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공연 예술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 사이에서] ③ 풍족함 속에서 선물을 주고받기, 균형을 맞추기

숲을 살리는 균사체의 방법에서 기후 운동 퍼포먼스의 영감을 깨달은 비커밍 스피시스와 함께 협력하며, 현대예술에서의 공동체성과 기후운동의 연결성을 깨닫게 된다.

[현대 공연 예술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 사이에서] ② 작가와 작가 없음, 혹은 모두가 작가

지난 10년 간 예술계에서는 공동체성,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돌봄과 포용성, 공동체성의 회복의 내러티브들을 주목하고 있다. 한 개인에게 요구되었던 효율성과 생산성, 그 생산성 아래 숨겨져 있던 재생산의 노동, 돌봄의 책임과 의무가 실제로 공동체와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을 최근의 코로나 및 지구적 위기로 인해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여기서 근대의 작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예술계에서 이 공동체주의는 얼마만큼 실현 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불가능할까 라는 질문이 든다. 동시에 근대 미학에 아직도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 예술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도 든다.

기후 운동 퍼포먼스와 동조, 전염, 바람의 네트워크

기후 운동의 방향은 결코 수직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수 없으며, 많은 이들이 정동을 주고받는 탈중심적이고 분권적이며 자율적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땅속 균사체와 뿌리의 거대한 연결망처럼 순식간에 분산되어 다수의 사람들에게 뻗어나가는 리좀과 같은 형태여야 할 것이다.

기후정의에서의 제도와 정책대안

그동안 한국의 기후운동은 과감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설정과 이행을 요구하는 것에 치중되어 왔다. 게다가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확대로 상징되는 녹색성장론에 기댄 기후운동이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고, 민관 거버넌스라는 이름 아래에 급진적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운동이 온실가스 배출을 지속적해서 증가시키고 있는 사회경제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에 부족함이 많다. 이들이 쉽게 동원하고 있는, ‘기후악당’ 국가의 시민으로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기후정의는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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