼즈의 약탈, 채굴, 추출을 원하는 미시적인 그물망이다. 결국 커먼즈에 대한 방어, 공동체의 판과 생태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영구혁명(=영구개량)의 판이 녹색정치에서 개방된 것이다.

생태민주주의와 정동의 정치

생태민주주의는 정동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판과 구도라고 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 자체의 복원과 재건의 입장에 선 정동의 정치이다. by Pixabay, 출처: www.pexels.com/ko-kr/photo/53958/
생태민주주의는 정동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판과 구도라고 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 자체의 복원과 재건의 입장에 선 정동의 정치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생태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 것, 즉 정동의 미시정치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미세한 균열, 사이, 틈새, 간격이라는 가시적이고 실체가 확실한 것 이외, 즉 그 외부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생태민주주의는 관계의 문제이며, 연결의 문제이다. 이는 사물, 생명, 자연, 기계의 곁과 가장자리에서 서식하는 것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실체화되고 고정된 것의 둘레만이 아니라, 거대한 연결망의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강렬도로도 실존한다. 관계는 이항대립이나 “~이냐, ~이냐”라는 이접(disjunction)적 자기조직화에 의해 뾰족하고 날카로워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배경음이나 둘레환경의 강렬도의 파고처럼 생명에너지와 힘의 역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복의 힘이 갖는 동역학적인 정동의 흐름과 강렬도는 사실상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지를 몸으로 느끼게 한다.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 온도, 밀도, 강도 등은 관계망 자체를 파열시켜 정동이 흐를 수 있는 여지를 주지 못하고 결국 관계의 어그러짐과 찢어짐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정동의 흐름, 활력과 생명에너지의 흐름 자체가 실종된 구조물로부터 유래한다.

생태민주주의는 이러한 정동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는 판과 구도라고 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 자체의 복원과 재건의 입장에 선 정동의 정치이다. 책임과 의무, 권리의 감광판 역할을 하던 주체는, 판이 어떤 방식으로 짜였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화려한 언변과 섬세한 계획과 아이디어, 사람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그것을 자신만이 해낸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정동으로서의 생명에너지와 활력이 어떻게 흐르고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감수성이 사라진다. 오늘날 생태민주주의의 과제는 정동정치의 복원과 재건에 달려 있다. 관계 속에 흐르는 욕망, 정동, 생명의 약동과 역동이 숨 쉬고, 웃고, 울고, 기뻐하는 모든 영역에서 정동정치, 몸의 정치, 공동체정치가 숨어 있는 것이다.

생태민주주의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에너지와 활력이 생명정치와 녹색정치에 하나의 지표로써 작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생태민주주의의 정치는 일종의 ‘구성적 협치’, ‘아래로부터의 협치’, ‘위기에 강한 협치’로서의 민회 유형의 협치를 구성해내는데, 이 협치의 판은 그저 이상적이고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소 악동 같고,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고, 서로 견제하면서도 협동하는 등의 요철, 굴곡, 주름이 있는 입체적인 인물의 정동, 에너지, 활력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협치는 완성형이 아닌 과정형이자 진행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 테면 영성적인 의미에서 동기와 결과가 일치하는 완성형으로서의 착함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회의 입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서로 협동하면서도 견제하여 배치가 실존함을 끊임없이 각인시켜야 하는 과정이 생태민주주의의 과정형이자 진행형이다.

