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에서 온 배추

학생들이 홍천에 가서 심고 거둔 배추가 왔습니다. 해가 안 드는 응달에서 자라 속이 하나도 차지 않은... 그야말로 시퍼런 배추. 홍천에서 함께 지낸 어르신들은 그거 어따 쓰려고 그러냐, 그냥 버리고 가라고 하셨지만, 아이들은 힘돌이(학교 트럭)에 배추를 싣고 왔습니다. 그 배추가 가져온 행복에 관한 짧은 이야기입니다

추석이 끝나자마자 학생 네명(중1, 중2)과 선생 한 명은 짐을 챙겨 홍천으로 떠났습니다. 홍천 물걸리에서 9주간 밥도 해 먹고, 살림도 꾸리고, 마을 어르신들과 만나고 일도 만들며 함께 지내다 오려고요. 1년에 한 번 학교 김장하는 날 쓰려고 며칠 전부터 배추 씻고 절이고 물 빼고 야물딱지게 준비해서 김장 하루 전날, 트럭 타고 귀환했어요. 배추 싣고 온 이들은 개선장군마냥 자랑스러워했고 학교에서 목 빼며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은 격하게 반가워했고요.

텃밭이 응달이라 속이 거의 안 차고 초록잎만 무성한 배추. 사진제공 : 에리카
텃밭이 응달이라 속이 거의 안 차고 초록잎만 무성한 배추. 사진제공 : 에리카

덜 자라 아직 수확하지 못한 배추가 있어 학생들은 서울에 돌아와 며칠 지내다 다시 홍천을 다녀왔어요. 무장했지만 추운 강원도의 겨울 맞서느라 콧물 훔쳐가며 텃밭에 있는 배추를 뽑았는데, 아뿔싸! 이를 어째…. 텃밭이 응달이라 속이 영 안 찼어요. 알이 거의 안 차고 자라 허불렁 허불렁 초록잎만 무성한 배추….. 아이들과 가을 겨울을 함께 보낸 어르신들은 ‘아이고 배추 농사 망했네! ㅋㅋ 그냥 버려야겄네. 그걸 어따 쓰려고 그러냐. 버리고 가라~’ 입을 모으셨지만, 애써 돌본 귀한 배추 그냥 버릴 수 있나요. 힘돌이(학교 트럭)에 싣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학생들은 머리를 모았어요. 이 배추를 어쩐담…. 김장은 좀 거시기하고, 맛김치를 좀 담궈볼까. 다 담으면 너무 많으니까 반쯤은 배추 그대로 팔아보자. 그래 이왕 만드는 거 비건으로 해 볼까? 의견을 모은 후, 광고부터 올립니다.

〈비건김치, 배추 판매〉
계절학교 학생들이 키운 배추와 직접 담근 비건 김치 팝니다. 수익금은 저희가 생활했던 물걸리 자원순환활동 ‘모아’를 후원하는 데 사용합니다.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포장으로 운영합니다. 김치를 담을 용기와 장바구니를 꼭 들고 오세요!

이제 김치를 담을 차례입니다. 한겨울 차가운 물에 깨끗하게 목욕한 배추와 무, 굵은 소금 넉넉하게 켜켜이 뿌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위아래 뒤집어 주며 잘 절여요. 다음은 김치의 맛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줄 채수 내기! 표고, 다시마 물에 충분히 우린 후, 찹쌀가루 풀어서 풀을 만들어요. 간장으로 간을 하고요. 찹쌀채수풀이 완성되면 이제 양념 들어갑니다. 마늘 넉넉히 넣고, 생강, 양파, 사과, 배, 믹서에 갈아 찹쌀풀, 고춧가루, 국간장, 매실액을 넣고 양념을 만들어준 뒤, 김치에 맛있게 버무립니다. 버무리면서 맛보니 오~ 꽤 그럴 듯합니다. 초록이라 배추가 사을짝 질긴 느낌 있지만 양념이 맛있으니 입맛 다시며 자꾸 먹게 됩니다.

알이 하나도 안 찬 배추와 비건 김치. 사진제공 : 에리카
알이 하나도 안 찬 배추와 비건 김치. 사진제공 : 에리카

동네 입구에 자리를 잡고 비건 김치와 배추를 팔기 시작해요. 지나가던 어르신(할모니)께서 ‘아이고 이게 무슨 김치여?’ 하시니 아이들이 “이거 아침에 저희들이 담았어요! 시식도 가능해요!” 눈치 빠르게 억새로 만든 꼬지 가져와 시식을 권합니다. 한 입 드시더니 “아이고, 김치 잘 담았네. 맛이 괜찮네!” 할머니의 호평에 아이들은 으쓱으쓱, “안 그래도 김치 필요했는데, 1킬로만 줘 봐~” “네! 많이 담아드릴게요!” 시작이 좋습니다.

