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예술하기] ②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연마하기

‘예술하기’는 대상화된 예술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에 균열을 내는 것, 새로운 삶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하기는 공통하기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다른 삶에 대한 요구며 실천이다.

*이 글은 [도시에서 예술하기] ① 공통하기와 예술하기에서 이어진 내용입니다.

예술하기와 공통하기

정리해보자. 예술가들은 직업 특성상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삶에서 이탈하도록 강제되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삶의 양식을, 즉 공통장에 기반한 삶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율적 삶의 이면에는 불안한 삶이 있다. 삶의 재생산이 상품으로 구조화된 도시에서 그들의 공통장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그들을 계속해서 불안정 노동시장으로 내몬다. 즉 예술가는 계속해서 각종 기금 사업에 지원하고 레지던시에 입주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불안정한 삶은 도시 정부가 그들의 노동을 값싸게 부릴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경쟁력 향상이라는 목표를 위해 “장소의 질”을 높이고 싶어 하는 도시 정부는 예술가들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장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은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 생산을 정해진 예산 내에서 지원하는 것이다. 도시 정부는 일정한 규모의 예술 생산을 지원함으로써 도시 전략에 필요한 예술 노동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다. 일상적인 불안정에 시달리는 예술가는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레지던시와 기금에 지원하는 노동 시장은 불안정 노동자인 예술가들로 포화상태다. 그에 따라 최소한의 지원금으로 예술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레지던시와 기금으로 대표되는 그러한 지원은 제도적 환경이 거의 부재하다시피한 예술가들에게 공식적인 하나의 경로를 제시한다. 레지던시가 예술가들에게 등용문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좁은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부단히 자신을 계발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다시 말해 경쟁 관계에 돌입한다. 이 경쟁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훈육하는 과정이다. 자기 훈육하는 예술가로서 그들은 자신을 계발하고, 스스로가 계발에 몰두하도록 강제하는 이중 직무를 수행한다. 이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예술가의 불안정한 삶이 있다.

도시 정부의 필수 아이템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은 현대 도시에서 각광받는 존재다. 사진출처 : Elisa Jeanne

여기서 이제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서, 예술이 아닌 예술하기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도시 정부의 필수 아이템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은 현대 도시에서 각광받는 존재다.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든, ‘도시를 재생’하기 위해서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든 예술은 빠지는 법이 없다. 문 닫은 공장이나 발전소를 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것은 이제 유행을 넘어 당연한 수순에 속한다. 예술이, 무언가 아름다운 활동이 이 도시를 구원해주리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즉 거의 부재하다시피한 제도적 환경으로 인해 비공식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와, 도시의 ‘재생’, ‘발전’ 혹은 ‘경쟁력’을 위해 요구되는 예술이라는 이 기묘한 공존이 오늘날 도시에서 예술가와 예술이 자리한 맥락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이 아닌) ‘예술하기’는 대상화된 예술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에 균열을 내는 것, 새로운 삶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하기는 공통하기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다른 삶에 대한 요구며 실천이다. 그러나 그 예술하기 역시 공통하기가 그렇듯, 그리고 지금까지 도시 정부의 전략에서 보았듯 자본주의적 전유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스스로 혼란을 느낀다. 내가 하는 이 작업은 다른 삶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일을 대신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부동산 경제를 촉발시키는 일일 뿐인가. 우리의 몸이 다양한 체계들이 교차하는 공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작업 역시 다양한 체계들이 교차하는 곳이며, 그에 따라 우리가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작업 역시 모순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순되지 않은 완전한 존재가 되는 일, 혹은 완전한 작업이 아니라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균열을 확대해 가는 작업, 그것을 하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예술하는 삶1

여기서 ‘예술하기’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보자. 네그리는 예술을 특이성의 발명과 연결한다.2 이 특이성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차이다. 우리를 에워싼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이성이란 그 질서로 수렴되지 않고 이탈하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예술은 예술이기를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품으로 둘러싸인 이 세계에서 많은 예술 역시 상품으로 존재하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예술은 특이성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에서 순환하(길 바라)는 미감(美感)적 사물로 남는다. 그리고 자본은 차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데 탁월하므로, 보통 ‘예술’ — 그게 뭔지 잘 모른다 해도 — 이라 불리는 특이한 미감적 사물들은 자본의 ‘평등화’ —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드는 — 과정과 차이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차별적인 상품’으로 이내 전환되어 버린다.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던 예술은 사회의 한가운데로 진입하고, 결국 전시되고 소비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예술이 우리 앞에 있는 무언가로 대상화될 때 상품화의 운명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면 대상화되지 않는 예술은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로부터 대상화될 수 없는 것, 즉 우리 자신을 특이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우리 주변에서 그런 특이한 존재는 누가 있을까?