결국 구성적 협치의 입체적인 인물이 보여주는 바는, 협동과 살림이 바로 동기로부터 결과까지 선형적으로 미리 결론이 난 완성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정동의 미시정치를 통해서 나아가야 할 과정형이자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민주주의에서는 ‘나서는 자’의 완성형으로서의 의미화보다 ‘판짜는 자’의 과정형으로서의 지도화가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다채로운 정동, 활력, 에너지가 다중적이고 다의미적이고 다기능적인 입체적인 판을 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생태민주주의는 시민성과 공동체성, 권리주의와 자율주의, 제도와 관계망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적분과 미분, 수렴과 분산, 집중과 민주주의 사이의 정동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여백과 느림을 필요로 한다. 수많은 이야기구조가 설립되어야 하며, 수많은 잡담, 소음, 잉여, 잡음, 배경음과 언표, 개념, 상상력, 꿈 등이 교차해야 하는 것이다. 다극적인 몸체를 가진 녹색정치로서는 어느 한 쪽의 편향성이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더욱 양성 피드백을 일으킬 가능성도 높다. 결국 “관계망과 배치의 판에서 어떻게 활력과 생명에너지를 생성시킬 것인가?”라는 화두를 가진 미시정치는 녹색정치의 색다른 과제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파시즘의 미시정치가 아닌 소수자의 미시정치, 우리 안의 소수성으로서의 욕망, 정동, 사랑, 돌봄의 미시정치가 이루어질 것인가가 관건인 것이다. 녹색정치가 생태민주주의를 파격적으로 채택한다면, 그것은 플랫폼과 공동체적인 관계망 양 갈래 선택지 속에서 공동체적인 관계망 자체가 갖고 있는 몸의 정치, 정동의 정치의 판을 설립하겠다는 역사적인 선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의 정치의 생태민주주의에 입각한 녹색정치의 복원과 재건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판짜는 자의 재등장, 곁에서 재건으로

정동을 부추기고 양육하고 도모하는 녹색 스튜어드십(stewardship)은 어떤 형태일까? 사실 소농에게 있어 생명과 자연은, 돌봄과 살림을 향한 거대한 문제설정을 갖고 있는 정동의 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약탈하고 채굴하고 더 요구하고 표면을 현상적으로 취하는 등의 테크네(techne)의 방식이 아닌 도모하고 양육하고 살림하면서 심층의 잠재성과 깊이를 보호하는 등의 포이에시스(poiesis)의 방식이 정동의 살림꾼이 갖고 있는 모습이다. 사물, 생명, 자연, 기계 등의 깊이와 잠재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정동의 살림꾼은 1차적으로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를 조성하여 이 속에서 강렬한 상호작용을 통해 2차적 차이를 발생시킨다. 즉, 전문가주의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그 모델링의 기능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소농의 살림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러 모델을 넘나드는 단순하면서도 다기능적인 정동을 통해서 다양한 메타모델화(meta-modelization)를 수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의 모델을 복잡하게 만드는 시나리오, 계획, 설계, 모델링 등에 입각한 기성정치의 방식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구성된 다양한 특이점들을 설립하도록 정동의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다양성 정치’, ‘차이의 미시정치’의 비밀인 것이다. 획일적이고 복잡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모델링의 전문가주의가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다양한 모델의 특이점들을 넘나다는 메타모델링으로서의 정동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비교적 곁, 가장자리, 주변으로 간주되었던 정동을 재건과 구성, 혁신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집단적 리더십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서 거대한 실험과 실천, 행동방식을 개발하는 재창안/재발견의 과정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완성형으로서의 계획이나 시나리오를 제시할 수 없으며, 정동, 사랑, 욕망, 살림, 돌봄이 갖고 있는 일관된 흐름에 섞여 그 방향성과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정동은 흐름이자 횡단이다. 집단의 밀집도를 거리조절하면서 동시에 미분과 적분, 수축과 팽창, 수렴과 분산, 집중과 민주주의 간의 거대한 긴장관계를 밀고 당기면서 그 사이에 놓인 비스듬한 횡단선(transversal line)을 조성하는 한 편의 예술작품이 정동정치인 셈이다. 정동정치는 녹색정치를 하나의 보이지 않는 윤리와 미학의 예술작품의 경지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한 편의 정동이 만든 예술작품에는 ‘나서는 자’이면서 ‘판 짜는 자’로서의 이중분절이 갖는 묘한 긴장관계에 놓인 참여자들의 장이 조성될 것이다. 녹색정치는 나서는 자와 판짜는 자라라는 수축과 팽창 사이를 끊임없이 조율하는 정동의 정치의 판으로 향해야 한다. 그 거대한 실험은 어떤 완성형으로서의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형이자 진행형으로서의 실험과 실천만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녹색정치는 정동의 흐름 위에서 영구개량(=영구혁명)의 혁신의 과정에 놓여 있는 셈이다.