비건 김치 판다는 소식에 학교 학부모님들도 방문하셨는데, 구입하면서 찍은 사진이 공유되고 또 공유되면서 은근 사람이 북적북적합니다. 저도 가져간 반찬통에 꼭꼭 눌러 500g 정도 구입했는데, 집에 가서 먹으니 매콤한 것이 어찌나 입맛 당기던지 ㅋㅋ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작은 통 준비한 걸 살짝 후회했어요. 손님들 오가는 가운데, 1학년 아이를 둔 아빠가 큰 김치통 들고 와 4kg 담아달라고 합니다.

(좌) 염려와는 달리 절찬리에 팔려나가는 김치. / (우) 아이들과 함께 즉석에서 부쳐 먹는 배추전. 사진제공 : 에리카
(좌) 염려와는 달리 절찬리에 팔려나가는 김치. / (우) 아이들과 함께 즉석에서 부쳐 먹는 배추전. 사진제공 : 에리카
겨울엔 배추전! 사진제공 : 에리카
겨울엔 배추전! 사진제공 : 에리카

금방 솔드아웃 되겠네,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초저 1-2학년 선생님들이 잠시 들렀어요. 아이들과 배추전 해 먹을 배추를 사러요! 이 기회, 이 기쁨 놓칠 수 없어 달려 나온 선생님들! 그렇죠~ 겨울엔 배추전이죠. 홍천에서 온 (알이 하나도 안 찬 ㅋㅋ) 배추 몇 통 사고, 급식실에 가서 메밀 부침가루 한 봉 얻고, 교실에 신문지 쫙 까니 어린이들이 참새마냥 쪼르르 둘러앉습니다. 지글지글 기름에 배추전 한 장 부쳐 가위로 잘라 하나씩 입에 넣어주니 귀여운 참새 아가들은 신이 났습니다. 밖에 나간 친구들, 지나가던 어른들, 선배들 다 불러 모아 배추전 맛보라고 야단, 선생님들도 굽다 말고 노릇노릇 잘 익은 배추전 사진 한 장, 선생님들 단체방에 올리고 홍천 배추전 드시러 오세요! 광고를 하니, 출출한 차 반가운 소식은 선생님들을 교실로 불러 모읍니다. 쉴 새 없이 앉아 먹는 꼬맹이들과, 놀다가 뛰어와 한입씩 받아먹는 꼬맹이들, 아예 젓가락 들고 작정하고 먹는 선생님들, 기웃거리는 선배들까지! 홍천에서 온, 알이 하나도 안 찬 배추가 불러낸 즐거움과 기쁨, 행복의 순간입니다.

완판의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나는 사진. 사진제공 : 에리카
완판의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듬뿍 묻어나는 사진. 사진제공 : 에리카

오후 6시 14분, 사진 한 장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관심 덕분에 김치와 배추 완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완판의 기쁨과 자랑스러움 듬뿍 묻어나는 사진 속에. 홍천에서 온, 알이 하나도 안 찬, 시퍼런 배추가 가져온 소소한 행복들이 담겨 있습니다. 누릴 줄 알고, 찾을 줄 알고, 볼 줄 아는 자에게만 온다는 그 행복!

참, 배추 이야기가 나온 김에 김장 후 꼭 먹어야 하는 김치찜 하나 소개합니다. 소문 듣고 만들어 먹은 후, 너무 맛있어서 계속 만들어 먹고 있는 김치찜입니다. 중요한 것 하나! 이 김치찜은 막 담은 김장김치로 해야 해요. 묵은지도 맛있지만 그 맛이 이 맛 아니니까 꼭 김장김치로! 아래 요리는 정확한 계량 아니고 대충이니까, 대충해서 맛있게 드셔 보세요.


★ 보너스 〈김장 후 꼭 먹어야 하는 “들기름 김치찜”〉

  1. 김치 두쪽 잘라 오목한 냄비에 담는다.
  2. 쌀뜨물이나 물 한 컵, 들기름 6스푼(7스푼 8스푼… 아무튼 들기름 넉넉히 넣는 게 핵심입니다!) 넉넉히 두르고 끓여요.
  3. 센불은 타니까 중간불에 뭉근하게 30분 이상, 40분쯤 끓여요. (물 부족하면 조금 추가해도 되고요. 간이 모자라면 액젓, 국간장 등!)
  4. 따뜻한 밥 한 숟갈에 노곤노곤 말캉해진 김치 올려 먹으면~ 우아아아~ 올 겨울 내내, 내년 겨울도 예약할 겁니다!

에리카

대안학교 교사입니다. 즐겁고 재미난 일 궁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이런저런 작당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지금은 어른들과 해야 할 일이 많아, 마인드 컨트롤 중입니다(대외비).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 속에 숨어있는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잘 발견하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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