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공연 예술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 사이에서] ③ 풍족함 속에서 선물을 주고받기, 균형을 맞추기

숲을 살리는 균사체의 방법에서 기후 운동 퍼포먼스의 영감을 깨달은 비커밍 스피시스와 함께 협력하며, 현대예술에서의 공동체성과 기후운동의 연결성을 깨닫게 된다.

앞의 글에서 나는 공연예술 작업과 기후운동 퍼포먼스는 다양한 존재들과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에, 그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과정 속의 역학관계와 포용성을 볼 수 있는 미학에 대해서 제안했다. 그런데 반대로 질문할 수 있다. 예술작업과 기후 운동 퍼포먼스에 대한 성과를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라는 크레딧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면, 또 결과물의 완성도를 따지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그 결과물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한 개인이 자신의 기여에 대한 보답을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나 경제적 보상으로 받지 않는다면 그 행위가 실행 가능할까? 그 행위가 얼마나 깊이를 가질 수 있고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까?

감사와 선물을 주고받기

기후 운동 그룹의 구조, 역할분담과 관계의 다이내믹은 매우 유기적이었다. 참여자들은 각 액션에 대해 각자가 느끼는 흥미, 시급성, 처한 여건 (예를 들어 가족부양이나 생계의 책임 등)에 따라서 가능한 에너지를 투자하며 진행되었다. 따라서 각 액션마다 리더와 참여자가 바뀌는 성글고 유동적인 그룹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각자가 액션에 부여한 노력과 에너지라는 기여는 경제적 보상보다는 ‘선물’의 형태로 나타났고,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보답되었다. 기후 운동 그룹 안에서 각자가 가진 지식, 정보, 퍼포먼스적 방법론이 서로에게 공유되고 자연스럽게 전파되었다. 옆에서 본 긍정적인 부분은 다른 그룹이 흡수하고 재생산하였다. 어떤 아이디어에 대한 소유권 혹은 크레딧이라 함은 그것을 처음 제공한 이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였다. 어느 지역의 기후운동가 그룹이 처음으로 석유관을 막는 시위를 벌였고, 그것을 다른 지역의 기후운동가 그룹이 그 아이디어와 방법론 똑같이 따라 했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를 소송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후운동가들에게는 그 아이디어의 소유권보다 더 중요한 공동의 목표가 있다. 자연을 원료로 착취하는 자본주의 구조에 태클을 거는 것. 이러한 운동의 전파 방식은 땅 속의 영양분과 정보들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전달하고 분배하는 균사체의 모습과 닮았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사진출처 : Fanny Gustafsson

우리는 이것을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에게 어떤 아이디어나 방법론이라는 선물을 나눠 준 이에게는 그에 대한 감사와 존중을 남겼다. 그를 통해 우리가 함께 일했음을 오래 감사히 기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사람의 방법론과 실천이 개인 안에서 머무르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며 또 선물을 받으며 흘러나가게 했을 때, 그 퍼져나감의 힘이 엄청났다. 비커밍 스피시스의 활동과 액션이 공유된 이후 대학의 연구 그룹, 공사립 문화 기관, 개인 연구자, 및 예술단체 등에서 예상도 못한 만큼 많은 콜을 받았다. 마치 열대우림의 열매들이 한꺼번에 거대하게 열린 느낌이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사회 안에 오래전부터 존재했었을 ‘선물 주기’는 로빈 월 키머러 Robin Wall Kimmerer라는 인디언 출신 생물학자로부터 다시 기억되었다. (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2020) 수렵 채집 사회의 인간은 자연이 우리에게 열매와 과일 등과 같은 무한한 선물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마인드 셋은 ‘우리는 아직도 가진 것이 부족해’라는 자본주의 소비 마케팅에서 부추기는 ‘부족함 scarcity’보다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는 ‘풍족함 abundance’으로 세팅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곧 매진, 더 구할 수 없음’으로 계속 부족함의 내러티브를 반복하며 더 가지기 위해 자원을 착취하고 낭비한다. 경제가 더 성장할 수 없음을 엄청난 공포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가 소유하기 전에 내가 소유를 하도록 경쟁을 부추긴다. 이와 반대로 원주민의 우주관을 다시 소개하는 로빈 월이나 냅 미니스트리 Nap ministry (@The Nap Ministry, 낮잠이라는 적극적 수동성의 행위를 통해 식민적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하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그룹)는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인드 셋을 회복하고, 우리의 내러티브를 다시 쓰자고 한다. 그리고 그 충분함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을 함부로 쓰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풍족함을 느끼며 균형을 맞추기