우리가 자본주의 질서를 벗어나는 차이를 특이한 존재라고 부를 때, 그 질서에서의 벗어남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우선 살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체계가 우리에게 일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작이 인클로저(enclosure)와 떼어놓을 수 없다면, 그 인클로저가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공통적으로 재생산할 수단을 빼앗아가는 것이라면,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 수단을 가진 자를 위해 일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없다면,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일을 강제하는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이한 존재란 무엇보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네그리에 따르면 예술이란 특이성의 발명이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란 일하지 않기, 일하지 않는 법을 발명하기 혹은 일하지 않는 사람 되기이다. 그런데 일을 강제하는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드물지 않은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일이 임금을 받는 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실제로는 일을 하는 많은 이들이 일을 하지 않는, ‘노는’ 사람으로 이해된다. 주부, 학생 등이 대표적이겠지만 예술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확하게 말하면 제도적인 환경 자체가 부족한 탓에 임금 노동을 — 자의든 타의든 —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그래서 무언가 많은 일을 하지만 보통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이해되는 예술가의 노동 조건은 두 가지 상황을 낳을 수 있다.

우선 비정기적이고 낮은 수준의 소득은 그들을 경쟁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들은 각종 아르바이트와 지원 사업에 매달려야 한다. 불안한 노동 조건, 제한된 생계 수단과 공적 지원은 그들을 각자도생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예술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불안한 삶에 시달리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즉 서로 경쟁한다. 그러나,

둘째, 그러한 조건은 반대로 그들을 서로 의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의 불안정하고 주변적인 사회적 지위, 다른 전문 직업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제도적 환경, 예술 생산의 집합적 성격 등은 예술가들이 스스로 상호 지원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 네트워크는 다른 직업군의 경우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과정에 대한 조언, 성과에 대한 보상, 커리어 구축 등을 대신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처럼 그들이 예술 (작업)하는 삶을 욕망하는 한 — 그 예술 작업이 어떤 형태와 속성을 띠든 — 그러한 삶은 집합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예술하는 삶은 ‘일하지 않는’ 삶이고, ‘정상’에서 벗어난 차이이므로, 그러한 차이에 대한 욕망은 홀로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하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임금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홀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물론 엄밀히 말해 임금 노동을 한다고 해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즉 욕망은 집합적으로만 이룰 수 있다.

여기서 예술은 특이성의 발명이라는 네그리의 말을 다시 가져오면, 예술은 다름 아니라 예술하는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삶 자체이며 그 삶은 집합적으로만 가능하므로, 요컨대 예술이란 함께 일하지 않으며 예술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여기서 예술 작품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의에서 홀로 예술을 한다거나 예술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일을 하지 않고살려면 사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집합적으로만 이룰 수 있다면 ‘일하지 않는’ 삶은 (사실) 함께 일하는, 협력하는 삶이다. 이것은 우리를 공통적인 주체로, 서로 연결된 주체로 만든다.

특이성과 공통성의 동학에서 출현하는 주체성이 바로 그들이 다중(multitude)이라고 부르는 주체성이다. 사진: RhondaK Native Florida Folk Artist

네그리와 하트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을 토대로 상호작용하며 그 상호작용이 다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특이성과 공통성의 동학에서 출현하는 주체성이 바로 그들이 다중(multitude)이라고 부르는 주체성이다.3 예술가들을 상호작용하게 하는 공통적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위에서 세 가지 — 불안정하고 주변적인 사회적 지위, 부족한 제도적 환경, 생산의 집합적 성격 — 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 세 가지는 이제 예술계만이 아니라 산업계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노동 조건이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는 잠재적으로 예술가를 더욱 더 많이 생산하는 경향을 띤다. 물론 이때 예술가는 특정한 기술을 가지고 미감적 사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통념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인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는 예술하는 삶 자체를 욕망하며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연마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예술 작품’보다 ‘예술하는 삶’을 욕망하고 발명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예술가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리고 언급한 것처럼 예술하는 삶은 ‘일하지 않는’ 삶이므로 우리는 노동 거부가 특이성들을 연결하는 공통적인 욕망이고, 그것을 토대로 한 상호작용이 다시 노동 거부의 욕망을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 거부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실 많은 일이 요구되므로, 노동 거부란 단지 ‘일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삶형태를 만드는 일이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를 지탱해줄 무언가는 필요하므로, 새로운 삶형태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공통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예술가-다중은 그 과정에서 함께 출현하며, 그들은 다시 공통한다. 즉 공통장을 만든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나는 예술가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물론 그들이 생산하는 것들이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들이 ‘백수’이기 때문이다. ‘잘 나가지 않는/못하는’ 탓에 돈도 많지 않으면서 ‘놀고 있는’ 그들이 주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살아가기’를 그들이 욕망하고 실현한다는 데 있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늘 즐거운 것도, 늘 자유로운 것도 아니겠지만 현대인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삶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불가능함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지금껏 우리가 잘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체계적으로 세계를 점점 더 망가뜨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그 불가능함을 좀 더 천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마침.


  1. 이 절은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웹진 <공생공락>에 게재한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2. 안토니오 네그리, 『다중과 예술』, 심세광 옮김, 갈무리, 2010, 39쪽.

  3.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 조정환·정남영·서창현 옮김, 세종서적, 2008, 270쪽.

이 글은 저자의 학위논문 ‘도시 공통계의 생산과 전유: 오아시스 프로젝트와 문래예술공단을 중심으로’(2019)의 일부를 요약한 뒤 추가로 서술한 것이다.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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