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 ③‘나만’이 아니라 ‘같이’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2020, 도서출판 한살림)에 담긴 특이점 청년 이야기를 여러 편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이번 편에서 이들은 공적인 삶, 공적 행복과 자신의 삶을 연결 짓는다. 사적 삶과 공적 삶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 사적 행복뿐 아니라 공적 행복도 필요하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공적인 삶이란

우리가 낯선 이들로부터 받는 느낌이 적대적 이미지라면 우리 삶은 매우 피곤할 것이다. 우리는 늘 낯선 이들을 경계해야 하고,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반대로 우리가 낯선 이들이 동료 시민이라는 이미지를 갖는다면 우리 삶은 조금 더 편안하고 풍부해 진다. 우리는 다양성에 친숙해지고, 낯선 이들이 자신의 삶을 활력 있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공적 삶이란 우리가 낯선 사람들과 동료 시민이라는 ‘생각과 느낌’을 갖고 함께 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공적 삶이 쇠퇴해도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공적 삶의 축소는 우리 삶을 더 피곤하게 하겠지만, 그 이상의 문제도 있다. 우리는 사적 삶이 법 제도와 정치,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의 공적 삶에 바탕을 두고 있다. 투표를 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법을 제정할 대표자를 뽑는다. 정당이나 노동조합에 가입하기도 한다. 시민, 사회단체에 후원하기도 하고, 참여해서 활동을 하기도 한다. 어떤 정치·사회적 이슈는 거리에 나서서 다른 시민들과 함께 발언을 하기도 한다. 제도와 시스템이 다수 시민들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러한 활동을 하고, 이 모든 공적 활동은 우리 사회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공적 삶에 대한 무관심은 다수 시민들 삶과 자신의 삶은 관련이 없다는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타인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신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박영림은 공적 삶과 사적 삶은 분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날까지 개인이 전체 없이도 있는 줄, 전체가 개인을 떠나서도 있는 줄 알았던 것이 잘못”이라는 함석헌의 말을 인용한다. “전면적인 전쟁 상황에서 평화로운 개인의 삶이 가능할 것인가?”1 국가의 공공성 존재 이유는 국민 개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내가 참여하지 않아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국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파커 J. 파머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언급하며 “다수를 희생시키면서 극소수의 부를 창출하는 상류층의 정치·경제적 모략 때문에 수백만 명이 일자리와 집을 잃어버렸다. 그 희생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적 삶을 너무 중시하여 정치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중산층이거나 최근까지 중산층이었다.”2라고 이야기한다. 공적 삶은 사적 삶을 지탱하는 토대이다. 우리가 공적 삶을 무시할 경우 그것은 결국 우리의 사적 삶을 박탈하게 된다.

특이점 청년과 공적 삶

특이점 청년들은 어떤 형태로든 공적 삶을 추구하고 있다. 자신의 일을 통해서든 일 이외의 활동을 통해서든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다정한마켓’ 박민수 님은 자신이 사회적 기업을 하고 싶었던 이유를 들려주었다.

박민수: 제가 ‘왜 이렇게 사회적 기업을 하고 싶었을까? 왜 농가에서 나오는 못난이 생산물, 철학 원칙이 있는 생산자, 이런 게 중요하다고 느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그냥 자라온 환경이 되게 커서겠죠. 마을 어른들, 저희 부모님, 상호 부모님, 창희형네 부모님 이런 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봤고, ‘아, 괜찮게 살고 있구나.’ 생각했으니까요.

