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가 준 선물

매일 걷습니다. 걸으며 삶의 모든 순간이 특별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소한 나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수많은 손길들을 생각하고, 한걸음이 쌓여 만보가 되는 기적을 통해 꽤 괜찮은 나를 만나기도 합니다. 꼭 만보가 아니어도, 매일 새로운 하루를 특별함으로 잘 채워봐요. 작고 사소한 것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면서요.

오늘은 지방선거 하는 날. 모처럼 빨간 날이니 느즈막히 일어나 움직여도 될 텐데, 습관은 무섭고, 몸은 얄짤이 없다. 늘 일어나는 시간에 눈이 떠졌고, 조금 뒹굴거리다 ‘아유, 그래 알았어!’ 하고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 아침을 맞이한다. 요거트에 꿀 한 바퀴, 산딸기 한 줌 올려 맛있게 먹고, 투표를 하러 간다. 사람이 많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투표장이 한산해서 금세 투표를 마쳤다. 챙모자 고쳐쓰고 오늘의 걷기를 시작한다. 오늘의 만보는 어떤 시간으로 채워질까?

그렇다. 2022년 6월의 나는 만보 걷기를 하고 있다. 작년 5월부터 시작한 나만의 미션인데, 시간은 흘러 벌써 14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운명(?)은 봄을 지나 여름-가을-겨울, 다시 봄에서 여름이 시작되는 오늘까지 나를 걷게 하였다. 만보걷기를 시작한 것은 건강이나 체력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우습게도 휴대폰 만보앱(Stepps)에서 만보가 넘는 순간 보여주는 휘황찬란한 축하가 맘에 들었고, 매일의 성취를 축하해주는 스텝스앱의 성실함 덕분에 꾸준히, 열심히 걸었다.

휴대폰 만보앱(Stepps)에서 만보를 넘긴 순간. 사진제공 : 에리카
휴대폰 만보앱(Stepps)에서 만보를 넘긴 순간. 사진제공 : 에리카

마침 5월은 걷기 좋은 계절이었다. 어느 꽃이 어디에 폈는지, 어제에 비해 오늘은 얼마나 폈는지, 한강의 봄은 누가 주인공인지, 동네 구석구석- 수국이 가득한 집도 발견하고, 빨미까레가 맛있는 빵집도 발견했다. 걷는 것 자체가 즐거웠지만 걷는 즐거움이 덜한 날에는 ‘먹는 즐거움’을 채우며 걸었다. 즐거움과 눈물, 고통과 기쁨이 어우러지는 날들이었고, 눈물, 감동, 좌절, 웃음이 담긴 많은 이야기들이 걷는 시간 속에 쌓여갔다.

만보걷기에 열을 올리던 어느 날, 종일 4천보를 걸었고, 저녁에 강의가 있어 마치면 10시, 돌아가는 길에 6천보를 마저 걸으면 되겠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강의를 마쳤는데, 윽! 참석한 이들이 뒤풀이를 하자고 한다. 꼭 가야 한다고 해서 어거지로 따라갔는데, 머릿속에는 만보밖에 없었다. 걸어야 하는데…. 걸어야 하는데… 이동하는 동안 남들 두 걸음 걸을 때 세 걸음 걷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주인도 아니면서 술 사러 간 사람 마중까지… 술 마시는 동안 홀로 눈물겨운 분투를 하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휴대폰을 살살 흔들고 있는데, 시간은 11시로 향해 간다. 사람들은 일어날 맘이 없고, 12시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고, 만보까지 4천보가 남았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지! 비장한 목소리로 “저는 11시 10분에 가겠습니다!” 선언을 했으나 20분까지만 있다 나가자고 하니… 아… 어쩌랴! 테이블 아래에서 애꿎은 휴대폰만 열심히 흔들었다. 드디어 집에 가나 보다! 하고 나오는데, 동료가 자꾸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위험해!!! 도망가려는데, 할 말이 많은 동료는…. 집 근처까지 따라오는 게 아닌가! 앗 남은 걸음은 2천 5백보… 과연 시간 내에 할 수 있을 것인가 쫄깃해지는 가운데, 이 친구는 집에 갈 생각을 안 하고 자꾸만 이야기를 하니 별 수 있나. 이야기 듣는 척 하면서 제자리 걸음, 힘들면 휴대폰 흔들기. ㅋㅋ 11시 58분, 300보 남았고요, 아— 심장 떨려! 11시 59분, 9995, 9996… 10000~ 해냈다!!!!!! 휴대폰 흔들어가며 채운 만보가 무슨 의미인가 싶겠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이룬 만보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다. 동료와 헤어지고 얼마나 가벼운 맘으로 집에 들어갔는지! 성공의 맛! ㅋㅋ

