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예술하기] ① 공통하기와 예술하기

‘예술하기’는 대상화된 예술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에 균열을 내는 것, 새로운 삶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하기는 공통하기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다른 삶에 대한 요구며 실천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예술’은 명사로만 기재되어 있다. 그렇지만 굳이 ‘예술하기’라는 동사를 쓴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영어 ‘common’ 역시 명사(와 형용사)로만 쓰이고, 동사의 용법은 사전에 없다.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는 이 단어의 동사형, ‘commoning’을 만들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새롭게 만들었다기보다 되살려낸 것이다. 과거 영어에서 ‘common’은 동사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하면 조금 어색하지만 ‘공통하다’라는 말로 옮길 수 있을 그 단어는 공통의 자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활동을 가리켰다. 그러나 인클로저(enclosure)와 함께 공통장(commons)이 사라지면서 점차 ‘common’의 동사 용법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라인보우가 사라진 그 용법을 다시 살려낸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 하나는 그 용법의 지시대상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지시대상을 살려내려는 의도일 것이다.

여기서는 첫 번째 의미에 주목해 보자. 방금 우리는 인클로저로 인해 그 지시 대상이 사라지면서 ‘common’의 동사 용법도 함께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지시대상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다시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사라졌다기보다 단순히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많은 공통장들이 사라졌다. 한때 공통으로 이용되던, 그래서 땅이 없는 이들이 자신의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공통자원에는 울타리가 쳐졌다. 그 경계 긋기의 역사는 맑스가 말하듯 “피와 불의 문자로” 쓰여 있다. 공통의 자원과 삶에 대한 그 수탈과 폭력이 바로 시초축적의 비밀이며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그러나 모든 공통장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공통적인 관리가 가능하며 실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가 연구한 대상은 주로 소규모 자연자원이었다. 연안 어장, 소규모 목초지, 지하수 지대, 관개 시설, 지역 공동 삼림 등이 그 사례다. 이것은 도시에서 찾기는 어려운 형태다. 그렇다면 도시에서 공통장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도시와 공통장

공통장이 한국어 사용자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어 ‘commons’는 영어권 사람들에게 목가적인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러니까 앞서 자연자원 형태를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공통장은 도시와는 먼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급 능력을 상실한 상황, 그리고 재생산 과정이 상품을 기반으로 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숲에서 재생산에 필요한 목재와 먹을 것, 혹은 약초를 구하는 삶은 거의 체험 프로그램으로 판매되는 상품으로만 남아 있다.

이렇게 공통장을 우리가 ‘공유하는 자원’으로만 이해할 때 그것은 도시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공통장을 말할 때 ‘공유하는 자원’이 아니라 ‘공통하는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자원을 서로 나눌 수 있는가의 문제를 넘어서 어떻게 우리가 삶을 함께 꾸릴 수 있을까의 문제로 다가간다면 도시와 공통장은 서로 무관하지 않은, 아니 아주 밀접한 관계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많은 현대의 공통장 연구자들이 말하듯이, 공통장은 사물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다. 맛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공통장이 공통 재화(common goods), 공통인(commoner)들의 공동체, 그리고 공통하기(commoning)가 어우러진 사회적 체계라고 설명한다. 즉 공통장이란 어떤 집합적 주체가 특정한 재화에 대한 책임감을 공유하며 그것을 함께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 즉 공통하는 — 체계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통의 재화를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인클로저와 함께 커먼즈가 사라지면서 점차 ‘common’의 동사 용법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진: Yang Shuo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도시에서의 공통 재화란 발견이 아니라 발명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공통 재화는 — 그것이 아주 물질적인 형태일 때에도 —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그러니까 공통 재화란 어떤 물리적 속성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그 재화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것은 사유재도, 공공재도, 공통재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통 재화를 생산한다는 것은, 즉 공통한다는 것은 어떤 재화의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는 일이다. 이것은 흔히 이야기하듯 자본주의 아래에서 교환가치에 종속된 사용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재화의 사용가치는 주어져 있다. 가령 집의 사용가치는 그곳에서의 삶이다. 집의 사용가치를 회복하는 일은 재산으로서의 집이 두드러지는 이 개발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 사용가치의 회복은 현재와 같은 고립된 삶을 담보하는 집의 기능을 존속시킬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집을 다른 삶의 기반으로 바꾸는 것, 즉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통하기는 단순히 소규모 공동체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리고 공통인이라는 주체 역시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공통인이라서 공통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하면서 공통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통인이 되는 일과 어떤 재화를 공통 재화로 만드는 일은 함께 일어난다.

