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점 청년과 현 시기 공동체운동의 의의 –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2020, 도서출판 한살림)가 갖는 의미에 대해

마을공동체 출신의 2세대 청년을 ‘특이점 청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특이하게 자라왔고, 환경, 생태, 공동체 등 특이한 가치에 익숙한 청년들이다. 이 글은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2020, 도서출판 한살림)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글로서, 특이점 청년들을 통해 공동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짚으면서 색다른 가능성과 잠재력을 타진하는 글이다. 아직 우리는 특이점 청년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해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들의 미래진행형적인 삶의 여정에 박수를 보낸다.

거리조절의 미학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

이전까지는 도시는 익명성, 개인주의, 소비주의 등의 영역으로만 간주되었으며, 이러한 낯선 익명의 도시 관계망은 흔히 친밀하고 유대적인 농촌 공동체는 대비되어 왔다. 그러나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공동육아, 협동조합, 대안학교 등에 기반한 도시공동체운동이 발흥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러한 도시공동체는 낯선 익명의 관계망으로서의 도시 공간에 친밀하고 유대적인 내부관계망을 이식했던 일종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점은, 서로를 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깊이와 잠재성, 색다른 가능성과의 접속하는 시도에서부터 시작한다. 별명이 있는 공간, 늘 이웃과 파티와 놀이가 있는 공간, 마실 나갈 수 있고, 자전거가 더 선호되는 도시구역을 만드는 것은 일종의 ‘지금-여기의 유토피아’의 설립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1인 가구인 청년들은 마을의 주변과 곁에 배치되면서도 끊임없이 마을에서의 삶의 가능성으로서의 일자리, 주거 등을 타진하면서 대안을 모색해 왔다. by Vitaly Vlas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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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인 청년들은 마을의 주변과 곁에 배치되면서도 끊임없이 마을에서의 삶의 가능성으로서의 일자리, 주거 등을 타진하면서 대안을 모색해 왔다.
by Vitaly Vlasov

2020년에 즈음한 현재 공동체 내에서의 청년의 상황은 어떠한가? 농촌형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아주 적은 수의 청년들은 여전히 간섭과 돌봄이 함께 오는 상황이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우려와 걱정을 하고 있다. 반면 도시형 공동체에서 청년들은 개인으로 분해되어서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위생적인 관계망이 조성되고 실존적인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친밀성의 우애가 너무 깊어지면 간섭이 되고, 익명성의 환대가 너무 심해지면 고립무원이 된다. 결국 마을의 다음세대인 ‘특이점 청년’들에게는 우애와 환대 사이에서의 거리조절 즉,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면서도 동시에 친밀한 공동체적 관계망이 활성화되는 상태를 지향한다. 프라이버시가 왜 중요한가? 예수님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뉘 집 아들 누구’라고 불리는 것은 공동체에서 뻔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익명의 낯선 사람들 틈의 일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도시형 공동체에서의 새로운 변화의 흐름은 바로 1인 가구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1인 가구는 사실상 가족 중심의 주거형태가 와해되고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개인주의라고 치부되었던 삶의 양식이 전면에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이전까지 공동체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문제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배치와 관계망 없이 사회구조와 맞닥뜨린 개인의 무기력지층의 문제 즉, 시스템은 복잡화되는데 개인들은 원자화되는 상황의 문제는 근래 몇 년간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온다. 1인 가구 유형의 청년세대의 등장은, 공동체를 일종의 ‘장소’와 동일한 것으로 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망 자체로 규정할 필요성을 느끼도록 한다. 이러한 1인 가구의 등장은, 사실상 부동산을 갖고 있지 않아 어떤 장소성에 속할 수 없는 ‘특이점 청년’들과 같은 마을운동의 다음세대들의 특징을 이룬다. 마을을 장소성이 아니라 이동성의 모빌리티나 유목성이 특징인 노마드 등으로 규정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도시에서의 1인 가구의 삶은 소통과 관계의 단절이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관계의 빈곤과 함께 찾아오는 개인의 빈곤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비교적 자원과 기회와의 접근가능성이 있는 도시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성공중심적이고 효율적인 도시환경은 ‘지금–여기’의 삶이 아닌 ‘저기 저편’을 향한 목표로 무장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계발, 자기연마, 자기통치라는 방식으로 개인책임에 큰 비중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전 세대들에게서와 같이 단지 힐링이나 웰빙의 소재거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필요의 충족을 위해 공유경제를 작동시키고 관계의 요구에 대한 실질적인 해답일 수 있으며, 잠깐 동안의 여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쉼표이고 미래의 삶을 계획해 볼 수 있는 판과 구도라고 할 수 있다. 1인 가구인 청년들은 마을의 주변과 곁에 배치되면서도 끊임없이 마을에서의 삶의 가능성으로서의 일자리, 주거 등을 타진하면서 대안을 모색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낯선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로운 삶이나 프라이버시와 같은 지극히 필수적인 삶의 요소를 지키면서도, 관계의 빈곤으로부터 오는 소외, 외로움, 고독, 무위 등을 해결하려는 이중적인 시도가 마을의 특이점청년들 사이에서의 커다란 관심거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자체가 갖고 있는 자원의 한계, 특히 장소 기반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마을은 청년들과의 일정한 어긋남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구성적 협치 : 공공영역과 공동체가 협력해야 할 일자리 문제