작년 5월부터 시작한 나의 미션은 오늘로 14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만보? 성공했냐고? 훗- 다 이루었다. 딱 하루, 2021년 10월 16일만 빼고….. 그날은 토요일… 언제나 만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므로 그날도 틈나는 대로 앱 보면서 체크했는데, 11시에 급작업 요청이 들어왔다. 빠르게 검토해서 넘겨달라는 요청에, 일 미루기 대마왕이지만 급한 불은 꺼야지! 바로 일로 쇽 들어가 일을 착착~ 하고 마무리하며 시계를 보는데, 11시 59분! 헉!!!!!!!!!!!!!! 나 혹시!!!!!!!!! 하고 앱을 켜니…. 8022보. 머리를 바바박 돌려봤지만, 1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매일 성공에 오점을 남기다니… 서럽고 분하고… 망연자실, 허망한 마음으로 누웠는데, 또르르 떨어지는 눈물 한 줄기….ㅋㅋㅋㅋㅋ

친구집에 술 마시러 갔다가 자리를 마감할 기미가 안 보여 휴대폰 손에 들고 술 마시는 친구들 주위를 빙빙 돌아 비웃음을 샀던 날들,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해주는 만보, 한강의 사계를 보는 즐거움, 동네 곳곳 달라지는 풍경과 걷기를 핑계로 만나는 맛집들, 어딜 가든 쉽게 걷기를 선택하는 패기… 같이 걷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꽤 즐거운 만보 생활이다. 이 모든 것의 이유가 그저 매일 매일 파란 동그라미를 채워가는 기쁨이라는 놀라운 사실만 빼면, 매일매일이 꽤 근사한 날들이다.

걷기를 통해 만난 것들. 사진제공 : 에리카
걷기를 통해 만난 것들. 사진제공 : 에리카

오늘은 친구와 진관사로 방향을 잡았다. 쨍하고 파란 하늘은 그냥 아무렇게나 찍어도 작품이 되고, 170년쯤 된 느티나무는 너른 품으로 커다른 그늘을 선물해준다. 진관사 가는 길 옆, 은행나무가 빽빽한 계곡길을 산책하고 건너 카페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 버스를 탈까 하다, 남은 걸음수도 채울 겸 좀 걸어볼까? 하고 모자를 고쳐 썼다.

쥐똥나무꽃 위를 날아다니는 꿀벌의 모습 포착! 이 순간이 삶 속으로 들어왔다. 사진제공 : 에리카

땡볕과 그늘 사이의 온도차를 실감하며 슬금슬금 연신초등학교까지 가는데, 문득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냄새! 응? 아는 향기야! 작년에 맡았던 그 향기, 문득 떠올려지는 시간과 풍경이 있어 고개를 돌리니, 그렇지! 쥐똥나무꽃이 환하게 피었다. 포도송이처럼 한 송이(?)에 알알이 작은 꽃들이 피어있는 쥐똥나무는 가을에 여무는 까만 열매가 마치 쥐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향기가 좋다. 하얀 꽃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기막힌 향기! 향기도 저장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가만히 보니 꿀벌들이 꽃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다. 다리에 동그란 알통(화분) 매달고 이 꽃 저 꽃 붕붕거리며 어디 꿀이 있는지 살피느라 바쁜 꿀벌. 차차 쌩쌩 다니는 도로지만, 신호가 바뀌어 일순간 조용해졌다. 바람에 쥐똥나무 향기가 다시 코끝을 스치고 벌은 다른 꽃으로 날아갔다. 완벽한 순간!

수레국화. 사진제공 : 에리카
수레국화. 사진제공 : 에리카

작년 봄, 집 앞 골목에서 이 친구들을 처음 만났다. 와! 국화과의 꽃인 거 같은데, 화려하고 기품이 있는 자태가 끝내준다! 연신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산책길 최고의 벗인 ‘다음 꽃검색’을 했더니, 수레국화일 확률이 100%! 화려하게 핀 꽃 옆에 있는, 아직 채 피지 않은, 이미 꽃을 담고 있는 꽃봉오리도 어찌나 예쁜지!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1년이 훌쩍, 올해도 그 자리에 수레국화가 피었다. 이미 아는 꽃이지만, 그래서 더 반가웠다. 올해도 피었구나! 흐드러지게 핀 꽃 하나하나 눈 맞추며 인사하는데, 응? 조금 핀 꽃봉오리 모양이 특이하다. 가만히 보니 이제 막 피려는 꽃인데, 끝 몇 장만 쓱 나와있다. 설마? 오므린 주먹 피듯 꽃이 피는 줄 알았더니 바깥에서부터 회오리치듯 꽃이 피는 건가? 우아아아! 너무 너무 신기해 다른 꽃들도 살펴보니 몇몇 꽃송이가 저 녀석처럼 일부만 삐죽 나와 있었다. 이야… 이야…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어찌나 반가운지! 수레국화와의 만남을 통해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르는, 비밀 하나를 새롭게 발견한다.