이처럼 도시에서 공통하기는 무언가의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공통인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새로운 가치의 발명은 새로운 인간의 발명과 함께 일어난다. 요컨대 공통하기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과 새로운 가치 발명의 분리 불가능한 얽힘이다.

공통장과 외부

우리는 공통장을 하나의 사회적 체계라고 말했다. 그것이 체계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데 안젤리스에 따르면 모든 체계는 환경과 연결되어 있다. 즉 체계는 체계-환경의 일부로 존재하며, 특정 체계는 외부 환경과의 특정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데 안젤리스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체계는 사회적 재생산 체계이며, 자본주의는 그것의 하위체계에 불과하다. 공통장 역시 하나의 하위체계다. 그 각각의 하위체계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흡수하거나 갈등을 빚거나 협력하는 등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에서 각각의 하위체계는 서로의 환경으로, 외부로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공통장의 외부이며, 마찬가지로 공통장은 자본주의의 외부다. 그리고 우리는 특정한 하위체계에 전적으로 속해 있기보다 여러 하위체계를 가로지른다. 우리의 몸은 다양한 하위체계들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체계-환경에서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살아감에도 공통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것이 촘촘히 짜인 도시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기란 어려우며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벗어나 공통장 체계로 이동할수록, 전자가 약속하는 많은 것을 버려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에서의 표준적인 삶, 즉 임노동하는 삶을 벗어나는 일은 엄청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누가 그런 위험을 선택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그러한 위험에 근접한 부류 중 하나다. 나는 예술가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많은 경우 — ‘정상화된’ 관점에서 볼 때 — 백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어느 정도는 그들에게 강제된 조건이며, 이는 예술가들이 임금노동이 아닌 삶형태를 발명하도록 이끈다. 즉 그들은 임금이 아닌 —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 다른 삶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 기반은 많은 경우 서로가 연결된 네트워크로 나타난다. 여러 연구가 보여주듯 다른 전문 직업군에 비해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환경이 부족한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네트워크는 그것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각종 프로젝트, 기금, 아르바이트 등에 대한 정보와 참여 기회뿐 아니라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인정과 지지, 비평, 격려 등이 그 네트워크를 흘러 다닌다. 때로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서로의 토대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사람이 ‘정상적인’ 삶형태를 살아가는 도시에서 나처럼 사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예술가들이 완전히 자율적인 삶을 누리게 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의 토대로 기능한다. 즉 그것은 예술가들의 공통장이다.

예술가 네트워크 공통장의 흡수

앞서 말했듯이 공통장이 사회적 체계라는 것은 다른 체계와의 특정한 관계 속에 있다는 말이며, 그 관계란 다양한 양상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공통장은 자본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자본주의의 기원에 인클로저, 다시 말해 공통장의 파괴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자본주의는 공통장을 파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유(appropriation)하기도 한다(즉 공통장의 자본주의적 이용). 가령 신자유주의는 재생산 영역 — 교육, 보건, 주거 등 — 을 직접적인 축적의 지대로 만든다. 그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많은 과제들, 교육, 투병, 주거지 마련 등은 개인도 국가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가족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개인이라기보다는 가족이며, 이 말은 신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 가족이라는 공통장을 전유하는 체계라는 뜻이다.

가족이 자본의 공통장이 되는 일은 물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실비아 페데리치 등 여러 페미니스트 이론가/활동가들이 지적했듯이 집안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는 재생산 노동에서 분명하게 찾을 수 있다. 그 노동은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여성의 일로 자연화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숭고화되며, 임금에서 배제되면서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서비스”로 이해되었고 그에 따라 자본은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그 재생산 노동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인 노동력을 무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자본의 공통장으로 나타난다. 집은 그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장이며, 여성은 그 공장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다. 또한 이것은 여성을 임금 노동자(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들고 그들의 역량을 약화시킨다.

