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 ④개인과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2020, 도서출판 한살림)에 담긴 특이점청년 이야기를 여러 편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저 ‘함께하는 건 원래 힘든 것’이라 여기고 관계를 기피하거나, 혹은 끊임없이 부당함을 강요받아오지는 않았는가? 이번 편에서는 ‘개인’과 ‘관계 맺기’를 특이점청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개인’에 대한 감각

대안학교를 비롯한 공동체운동의 핵심은 ‘함께’에서 시작했다. 함께 움직이고 해결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사회 어느 곳을 봐도 공동체운동이 관계를 만들기 위해 가장 노력한 곳 중 하나일 테지만, ‘함께’에 집중했던 이 문화들 역시 일반적인 사회가 그래왔듯 ‘개인에 대한 감각’을 고려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하는 것이 편했던,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무엇을 같이 한다는 게 힘들었던 강동하 님은 협업을 중시하는 하자작업장학교에 1년간 다녔다. 대부분의 특이점청년들과 달리 본인이 속했던 대안학교나 공동체 생활이 어떠했냐는 질문에 좋은 점을 먼저 쏟아내서 의외였긴 했으나, “협업은 너무 어려웠다”며 당시 고충을 얘기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조율하고 맞춰가는 힘든 과정을 연습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주목하고 싶은 점은 ‘어떤 식으로’ 연습을 해야 좋을지 논의가 필요하다는 거다. ‘협업하고 관계 맺고 표현하라’는 하자작업장학교의 외침이 강동하 님에게 울림을 주진 않은 것 같다(얼마나 힘든지 일깨워준 건 확실하다). 대신 강동하 님은 하자작업장학교를 나온 후 “대안에너지기술연구소에서 일할 때, 추가로 상담공부도 병행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얘기했다. 박푸른들 님 역시 개인을 뒷전으로 미루는 공동체 문화를 지적한다.

박푸른들: 조금 더 희생해야 한다고 요구하는데, 사실 개인을 희생하면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어떤 단체를 만들어내고, 그 단체에서 활동하는 게 ‘먼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활동가라면 활동가로서 노동조건이 제대로 갖춰지고, 그래서 만족스러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자꾸 거시적인 것만 얘기하고 우리 주변 평화는 돌보지 않잖아요. 주변 또래들하고는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이 잘 되더라고요.

선명한 공동체인 학교와 직장, 군대는 여전히 개인을 지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평화 활동을 하는 단체 역시 개인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지 않나 보다. 하승우는 우리 사회를 두고 “공(公)이라는 것이 다양한 사(私)들의 만남일 텐데 우리는 마치 사를 버리는 것이 공인 것처럼 잘못 생각해왔다.”고 얘기한다.1 박푸른들 님과 주변 또래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됨으로써 그 안의 개개인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은 소속, 집단, 조직이 개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함께 하는 건 원래 힘들다는 인식만 가질 뿐, 어떤 방식이나 태도를 갖는 것이 ‘함께하는 것’인지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분명 그 ‘함께’에 있을 텐데 말이다. 함께한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 이것이 개인에 대한 감각 아닐까?

개인주의, ‘당연함의 축소’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에서 개인주의를 세 개의 세대로 구분하는데, 그가 말하는 1세대 개인주의는 개별화가 아닌 추상적 동등을 의미한다. 자신들의 구체적 특징을 배제하는 대신 투표자이자 법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2세대 개인주의는 차이의 인정을 의미한다. 소속이 아닌 개인이 주장하는 정체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2세대 개인주의는 정체성 정치 운동을 담고 있다. 배제된 정체성이었던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가 법적 주체, 투표하는 주체로서 권리를 얻기 위함이다. 이는 ‘정상’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일이었다.2

특이점청년들의 앞선 사례들은 2세대 개인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외부에 맞서 흐려지는 개인을 지키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소속으로 묶임으로써 개인이 흐려지는 것과, 소속이라는 개념 자체와 함께 정체성이 흐려지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외부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색칠하지 못 하게 하는 경우고, 후자는 개인이 색칠하기 자체에 의문을 품은 경우다. 후자가 바로 3세대 개인주의의 특징이다.

