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꽃 파오기 – 『오독(誤讀) 풍경』 중

이 팩션은 탈성장을 적정성장으로 이해하고, 그 번역된 말을 알기 전 수행에서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헌인마을의 역사는 공생의 실패를 거듭했고, 목화한 개망초를 살리겠다는 글 속 인물도 실패합니다. 그러면서도 기록에는 없지만 마을을 보존하려 애썼던 사람을 느끼고, 망실했던 꿈을 격려하고 싶어 계속 글을 쓰고 있습니다.

7년 전, 너는 집보다 공터가 많은 동네를 걸었다. 서울시 마포구와 고양시 덕양구 사이를 별 목적 없이 오가며 수많은 계란꽃1을 발견했다. 계란꽃은 길가, 빈터, 경작지 주변에서 무리 지어 자란다. 당시의 너는 주변부에 자신을 위치시켜 도시의 경계성에 파고들었다. 불균형의 감각에 천착하여 불안과 두려움을 미루며, ‘아주 다른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2

* * * *

20XX년 봄, 너는 식물연구자 O와 재개발 예정인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마을3을 걷다가 목화(木化)한 계란꽃을 발견했다. 줄기는 엄지손가락만 하게 굵어져 갈변했고, 나뭇가지처럼 짧고 뾰족해진 가지에 계란꽃들이 대롱대롱 피어있었다.

재개발 예정인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마을을 걷다가 목화(木化)한 계란꽃을 발견했다. 사진제공 : 봄로야
재개발 예정인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마을을 걷다가 목화(木化)한 계란꽃을 발견했다. 사진제공 : 봄로야

“드문 일이네요. 오래 두면 나무처럼 될 때가 있어요.”

개발이 멈춰있는 이곳의 계란꽃은 어떤 이유에선지 리그닌4이 쌓여 야외의 바람과 햇빛, 물에 의해 개량되었고, 제 명을 가뿐히 넘겼다. 너는 마치 보호수를 발견한 것처럼, 놀랍고 기뻤다.

“이 계란꽃을 구출해야겠어요.”

마침 올해 이 마을이 재개발된다는 뉴스를 보고 온 터였다. 식물연구자 O는 의아해했다.

“얘는 수집 목록에 들어갈 기준이 되진 않아요. 보존해야 할 객관적인 기록이 필요하지도 않고요.”
“나무가 아닌데, 나무가 되어 살면 좋잖아요.”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파도가 부서지면서 생기는 하얗고 투명한 거품처럼 흔들리는 풍성한 계란꽃밭을 본 적 있다. 적당한 바람이 불고, 시간만 많다면, 너의 손을 잡고 그 풍경을 온종일 볼 수 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
“드물게 사랑스러워.”

* * * *

그해 가을, 너는 별 준비 없이 손바닥만 한 작은 삽과 비닐봉지만 들고 그곳을 다시 찾았다. 반쯤 깨진 아스팔트는 예상보다 단단했고, 계란꽃의 뿌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때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뭐해요?”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 그냥···작업할 때 필요해서, 이런 계란꽃을 본 적도 없고···그, 여기···곧···개발된다면서요?”

말을 뭉뚱그렸다. 아가씨로 불려서 불쾌한 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계란꽃 줄기를 쓰다듬었다.

“여기 아직 멀었어.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데.”

분명 하루라도 빨리 마을을 다 밀어버릴 기세로 부동산 뉴스며, 정치 뉴스며, 생활 뉴스에 재개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너는 삽이 부러질 듯 탕탕 쇳소리를 내며 신경질적으로 땅을 팠고, 나는 등을 돌려 엉성하게 뽑아낸 계란꽃을 봉지에 담았다. 결국, 뿌리 일부는 잘게 잘려나갔다. 남자는 머쓱하면서도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지나갔다. 뒤엉킨 뿌리들을 분리하는 시간은 착잡했다. 작은 벌레들이 아스팔트 아래에서 기어 나왔고, 주변 다른 들풀들도 모조리 뽑혔다. 과장해서 땅에 묻힌 시체의 목을 뽑아내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우리는 마을 근처 가장 가까운 꽃집에 들어가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도시와 도시의 경계엔 어김없이 화원단지가 있다.

“사장님, 길에서 파왔는데요. 어떻게 심으면 잘 자랄까요?”
“어휴, 그런 들꽃은 화분에 잘못 심으면 죽어. 어디에 심을 건데? 다른 땅에 심으면 죽을 수도 있어.”
“네. 안 그래도 여기 흙도 좀 떠 왔어요.”

