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생태학』 표지(부분). 사이버네틱스적 순환성을 표현한 이미지.

생태학적 지혜와 마음

베이트슨은 생태학, 인류학 등을 통해 마음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정신적 과정은 항상 물질적 표현을 가지고 있으며 신경계의 복잡성은 마음의 복잡성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목적적 사고는 매우 제한된 의식을 설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목적을 설정하는 ‘제한적’ 의식에는 상호의존에 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목적적 의식의 무게

등교하는 학생들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역을 향해 떼 지어 몰려가는 직장인들도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있다. 차들로 꽉 막힌 거리,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사이를 맴도는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완수해야할 공부와 업무라는 일과와, 그것들을 위해 이미 정해진 노선,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 잡은 ‘목적’이라는 무게 때문이리라. 목적적 인식론이 삶을 주도하고 생활을 지배하면서, 그 사이 잊고 있던 것 때문에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에 대한 고찰과 반성은 이론뿐만 아니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실로서 목전에 다가왔다. 목적적 삶은 체계나 구조 같은 얼개로 만들어져 있는 듯 여겨지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것이 비자연적이라는 점이다. 자연은 어떤 특정한 의식적 목적이 있어서 순환의 리듬을 타며 흘러가지는 않는다.

마음의 생태학

그레고리 베이트슨1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글은 생소하고 부분적인 것에서 전체의 함축을 그려내는가 하면, 언뜻 보기에는 비연관적인 세트들의 상관관계를 절묘하게 엮어 내기도 한다. 또한, 미시적인 분석에 집중하기도 하고, 때로 생태학적 인식론을 다소 비정제된 문체로 기술하기도 한다. 글의 표현적인 측면에서도 마치 모든 학술적인 글이 고증에 바탕을 두고, 논리적이며, 일정한 체계의 틀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듯하다.

『마음의 생태학』에 수록된 글 중 ‘의식적 목적 대 자연’이라는 논문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의식적 목적이 얼마나 비자연적인지, 계층구조적 사고가 얼마나 병리적인지를 복잡성의 질서, 즉 자기-교정적 시스템인 사이버네틱스 모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그림. 살아있는 (즉 생태학적) 시스템에서 증가하는 모든 불균형은 언제나, 증가하는 불균형의 부작용인 자신을 제한하는 요인들을 만들어낼 것이다.(『마음의 생태학』P.737~738)
생태학적 위기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그림. 살아있는 (즉 생태학적) 시스템에서 증가하는 모든 불균형은 언제나, 증가하는 불균형의 부작용인 자신을 제한하는 요인들을 만들어낼 것이다.(『마음의 생태학』P.737~738)

베이트슨이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문제이다. 정신적 과정은 항상 물질적 표현을 가지고 있으며 신경계의 복잡성은 마음의 복잡성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서구 인식론은 마음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줄곧 배제시켜 왔다. 복잡하면서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회피는 진화론의 출현으로 인해 더욱 공고히 되어갔다. 그는 마음을 포함한 복잡한 생태학적 시스템의 대표적인 것으로 개인으로서의 인간, 사회생태계, 전체 자연생태계를 들고 있다. 이 세 가지 분류는 구분이나 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분리를 일으킨 것은 그 복잡한 시스템들의 첫 번째 예인 인간, 호모 사피엔스 스스로이다. 거대 복잡계에서 스스로를 분리시켜서 경쟁과 상호 의존이 결합된 상황에서의 균형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한 행위는 다분히 목적주의적이고 그 목적을 지휘하는 것은 의식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목적적 사고는 매우 제한된 의식을 설정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이것을 ‘선택’이라고 한다. 이 목적을 설정하는 ‘제한적’ 의식에는 상호의존에 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베이트슨은 이 ‘상호의존에 관한 이해’를 지혜라고 부른다) 상호 의존에 관한 이해는 바로 인간 자신과 생태계 시스템에 대한 체계적 본질을 깨닫는 것인데, 목적적인 의식은 전체 마음에서 체계적 구조의 전반적 특징인 회로 구조를 가지지 않는 연쇄를 뽑아내므로 그가 말하는 생물학적 통찰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베이트슨은 산업혁명을 통해 증대되고 현대 기술산업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과학적 오만의 자리에, 인간은 단지 더 큰 시스템의 부분일 뿐이며 부분은 결코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발견이 대신 놓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이버네틱스에서의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배제와 제한이 성립될 수 없다. 명백한 분리도 없고, 획일적인 통합도 없다. 예전에는 종교가 주로 역할을 했었던 명백함에 대한 설정을 현대 과학과 기술이 대신하면서 만일 (어떤 목적에 의해) 명백함을 표방한다 해도 그것은 가정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비)명백한 가정을 바탕으로 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면서 마치 전체시스템을 대표하는 듯한 제한된 의식이 오늘날까지의 지속적인 불균형을 형성해 왔다고 주장한다.

