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왜 할까?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기분이 한결 나아지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때가 있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는 감정과 생각을 해소하게 해준다. 여기서 그 ‘누군가’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그 날 하루를 일기장에 적었을 때 정리가 되는 느낌을 받으니까 말이다. ‘자기표현’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 표현은 분출될수록, ‘누군가 내 얘기를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수록 힘을 받는다. 마음속으로 말할 때, 나만 들을 수 있더라도 소리 내어 말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를 떠올려보자. 어떤 때일수록 말의 힘이 강해지는가?
‘말하기’의 핵심은 ‘듣기’에 있다. 내가 하는 말을 내가 들을 수 없다면 ‘말하기’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주는 것과 받는 것, 이 두 가지 작용으로 이루어진 ‘대화’는 스스로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며, 그 기회를 서로가 상대방과 나눌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저마다의 단어사전
나는 아주 가끔씩 엄마에게 요리를 배운다. 간장은 몇 숟갈 넣어야 하는지, 재료는 어떻게 얼마나 크게 썰어야 하는지, 하수답게 성실한 자세로 질문하면 이렇게 답하신다. “적당히.” “대충.” 당연히 적당히 넣으시겠지만 컵이나 숟가락 없이 간장을 콸콸 부으면서 외치는 ‘적당히’는 나에게 당연히 적당할 수 없는 설명이다(나는 이 상황을 즐기긴 한다).
‘적당히’ 같은 말은 오로지 자신만 그 뜻을 알 수 있는 단어다. 그런데 단어에 대한 느낌, 경험, 관점 등이 반영될 때는 주관적 표현은 물론이고 객관적 대상 역시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바다’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리는 ‘바다’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떠올리는 ‘바다’는 같을 수가 없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지구 위에서 육지를 제외한 부분으로 짠물이 괴어 하나로 이어진 넓고 큰 부분’이라고 정의하는데, 어느 누가 이 문장으로 ‘바다’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나의 감정과 생각을 담아 내뱉은 단어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 걸까? 우리가 저마다의 단어사전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같은 단어가 갖는 저마다의 ‘뜻’을 비슷하게나마 해석할 수 있다 할지라도, 온전히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하다.
날씨 참 ‘좋다’
우리는 날씨가 좋다는 걸 어떻게 표현할까? 온도, 습도, 구름의 모습, 자외선 지수, 미세먼지, 바람의 세기…는 잘 몰라도 그냥 “오늘 날씨 좋다.”고 말할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이 오늘 날씨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물어본다면 우리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다. 주관적 느낌과 생각을 구체적인 현상으로 표현한 경우다. 물론 사람들은 그냥 좋다는 말 대신 구체적인 현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좀 봐.”라고 얘기를 꺼낸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행복한 표정을 읽거나 저런 하늘을 좋아하냐고 물어볼 수 있다. 결국 이 대화의 핵심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 사람에게 무슨 의미인지 표현하게 해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구체적인 현상이나 객관적 대상을 표현하는 건 궁극적으로 주관적 느낌과 생각을 얘기하기 위해서다. 나의 ‘좋다’라는 단어가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좋고, 싫고, 기쁘고, 슬픈’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대화는 어떨까?
당구공
우리의 의사소통은 이렇게 주관적이고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타인에게 완벽히 이해되는 의사소통을 할 것을 주문받는다. 프리젠테이션에서, 토론에서, 회의에서, 우리는 정리되고 정제된 언어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것을 요청받는다.
예전에 모 신문사에서 디베이트(debate, 찬반대립토론) 교육을 열심히 한 적이 있다. 그 토론의 순서는 이렇다.
- 찬성, 반대 측이 각자 입론 발표
- 상대방 입론에 대한 반론 발표
- 상대방 반론에 대한 재반론 발표
- 반론에 의해 검증된 사실을 참조하여 최종변론
그리고 토론에 대한 평가는 평가단에서 하게 된다. 물론 이 평가는 토론 기술에 대한 평가다. 얼마나 자료 조사 같은 준비를 잘 했는지, 얼마나 조리 있게 이야기를 잘 했는지, 얼마나 타인을 설득시켰는지 같은 것이다. 또 가끔 유튜브를 보면 ‘100분 토론에서 OOO이 무개념 XXX를 발라버렸다.’와 같은 제목의 영상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완벽한 논리로 상대방을 입도 뻥긋 못하게 하는 것’이 토론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능력 있는 청년’을 보여주던 어떤 광고도 생각난다. 프로젝터가 켜져 있는 조금은 어두운 회의실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사람들이 U자로 둘러 앉아있다. 이들 앞에서 하얀 셔츠에 팔을 걷어붙인 젊은이가 프로젝터 화면에 반쯤 걸친 채로 멋들어지게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친다. 뭐 이런 게 우리에게 투사되는 좋은 발표의 이미지인 것 같다.