노동은 활동과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활동은 재미와 놀이처럼 여러 모델을 넘나들며 이행하고 횡단하는 반면, 노동은 의미와 일과 같이 하나의 모델에 집중하고 수렴되는 구도를 그린다. 이러한 의미와 재미 사이에서 마을공동체의 일은 의미보다 재미를 추구하지만, 그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늘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한다. 사실상 의미를 추구하는 일을 재미 때문에 하는 활동같이 해달라는 시니어들의 주문에 대해서 젊은 세대들이 열정노동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열정노동의 쟁점은 결국 기성 공동체 1세대와 공동체 일에 고용된 청년활동가들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냈다. 사실상 젊은 세대들이 공동체에서 하고 있는 일들의 성격 역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공공일자리나 공공의 지원을 받는 일자리일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아직까지 평가절하되고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자리라 하더라도 그 양이 많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마을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활동가들의 숫자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을의 청년세대들은 성인이 되고 동시에 마을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형국이 되고 있다.

청년세대에게 있어 공동체의 의미는 가족 기반, 장소 기반, 미래 기반에서 벗어나, 취향과 기호 기반, 관계 기반, 지금-여기 기반으로 이행한 상황이다. by John Moeses Ba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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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세대에게 있어 공동체의 의미는 가족 기반, 장소 기반, 미래 기반에서 벗어나, 취향과 기호 기반, 관계 기반, 지금-여기 기반으로 이행한 상황이다.
by John Moeses Bauan

마을이 청년세대 일자리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공공영역과 협력하는 거버넌스의 판이 상시적으로 깔려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자기생산은 공공영역의 타자생산과 교직되어 있으며, 이러한 자기생산과 타자생산의 교차점에서 거버넌스가 해결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셈이다. 현재 서울시 등에서 협치위원회를 꾸려서 가동시키고 있지만, 공동체와 공공영역의 협력을 통해서 마을현장의 청년문제나 일자리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고 있는 단계에 있지 않다. 더욱이 마을의 관계망이 공공영역이 활용할 수 있는 풀을 확산하는 차원이 되거나, 공모형 프로젝트가 아닌 자원봉사형 프로젝트로 공동체를 동원하는 형국이다. 이를 테면 인건비와 실비를 산정할 수 없는 프로젝트는 결국 자원봉사형 프로젝트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청년활동가들은 인건비도 산정 안 되면 자원봉사형 프로젝트를 동원되고 있는 중이다.