사이버네틱스와 지혜

우리는 왜 그토록 무수한 가정을 명백함으로 설정하는 오류에 길들어져 있을까. 명백함으로 믿어온 것들이 가정임을 인정하는 순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정의 연쇄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까봐 두려워서일까. 그것은 끊임없는 연쇄이자 동요이고 변화이며 동시에 균형인데, 그러한 복잡계를 직시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은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회피가 아니면 무엇일까. 흔들린다는 것은 온갖 폭력의 격자를 동원해 임의로 분리시켜 놓은 존재들이 다시 뒤섞이는 것이다. 그러한 흔들림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전체로서 판별 불가능한 명백함은 요청된 유비와 부정 등을 통해 또다시 가까스로 새로운 명백함의 옷을 입는다. 무게를 갖지 않은 것이 하중을 견딘다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그어대는 분리의 선 안에 존재하는 것은 텅 빈 공간이고, 그 텅 빔은 명백함이라는 가정(허구)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생태학』 표지(부분). 사이버네틱스적 순환성을 표현한 이미지.
『마음의 생태학』 표지(부분). 사이버네틱스적 순환성을 표현한 이미지.

텅 빈 명백함 혹은 명백함 없음을 직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이버네틱스적 순환성을 이해(지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비-의식적인 체험, 혹은 예술가의 어떤 체험, 찰나적이면서 연속적일 수 있는 어떤 혼돈스런 합일의 체험(베이트슨은 이것을 사이버네틱스 모델로서의 경험이라고 부른다)일 수 있다. 예술은 무의식적인 체험이 아니라 정신적 과정들에서 수준들 간의 ‘관계’에 관여하고, 예술적 체험이나 그에 준하는 체험은 이 관계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명백함이라는 준거의 무게를 털어버리고 먼지같이 가벼워질 수 있는 ‘비-분리의 상태’, 혹은 ‘되기2’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건 목적적인 의식의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스스로를 위한답시고 자행한 스스로를 옥죄는 현상들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적 목적이라는 틀에서 자유롭고, 편협한 왜곡으로 제한되지 않는 지혜의 행위가 필요한 때일 수 있다.

‘설정된 명백함인 내가 역시 설정된 명백함인 너를 지배하려면’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는 길은 ‘설정된 명백함인 너와 역시 설정된 명백함인 내가 공존하려면’이라는 다른 목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보다 ‘너와 내가 다른 것인가? 가정된 나와 가정된 네가 원래는 어떤 관계였는가? 그 관계 사이에 어떤 목적이 있기는 했는가?’ 같은 질문으로의 전환이 아닐까? 그의 말대로 ‘나’라고 부르는 개인적인 통로의 결합체는 더 큰 마음의 부분에 불과하므로 더 이상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베이트슨은 자연 생태를 목적의식 없이 관찰해 보면 그동안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만들어 가고 있는 관념과 실제들(인식론, 정치제도, 과학기술 등)이 얼마나 비(非)자연스럽고 모순적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상당히 분석적인 논리전개와 감성적인 축약의 표현을 넘나드는 그의 글 마지막 즈음에서 발견된 말은 공교롭게도 ‘사랑’이었다. ‘단순한’ 의식이 수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마음이 활동하게 하고, 어쩌면 모든 관계들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임에도 늘 의식의 매끈한 면에서 미끄러지는, 관계의 근저에 있을 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적적 의식으로 인해 다가가기 쉽지 않게 된, 바로 그 말이다.

관점의 전환

언제부턴가 우리는 ‘삶의 무게’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나를 너와, 우리를 그들과 분리시킨 것에서 더 나아가 내가 사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삶과 나도 분리되어, 삶이라는 게 나를 무겁게 누른다는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은 분리되면 될수록 서로를 무겁고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표현이다. 목적적 의식이 주도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관계의 원형에서 멀어지고 단절에 익숙해지면서 무거운 삶을 명백함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껏해야 무거운 것을 어느 쪽으로 옮기면 더 효율적일까를 고민하면서 정작 무게 자체에 대한 의문은 피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베이트슨의 말대로, 모든 생태학적 관점은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1. 영국 태생의 미국 문화 인류학자로서,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동물학, 심리학, 인류학, 인종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성과를 남겼다. 20세기 서구의 사회, 자연과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2. 주체나 목적을 지니지 않고 어떤 다양체가 다른 다양체에 의해 탈영토화될 때 겪는 과정, 조성과 기능을 확인해주는 생산 과정(들뢰즈, 가타리)

노마드

혼자 또는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소소하게 실천하는,
평범하게 살지만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색깔이 분명해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투명함을 지향하는,
분자적 노마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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