보르네오 열대우림의 다약 원주민들이 숲과 공생해 온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Micheal Dove, 2011, The Banana Tree at the Gate: A History of Marginal Peoples and Global Markets in Borneo) 열대우림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mass fruiting 혹은 masting이라고 기이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열매가 맺히는 해가 있다. 그렇게 풍족한 해에 원주민들은 더 겸손하게 필요한 만큼만 열매를 가져가고, 남은 것은 주변 사람들과 나눈다. 그들은 많이 가져간 만큼, 자연에게 다시 돌려줘야 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숲이 인간에게 많이 준만큼 인간의 머리를 베어 간다는 헤드헌팅이라는 은유적인 신화도 있다. 이런 마음 덕분에 그들은 숲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숲을 사유화하거나 자원화하는 대신 마을 공동체의 신성한 숲이자 공공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 있었다. 인디언과 다약 원주민의 우주관을 겹쳐보면, 로빈 월이 말하는 인디언의 ‘선물을 주기’는 풍족함이라는 바탕이 깔려있다. 자신이 가진 게 부족하고,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빼앗길 것 같은데도 선물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고 넉넉하기 때문에 선물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정신적 기반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리고 선물을 줌으로써 우리의 풍족함이 더 잘 유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죽은 나무에 피어난 버섯들. 사진 제공: 서영란

균사체가 땅 속에서 영양분들을 배분해서 전체 숲을 건강하게 만들지만, 그 반대로 한 나무에 버섯들이 많이 생겨 그 나무를 죽게 만들기도 한다. 무조건 주는 것이나 부족한데 억지로 주는 것은 후자의 죽어가는 나무에 가까울 것이다. 숲에서 죽어가는 나무는 거시적으론 그 숲 전체의 미래의 영양분이 되겠지만, 한 개인이 빈곤하게 죽어가고 있는 나무처럼 여겨진다면 그 선물 주기는 강요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선물을 주기는 현대예술과 학문 안에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자아낸다. 기후운동과 예술활동을 비교하면서 어느 한쪽이 이타적이거나 이타적이지 않다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단편적이다. 선물을 주는 것과 경제적 대가를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이타적이고 이타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대개 이 두 가지는 우리 생활의 곳곳에서 혼재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크게 작게 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적이고 이타적인 돌봄 행위를 하고 있다.

기후 운동은 우리 공동의 목표가 명확하고 처음부터 경제적 보상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저작권이나 금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예술 현장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의 다양성의 가치를 베풀면서 동시에 이를 통해 경제적 활동을 영위해야 한다. 누군가가 함부로 작업 아이디어나 방법을 카피했을 때, 한 작가의 생활과 위치는 매우 연약해진다. 따라서 작가를 보호해 주기 위해 저작권 혹은 소유권을 예민하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 기후 운동 퍼포먼스를 통해 배운 것은, 예술가로서 내 개인의 작업이 한 사람의 재능과 노력만이 아닌 수많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받은 선물, 다른 이들의 영향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과 감사이다. 따라서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동료 예술가들은 경쟁 상대가 아닌 서로에게 ‘영감’이라는 선물을 주며 함께 영양분을 먹고 자랄 수 있는 형제자매 작가들이다. 이 다채로운 관계는 우리에게 풍족함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서 ‘우리’.

공동체성을 다시 돌아보는 사회 움직임들이 활발히 생겨나면서 공연예술과 기후 운동의 접점이 보인다. 근래에 작업 과정 속의 콜렉티브성을 중요시하는 예술가들이 많아지고 있고, 콜렉티브 형태의 작가 그룹이나 예술인 조합, 예술가들의 인권과 복지를 보호해 가는 시도들이 생겨나고 있다. 더 넓게 지역사회 안에서는 생태적 지혜처럼 새로운 공동체 및 조합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을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흐름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완하는 미래를 상상하는 현재 진행 중인 실험들일 것이다.

나는 기후 운동을 하는 동료들을 통해 포용하며 협력한다는 것, 서로를 돌보고 응원하며 영양분을 나누는 것에 대해 배웠다. 또 다양한 생물들과 함께 8억 년 동안 지구에서 살아온 균사체로부터, 또 우리의 가장 오래된 기억인 원주민의 우주관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프로모션 하는 경쟁과 부족함의 내러티브 위에 다른 내러티브를 써 내려갈 수 있음을 배운다. 모든 시간과 노력이 화폐로 환원되는 사회에 발을 딛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민감하게 감각하며, 이에 책임을 지고 응답하는 모든 분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개개인이 이 기후 위기 현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응답하는 차이가 있음을 존중하고 감사하며. 〈끝〉

서영란

서영란은 서울과 코펜하겐에서 활동하는 안무가, 리서처, 기후운동가이다. 한국에서는 샤머니즘, 전통춤, 여신신화, 아시아의 근대화에 대하여 인류학적 조사에 기반한 다원적인 무용공연을 만들어왔다. 덴마크로 이주한 뒤 원주민의 지식, 인간 너머, 다생물종 운동에 영향을 받은 기후 운동 네트워크의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비커밍 스피시스' 기후 운동 퍼포먼스 그룹의 멤버로, ‘센싱 올드 에이지’ 인류학 프로젝트의 아티스트 리서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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