* * * *

파온 계란꽃을 네가 사는 집 앞 작은 화단에 심었다. 우리가 벌인 이 구출 소동을 합리화하려면, 꽃이 살아나는 방법 외엔 없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꽃들은 모두 떨어졌다. 대신 죽은 지, 산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마른 계란꽃 주변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들풀이 빠른 속도로 자라더니 어느새 2m를 훌쩍 넘었다. 너는 봄이 되면 다시 잎사귀가 나오고, 꽃이 필지 모른다며 최면을 걸듯 물을 주었다. 가을이 가고 바람이 날카롭게 불며 계란꽃은 더 퍼석하게 말랐고 너 역시 푸시시 무너져내렸다. 물을 줄 때마다, 아마도 아스팔트를 부술 때부터, 어쩌면 7년 전 서울과 경기 사이를 걸어 다닐 때부터 느릿느릿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읽었던 O.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꽃이 떨어지기 전, 계란꽃 조화라도 만들어 붙여줄걸, 지나친 죄책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다. 그 와중에 너는 살던 집에서 나와 거주지를 옮겨야 했고, 그 계란꽃까지 파올 겨를이 없었다.

그만 잊으라고 말했다.

“소동쯤이야 아무렇지 않아질 거고, 아무렇지 않을 내가 끔찍해서 미리 아픈 거야.”

성글게 끓어오른 돌봄의 시간은 그만큼 쉽게 사그라졌다. 너는 주변에 널브러진 쓰레기와 버려진 침대, 녹슨 가구의 잔해더미까지 아름답게 느껴진 찰나에 붙잡힌 게 여전히 좋다고, 그 장면에 몰입하다 보면 부러 계속 부풀리며 사는 오염된 몸의 시계가 조금은 천천히 돌아간다고, 그게 전부라고, 고백했다. 삽으로 그 뿌리를 캐려고 온 힘을 줄 때마다 몇백 년 된 나무가 되고 싶었던 이미 알고 있었던 꿈을 다시 꿨다고 했다. 너는 양 눈썹을 팔자로 내리며, 웃었다.

“지나치게 오래되었다는 느낌이 들어본 적이 없어.”

너는

“낡아빠져서 아예 다른 모양이 돼 본 적도 없어.”

여전히

“그 마을은,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살았던 사람들은, 들풀과 길고양이와 나무는 가늘고 어려운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지거나 사라지겠지? 이러나, 저러나 별 다를 바 없는 결말만큼은 피하고 싶었어. 어떻게든 걔를 다시 파와서 장례식을 치러줄 걸 그랬어.”

그런다.

그날 밤 꿈에서 우리는 적당히 무른 반죽이었다. 누가 우리를 그런 모양의 덩어리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반죽은 적당히 익은 노랗고, 하얀 스크램블처럼 부들부들하고, 기를 쓰지 않아도 배부르고 따뜻한 상태로 가만히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추동력을 잃었을까. 아니,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오래 머물 시간만 많다면, 우리는 이 장면을 앞설 이유 없이 볼 수 있다.


  1. 개망초 서식처: 경작지 주변, 휴경 밭, 길가, 빈터 / 수평분포: 전국 분포 / 수직 분포: 구릉 지대 이하,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2019), 봄로야 지음, 미디어버스, p. 11

  2. 같은 책을 포함하여 2016년부터 진행한 프로젝트

  3. 이 마을은 1970년 초에 음성 나환자들의 자활촌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인근 마을에서 이들의 거주를 반대했으나, 정부의 적극 지원정책으로 마을을 이루어 양계를 시작해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내곡동에서는 유일하게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어 가능하였다. 현재 양계장 대신 중 · 소 공장의 입주로 마을 모습이 변모하고 있다. 출처: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역사편찬원 ; 현재 헌인마을은 십여 년째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멈춰있다. 관련하여,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용서의 경계>(2022), 봄로야 글, 히스테리안에 수록함.

  4. 리그닌(Lignin): 목재, 대나무, 짚 따위의 목화(木化)한 식물체 속에 20~30% 존재하는 방향족 고분자 화합물. 세포를 서로 달라붙게 하는 구실을 하는데 이것이 축적되면 세포 분열이 멈추고 단단한 조직으로 된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이 글을 읽는 분에게 : 대체되거나, 잘리거나, 재생산될 일 없이 만나는 그때까지 안녕!

봄로야

떠나보내거나 상실해야 하는 상념을 붙잡아 드로잉, 텍스트, 흥얼거림 등의 ‘멜랑콜리아적 해프닝’으로 기록한다.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2016-2018)과 〈다독풍경〉(2019)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사적 경험이 미술가, 작가, 음악가 등과의 대화 및 협업으로 통과되어 다른 사건이 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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