커먼즈(Commons)의 방어 : 공동체에 대한 질적 착취국면의 도래

마을공동체 사업이 활성화되는 곳에 정확히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전거도로, 공동육아, 대안학교, 협동조합 등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모델이 되어 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 카페나 위락시설이 생기고, 결국 부동산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마을만들기를 했던 활동가들은 높아진 주거비용으로 인해 마을에서 쫓겨나고, 결국 마을은 ‘문턱이 있는 유토피아’가 되어 버린다. 이런 현상은 마을 만들기에 대한 회의와 의심의 눈빛을 만들어내기 충분했다. 결국 마을만들기와 공동체운동은 부동산가격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활동의 성격으로 전락할 우려마저 생긴 상황이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외부를 무한히 약탈하고 착취하던 성장주의 상황에서 벗어나 생태적 한계에 직면해 있고, 동시에 외부소멸테제라고 불릴 만큼 개발이익보다 생태복원비용이 더 들어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은 수출이나 외부로의 진출보다 미시적인 공동체의 관계망과 커먼즈 등의 영역이 갖는 부수효과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동체적인 관계망과 배치가 갖는 집단지성, 공유자산, 오픈소스, 생태적 지혜 등에 대한 약탈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플랫폼자본주의의 형태로 이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욕망, 재미, 흥, 놀이, 열정 등은 플랫폼의 이득의 환원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플랫폼 역시도 지대이득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미래투자전망을 상실한 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 시절에 이윤을 얻던 방식인 이자(interest)에서 점점 지대(rent)로 이윤의 작동방식을 바꾼 상황을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은 마을공동체에 심원한 영향을 준다. 현재는 지대이익을 위해서 마을 만들기를 하는 건지 하는 회의감이 드는 상황이며, 부동산을 갖지 못한 청년세대들과 부동산을 가진 공동체 1세대 간의 간극과 소득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청년세대에게 있어 공동체의 의미 역시도 가족 기반, 장소 기반, 미래 기반에서 심각하게 벗어나, 취향과 기호 기반, 관계 기반, 지금-여기 기반으로 이행한 상황이다. 공동체에 대한 질적 착취 양상의 심화는 공동체 1세대와 공동체 청년 세대 간의 협력과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 되었으며, 마을공동체 자체가 갖는 사회구성적이고 사회혁신적인 측면을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는 청년세대로 하여금 마을로 머무르는 인력(引力)보다 마을을 떠나가게 하는 척력(斥力)을 크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청년세대에 대한 기본소득과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서 마을에 터를 잡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필요한 시점이다.

입자가속기 : 이제까지의 공동체의 작동원리

이제까지의 공동체의 작동원리를 살펴보자면,

  1. 커먼즈(commons)를 먼저 제시할 수 있겠다. 마을과 공동체의 공유지에서는 다양한 집단지성과 생태적 지혜, 공유자산 등이 발아한다. 공유지로서의 삼림, 하천, 바다, 갯벌에서의 약초, 발효, 식생, 벌레퇴치, 요리, 저장의 지혜가 그것이다. 최근의 플랫폼자본주의는 이러한 커먼즈를 탐내고 이를 지대이득으로 전환하려는 채굴자본주의 유형을 보인다.
  2. 흐름(Flux)으로서의 사랑, 욕망, 정동, 돌봄의 순환의 시너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상, 내발적 발전전략은 부-자원-에너지의 순환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공동체 내부의 사랑, 욕망, 정동의 흐름에 실어 보낼 것인가의 쟁점에 달려 있다.
  3. 배치(agencement), 즉, 자리, 위상, 행렬, 동적 편성으로서의 배치를 재배치할 것인가, 하는 미시정치의 여부와도 관련되어 있다. 미시정치는 삶과 일상, 문화, 욕망을 전면화하는 생활정치이다. 미시정치의 과정을 통해서 마을 일과 대소사를 논하고 끊임없이 서로의 위치를 조정하고 배치를 형성해 왔던 마을의 역사가 있다.
  4. 자기생산(autopoieisis)과 타자생산 사이의 긴장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외부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마을을 자기생산하고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5. 일관성의 구도(plan of consistence)는 참고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중언부언하면서도 일관된 흐름을 가지는 비유기적인 대화방식을 의미하며 합리적 논증과 추론이 아닌 공동체적인 비폭력공감대화의 방식을 개방한다.
  6. 자율성(autonomy)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동성(automatic)의 입장에서의 공공영역의 ‘자동주의=관료주의=기능주의’와 달리, 배치에서의 자기결정력과 다기능적인 정동과 돌봄을 통한 문제해결 능력 등이 관건이 될 수 있다.
  7. 비기표적 기호계(sémiotiques a­signifiantes)로서의 냄새, 색깔, 눈빛, 몸짓, 맛, 이미지 등을 교감과 공감의 재료로 삼는 공동체의 능력을 들 수 있다. 이는 어떤 하나의 대답을 갖고 있는 전문가주의가 아닌 삶의 지혜에 기반한 배치라는 점을 의미한다.
  8. 마지막으로 재미와 놀이 모델, 의미와 일 모델과의 긴장관계를 들 수 있다. 재미와 놀이로서의 활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의미가 생기면 일이 되는 과정이 공동체에 있었다. 이렇듯 공동체적 관계망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면, 바로 생명과 정동, 활력의 작동이 공동체에 내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공동체운동은 사람답게 생명답게 살 수 있는 기층운동이자 저변의 운동, 보이지 않는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새로운 세대에 이르러 혁신과 변화의 도상(途上)에 있다.

권희중, 이호찬, 신승철 공저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2020, 도서출판 한살림) 중 일부 발췌한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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