이들은 자신들의 이런 생각이 ‘공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함께 잘 살자’라고 표현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들이 공적 삶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들 부모들은 2001년 성미산 지키기 운동을 승리로 이끌었다. 작지만 소중한 지역의 공적 공간을 지키려 노력했던 부모들 모습 속에서 이들은 공적 영역의 소중함을 은연중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박푸른들 님도 마찬가지다. 푸른들 님은 공적 삶을 “주변을 돌아봐야 되고, 둘러보고 함께 살아야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낯선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한 핵심 태도인 다름의 인정과 다양성 존중을 되풀이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공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풀무학교나 전공부, 마을에서 활동할 때 공적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덕분에 배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서로를 둘러보며,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그러기 위해 다양성 존중이 필요하다는 공적 삶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도 많은 마을공동체와 대안학교는 공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능한 실천을 하고 있다. 밝은누리공동체의 경우 1,000일 동안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진행하고 있다. 생명평화 가치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찾아가고, 길벗으로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대안학교의 경우 다양성을 경험하는 것이 의도적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강동하 님은 하자에서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신체 장애인들이 배우인 극단 타이헨의 무대 공연 모습. Kohji Fukunaga(Studio epoque) (출처: http://www.asahi-net.or.jp/~TJ2M-SNJY/kor/undo-story.html)
신체 장애인들이 배우인 극단 타이헨의 무대 공연 모습.
출처 : Kohji Fukunaga(Studio epoque)

강동하: 극단 타이헨에서는 신체 장애인들이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하세요. 신체 장애인들이 배우인 건데, “그분들 몸은 숨길 게 아니라 그 자체로도 예상할 수 없는 하나의 예술이다.” 그런 의미로 레오타드라는 쫄쫄이 내복 같은 옷을 입고서 무대로 나가거든요. 그런 무대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에서 저희 하자 작업장 학교 학생들은 구로코라고 검은 옷을 입고 얼굴까지 다 가리고, 눈에 띠지 않도록, 배우들만 무대 위에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뒤에서 무대 준비해주는 역할을 했어요. 무대 세팅부터 의상들 보조해드리고 소품 보조해드리고 그런 활동들을 했었는데, 소수자에게도 계속 시선을 틀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이렇게 소수자와 만남을 경험하는 것뿐 아니라, 학교에서 주도적으로 공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성미산학교는 나대지를 개간하여 지역 주민들 공동텃밭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러한 작업은 점차 축소되어가는 공적 공간을 창조해내는 대표적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산간디학교도 ‘체인지 메이커’를 모토로 ‘자신의 행복으로 세상의 행복에 기여하는 사람’을 키워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마을과 대안학교는 쇠퇴되어가는 공적 삶을 보존하고 확대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공적 행복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 반드시 공적 삶을 추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단지 공적 삶이 쇠퇴했을 때 내 사적 삶이 피곤해지고 박탈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인가?’ 김우창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인용해 ‘공적 행복’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리에게는 공적 정치 공간에서 얻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인데, 그 행복은 ‘토의, 숙고, 결정’ 등 공적 공간에서 행위가 주는 만족감, 행복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이 주는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지닌 행복이고, 모든 사람에게 있는 인간적 본능이다.3

특이점 청년들이 공적 삶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적 행복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했을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 마을공동체와 대안학교에서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결정하고, 실천했던 과정들은 그들에게 공적 행복을 제공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아직도 친환경 생산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소수 정당 이름으로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고, 지역에 공유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농촌청년여성들과 함께 캠프를 열기도 하는 어찌 보면 순탄치 않은 길들을 걸어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적 삶과 공적 삶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 사적 행복뿐 아니라 공적 행복도 필요하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낯선 이들을 우리 삶에 받아들임으로써, 동료 시민들과 함께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삶은 더 편안하고 활기차고 풍요로워지고, 우리는 더 높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공동체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한다면 아마도 공적 행복이라는 인간의 또 다른 근원적 욕망에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박영림, 에큐메니칼 신학대학원 연합 공동수업 “정치와 교회” 3강 한국 정치와 한국 사회의 변화(한 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선교 훈련원, 2012) 참조

  2.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p16

  3. 김우창,『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p130~131

권희중, 이호찬, 신승철 공저 『우리의 욕망을 공유합니다』(2020, 도서출판 한살림) 중 일부 발췌한 글입니다.

심순

타고난 과격한 성격을 고치고 착하게 살아보고자 심순(心淳)이라는 별명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수시로 버럭과 반성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호찬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자.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