카림이 ‘다원화’되었다고 표현하는 3세대 개인주의는 정치 운동이 아니라 목적 없는 변화가 낳은 효과다. 정상의 범주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이라는 범주를 지운다. 추상화된 동등의 주체 혹은 차이를 내세운 정체성 주체와 달리, 개인을 규정하는 자기 규칙이 없다. ‘당연함이 축소된 자아’다.3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상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타자에게 더 이상 정상의 기준으로 제시될 수 없다. 나아가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정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고, 온전하며, 당연한 존재가 아님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공(公)이라는 것이 다양한 사(私)들의 만남일 텐데 우리는 마치 사를 버리는 것이 공인 것처럼 잘못 생각해왔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uzzle2_found_bw.jpg)
“공(公)이라는 것이 다양한 사(私)들의 만남일 텐데 우리는 마치 사를 버리는 것이 공인 것처럼 잘못 생각해왔다.”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가 자기소개를 할 때 나이와 소속, 신분을 얘기해왔던 건, 나이와 소속과 신분이 곧 나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생’ 혹은 ‘27살’ 같은 정보는 그 사람을 아는 데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도 자기 자신을 표현해주는 것 같은 하나의 정보를 이름표에 걸고 다닌 거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 그런 정보를 물어봤고, 그것이 곧 상대방이었고, 그에 맞게 대했다.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면 반말을 하는 게 당연했다.

요즘은 나이가 어리다고 무조건 반말 하는 경우는 조금 줄어든 것 같다. 이런 태도는 ‘나는 저 사람에게 반말을 해도 되는 사람일까?’, ‘관계를 꼭 그런 식으로 맺어야 할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결국은 내가 어떤 정체성으로 상대방과 마주할지 고민하는 과정이 생긴 거고, 다른 선택이 가능해진 거다.

관계를 기피하는 개인주의?

오창민: 생활양식이 있는 것 같아요. 개인 지향적 성향들이 무척 강하고, 힙한 문화나 감성 같은 걸 좋아하죠. 남들과 구분되는 자아를 가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SNS니 뭐니 해서 소통하고 관계 맺는 것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너무 질척대는 건 싫어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아요.

마고: 청년들을 보면 대개 바탕이 넓더라고요. 어디가 고향이라는 개념도 없고, 그냥 좋은 친구, 좋은 사람들이 있는 데가 내가 살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성향이 되게 좋은 것 같아요.

공동체가 해체되는 시점에서, 공동체성과 복지가 아닌 경쟁과 배척으로 삶의 영역이 채워진 것 역시 3세대 개인주의를 초래한 요인이다. 개인 책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사회에서 길을 잃은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아 해매고 있다.

마고 님과 오창민 님이 바라보는 ‘자유로운 개인’이야말로 바로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은 더 이상 흐려지고 싶지 않기에 자신만의 것을 추구하며 외부에 대항하기도 한다. 하지만 특이점청년들이 오로지 2세대 개인주의이기만 한 건 아니다. 그와 동시에, 당연함이 없는 유연한 자아의 흐릿함을 발판삼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자유로운 개인들은 오창민 님 말처럼 쿨한 소통으로, 마고 님 말처럼 고정되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태생적으로 ‘아싸’에 가깝다는 오창민 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너무 유명해지면 싫어진다며 “남들하고 구분되는 나만의 개성이나 영역 같은 것들이 중요한, 개인주의 성향의 사람”이라고 한다. 남들과 똑같이 살거나 똑같은 취향을 갖고 싶지 않다. 하지만 본인이 말하는 개인주의란, 관계 자체를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여 얘기했다.

오창민: 개인주의는 좀 다른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혼자 있는 게 좋아’가 아니고, 일과 소속과 분리되는 ‘나’라는 개인을 존중하고 인정해주느냐가 개인주의인 거죠. ‘나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싫어’ 이거는 개인주의가 아니죠. 그건 그냥 고립이죠.

카림은 지금 우리가 3세대 개인주의 사회에 들어선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1, 2, 3세대 개인주의가 공존한다고(때로는 대립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실제로 구분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나는 개인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려는 그의 질문이 결국 ‘함께’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카림은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통된 세계관도 없이, 공유하는 확신도 없이 다원화된 개인들인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개인을 생각한다는 것은 관계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개인에 대한 고민은 곧 관계에 대한 고민이다. 개인은 결국 ‘나와 너’다.


  1. 하승우, 『공공성』, p.19.

  2.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2장 ‘지금―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3.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2장 ‘지금―다원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4.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p.60.

권희중, 이호찬, 신승철 공저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2020, 도서출판 한살림) 중 일부 발췌한 글입니다.

심순

타고난 과격한 성격을 고치고 착하게 살아보고자 심순(心淳)이라는 별명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수시로 버럭과 반성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호찬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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