황매화. 사진제공 : 에리카
황매화. 사진제공 : 에리카

올해는 황매화와 죽단화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노란꽃은 다 황매화인 줄 알았는데, 비슷한 잎을 가진 다른 꽃이 눈에 띄어 찾아보니 비슷한 잎이지만, 5개의 홑잎이 있는 꽃이 황매화이고, 겹겹의 노란꽃은 겹황매화, 또는 죽단화라고도 부른단다. 그렇게 알게 된 후, 보이는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덕분에 4월 한 달간, 황매화와 겹황매화(죽단화) 전도사가 되었다(둘의 차이, 못 알아보는 사람 없게 해 주세요!). 천천히 걷고 다정하게 살피니 각자의 다름, 저마다의 특별함이 눈에 들어왔고, 어제와 다른 수많은 오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걷는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의 시간이다. 봄이면 당연히 만나는 조팝나무가 꽃을 피우기 전, 송이송이 얼마나 많은 별들을 품고 있는지, 꽃이 떨어지면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이 드러나는지, 천천히 걷고 살피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알면 다시 보게 되고, 다시 보니 모두가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 하나하나 다르고, 하루하루 다르더라. 호기심을 갖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삶의 모든 순간이 특별하고 매일 매일이 새롭더라. 걷지 않았으면 몰랐을 삶의 비밀들… 발견의 재미가 쏠쏠하다.

조팝나무 꽃(우)과 꽃봉오리(좌). 사진제공 : 에리카
조팝나무 꽃(우)과 꽃봉오리(좌). 사진제공 : 에리카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안 하면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매일 만보를 걷는다. 가만히 있으면 만 걸음을 걸을 수 없다. 오늘의 스케줄 속에서 나는 만보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 궁리하고, 궁리한 것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여야 비로소 만보가 된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 ‘앱에 빈칸을 만들기 싫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나간 바깥에는 나가지 않았으면 몰랐을 수많은 꽃과 나무, 사람, 새, 이야기들이 있다. 덕분에 웨딩드레스 구슬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는 쉬땅나무꽃을 알게 되고, 덕분에 까치를 닮은, 파란 빛이 참 예쁜 물까치도 알게 되었다. 개별꽃 꽃잎이 10개가 아니라 5개라는 것도, 진달래, 개나리의 시절을 건너 조팝, 이팝의 시간이 지나면 장미가 흐드러진다는 것, 장미가 시들면 곧 능소화가 화려해지는 시절이 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나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수많은 손길을 생각하게 되었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삶의 모든 순간이 특별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열심히 걷고 난 후 마시는 밀크티의 맛, 저녁 먹고 한 시간 반을 걸어 집에 돌아온 후 느끼는 뿌듯함, 몇 정거장 걷는 것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만족감 같은 것은 가히 걷기가 준 선물이라 할 수 있겠다.

걷기 덕분에 웨딩드레스 구슬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는 쉬땅나무꽃을 알게 되고, 덕분에 까치를 닮은, 파란 빛이 참 예쁜 물까치도 알게 되었다. 개별꽃 꽃잎이 10개가 아니라 5개라는 것도. 사진제공 : 에리카
걷기 덕분에 웨딩드레스 구슬처럼 화려한 꽃을 피우는 쉬땅나무꽃을 알게 되고, 덕분에 까치를 닮은, 파란 빛이 참 예쁜 물까치도 알게 되었다. 개별꽃 꽃잎이 10개가 아니라 5개라는 것도. 사진제공 : 에리카

전날 3만보를 걸어도, 겨우 만보를 넘겼대도, 매일 밤 열두 시가 되면 스텝스앱 숫자는 0으로 바뀐다. 한 달을 마감하고 나면 새로운 달은 0으로 다시 시작한다. 0으로 바뀐 앱을 보면 쌓아온 것이 사라졌다는 허무함과 한 걸음씩 다시 만 걸음을 쌓아야 할 새날이 시작되었다는 긴장감 같은 것들이 생긴다. 전날의 화려함, 전날의 고독, 전날의 수고, 이전의 것들은 지나간 기록으로 남겨두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거룩한 부담감으로 나는 움직이고 하루를 마감하며, 작은 한 걸음이 쌓여 만보가 되는 놀라운 기적을 날마다 맛보며 살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나가는 내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1년을 채우고, 다시 새로운 1년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특별한 순간들이 가득한 1년이었다. 오늘을 잘 마감한 나는 내일도 여전히 만보를 걸을 것이다. 내일의 나는 어떤 시간을 만나게 될까? 어떤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에리카

대안학교 교사입니다. 즐겁고 재미난 일 궁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이런저런 작당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지금은 어른들과 해야 할 일이 많아, 마인드 컨트롤 중입니다(대외비).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 속에 숨어있는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잘 발견하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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