이런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말을 잘하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고 훈련해야 할 것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정리해서 명확히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매끈한 당구공처럼 잘 다듬어진, 단단하고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완벽한, 그래서 어느 누구도 흠집하나 낼 수 없는 그런 말. 그러나 그런 말이 과연 소통이 가능한 언어일까? 당구공들은 서로 튕겨낼 뿐 결코 합쳐지지 않는다. 더 완벽하고 더 단단한 공은 다른 공을 금가게 하고 깨뜨리긴 하겠지만 다른 어떤 것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어렵사리 붙여놓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당구공일 뿐이다. 이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하는 일밖에 없다.
연기
반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나눔잔치를 하기로 한다. 사람들은 약간 들떠서 이야기를 한다.
A : 축제 때 밥을 어떻게 해서 먹을까?
B : 할 거 많은데 간편한 거 하면 좋겠다.
C : 작년에 사람이 많이 오니까 그릇 모자라더라.
D : 근데 밥만 먹으면 재미없던데…
E : 우리 동네 채식주의자들 많은데 어떡해?
도대체 맥락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한참을 오간다. 그러다 ‘번개가 치듯이’ 한 사람이 커다란 솥을 몇 개 가져와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자고 이야기한다. 모두가 좋다고 손뼉을 친다. “준비는 어떻게?” 이야기에 각자 집에 있는 큰 냄비나 솥 같은 거 있으면 가져오고 비빔밥에 넣을 먹을 만한 재료랑 고추장, 참기름, 깨 가져와서 먹자고 한다. 회의 끝! 함께 비빔밥을 먹을 때도 미리 정해진 것이 별로 없기에 “와, 누구네는 열무김치도 가져왔네?”, “어우, 이집 고추장은 왜 이리 맛있어?”하는 감탄과 놀람이 오간다.
이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연기와 같다. 정제된 이야기가 아닌 떠올려지는 대로 던져 놓은 이야기, 다른 생각이 끼어 들어와도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 마무리 되지 않은 문제의식과 질문들, 그런 중언부언들. 이 색색의 연기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색의 연기를 만들어낸다. 이들의 소통은 이것 또는 저것을 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것 ‘그리고’ 저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과정이다.
결국은 ‘되기’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의사소통에 있어서 진리성, 정당성, 진실성, 이해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성에 근거한 대화, 편견과 같은 자신의 개별적인 특수성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추구하는 대화. 그리고 비판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이것이 그가 이야기한 합리적 의사소통이다.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선, 그런 대화가 정말로 가능하냐는 문제다.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가능한 걸까. 과연 인간이 자신의 역사성, 그로 인한 특수성을 배제한 보편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넘어선 보편성을 과연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다른 문제는 내가 논리적으로 내 주장을 더 완벽히 하고, 타인의 주장을 더 정교하게 비판할 때 그것이 과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인가 하는 것이다.
수많은 토론 프로그램에서 서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은 서로 자기주장만 하다가 끝나고 시청자는 알아서 판단하기 마련이다. 회의에서 타인들의 의견을 듣고 서로의 의견을 수정, 보완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가? 대부분은 다수결로 결정이 되기 마련이다. 좀 나아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경우라도 A의견과 B라는 의견의 중간쯤에 있는 어떤 의견인 경우가 많다. 정치권에서는 ‘이건 너희 말대로 하고, 이건 우리 말대로 하고…’ 이런 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물론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것은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완전한 이성적,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도표적 가상성’에 주목하게 된다. 앞의 비빔밥 준비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묘하게 일관성을 갖는 구도. 정확히 의견이 일치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방향성을 찾아가는 논의.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도표적 가상성’이다. 서로 정확한 언어로 생각을 드러내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배경과 역사성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속에 자신과 상대방이 상호 결합하고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두는 듣기와 말하기, 이러한 의사소통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일관성과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과정이며, 타인을 통해 스스로 다른 것이 되어가는 ‘되기’의 과정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켜 양쪽 모두 더 풍부한 존재가 되어가는 그런 과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