떡갈나무 혁명 : 녹색특이점과 정동강렬도 둘 다가 필요하다!

정동정치는 우리의 생명력과 활력에 대한 신뢰이자, 녹색정치가 갖고 있는 판과 구도에 대한 믿음이다. by Felix Mittermeier, 출처: www.pexels.com/ko-kr/photo/957024/
정동정치는 우리의 생명력과 활력에 대한 신뢰이자, 녹색정치가 갖고 있는 판과 구도에 대한 믿음이다.
사진 출처 : Felix Mittermeier

생명과 생태 사이, 개체주의와 연결망주의 사이의 긴장관계는 늘 녹색정치 내에서 상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둘 다가 필요하다. 녹색특이점은 “~이냐 ~이냐”라는 이접적 자기조직화에 따라 날카롭고 뾰족하고 통쾌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지만, 권리(=권력)의 감광판으로 견고하고 완고해질 가능성도 있다. 연결망주의는 정동의 강렬도에 따라 웅성거릴 수 있지만, 관계가 갖는 윤곽, 틈새, 간극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더욱 비가시화함으로서 주변화 될 수도 있다. ‘녹색특이점’과 ‘정동강렬도’는 함께 움직이는 융합의 영역이자,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녹색정치는 ‘나서는 자’와 ‘판 짜는 자’는 두 개의 집게를 가진 가재와도 같아서 정동의 미시정치는 둘 다를 슬기롭고 지혜롭게 운영하는 데 달려 있다.

녹색정치는 이제 완숙기를 향한 사춘기를 겪고 있다. 녹색당과 정의당, 소수정당 등뿐만 아니라, 심지어 더불어 민주당과 같은 기성정당 사이에서도 녹색정치와 생태민주주의의 씨앗이 저변에서 꿈틀대고 있다. 이는 생태민주주의가 어떤 모델이나 형태를 분명히 갖는 것이 아니라, 저변에서 움직이는 내재적 민주주의이자, 구성적 협치라는 점을 의미한다. 물론 민회보다 의회를, 민주주의보다 권력(power)을, 자율주의보다 권리주의를, 관계망보다 제도를 강조하는 흐름들이 녹색정치를 정동의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몸과 관계망이 갖고 있는 정동 즉, 생명에너지이자 활력만이, 생태민주주의를 아래로부터 구성해내고 재건해 낼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의 보고(寶庫)라는 점을 신뢰한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특이점 하나하나를 만들어 왔던 녹색정치의 미시사가 분명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달려갔던 행군에서 느림과 여백, 숨결의 발걸음으로 우리의 속도를 조절하고 모색하고 있다. 느림의 시간은 생명의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가속시키게 했던 바는 다가올 기후위기와 생태계 위기에 대한 절박함과 다급함이었다. 그 엄청난 속도의 입자가속기 속에서 우리는 생명의 화음과 리듬이 가진 몸의 정치, 정동정치를 잠시 잊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동정치는 우리의 생명력과 활력에 대한 신뢰이자, 녹색정치가 갖고 있는 판과 구도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이렇게 정동정치라는 몸과 관계망, 배치가 갖고 있는 생명에너지와 활력의 미시정치를 통해 녹색정치를 다시 구성하고 재건할 것이다. 즉, 정동의 정치는 가속주의와 감속주의를 함께 구사하는 속도와 강도조절의 정치이자, 몸과 관계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아직까지 모른다”라고 했던 스피노자의 아포리즘을 연상시킨다.

신승철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