도시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집안의 여성과 비슷한 상황에 있다. 예술가들은 ‘정상적인’ 삶형태를 벗어나도록 강제되고, 또 스스로 그렇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 자본의 공통장을 형성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들의 활동이 도시의 부동산 경제에 편입되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그 과정의 촉매자로 지목받고 비난 받기도 한다. 또 다른 상황은 예술가들이 도시 정부의 프로그램에 초대받는 것이다. 문화도시, 창조도시, 창의도시 등 이제는 진부해져버린(것 같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결국엔 도시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한 그 도시 전략에서 예술은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되었다. 그에 따라 많은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창작공간을 지원하거나 혹은 기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도시에 무언가 ‘문화적인 것’을 퍼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프로그램의 지원 대상은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점이다. 도시 정부는 예술가를 지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예술가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도시 정부의 관심사는 도시에 (예술가가 아닌) 예술을 활성화시켜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1 그 과정에서 예술가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다.

가령 한 레지던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보자. 서울시 창작공간 사업에 관여한 한 연구원의 말처럼 레지던시는 과거와 달리 좀 더 사업을 위한 곳으로 바뀌었다. 즉 그곳은 지역에서 무언가 문화적인 사업을 진행하는 곳이다. 그에 따라 많은 입주 작가들이 그곳에서 진행하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요청받는다. 즉 레지던시는 입주 작가들의 활동을 지역 활성화와 연계하는 장치다. 그에 따라 레지던시는 도시 전략(창조도시 등)이 구상하는 사회적 공장에 하나의 조립라인으로 배치된다. 이 조립라인은 예술가들에게 노동(창작)할 수 있는 생산수단(작업 공간, 작업에 필요한 장비 등)을 제공한다. 이 조립라인의 생산물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작품을 관람하고 다양한 “주목”을 유발하는 주민들의 활동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문화의 이미지’가 도시 전략의 관점에서는 어쩌면 더 중요한 생산물이다. 그것이 도시를 ‘문화적인’ 장소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가의 창작 의도나 작품의 성격은 문화적 풍경의 생산에서 중요하지 않다. 문화적 풍경의 생산은 예술가나 주민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적 활동을 유도하는 조립라인의 성격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조립라인이 공통장을 모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곳은 우리가 정의한 공통장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첫째, 자원의 공동이용. 예술가들은 레지던시에 있는 시설을 무상으로 혹은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둘째, 노동의 사회적 협력.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은 주변 예술가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또한 작업 공간과 장비를 관리하는 노동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 셋째, 공동체. 레지던시는 누구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며 고유한 규칙과 멤버십에 따라 운영된다. 이것은 레지던시의 운영 원리가 공통장의 작동 방식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가들의 자율적인 네트워크를 도시 정부의 전략에 연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즉 예술가와 주민들의 활동을 ‘문화적인’ 것의 생산에 연결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모의된 공통장 — 이것을 전략 공통장라고 부르자 — 이라 할 수 있다.

레지던시는 도시 전략(창조도시 등)이 구상하는 사회적 공장에 하나의 조립라인으로 배치된다. 사진: Ryan Ancill

우리는 앞서 도시의 예술가들이 집안의 여성과 비슷한 상황에 있다고 말했다. 가사노동이 숭고한 사랑에 의한 행위로 여겨지면서 착취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노동은 예술=선(善)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착취된다. 사랑이나 선함은 보통 본성(자연)에 따른 행위로 간주된다. 도시 정부가 구상하는 전략 공통장은 그렇게 주체들의 활동을 자연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그것을 무상으로 흡수할 수 있다. 이 자연화는 자본이 여성들의 가사노동과 양육 노동을 무상으로 전유하여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도시 전략 속 예술가와 주민들의 활동 역시 이와 비슷하게 규정된다. 예술가들의 예술 활동은 ‘예술가’라는 명명과 함께 그들의 내적 욕구에 따른 자연적인 것으로 상정되며, 시민들의 예술 향유 역시 자연스러운 활동일 뿐 아니라 심지어는 당위로 부여된다.2 이 자연화의 토대 위에서 예술가들에게 노동(창작)할 수 있는 생산수단(작업 공간과 장비 등)을 지원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시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화를 토대로 한 예술 공장(아트 팩토리) 안에서 예술가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비임금 노동(창작과 향유)을 수행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예술 공장이 목표로 하는 생산물 중 하나가 도시에 입힐 수 있는 ‘문화의 이미지’이고, 그 공장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예술가와 주민들은 실제로 그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술 노동의 자연화와 더불어 그들의 노동은 무상으로 전유된다.

예를 들어 서울시창작공간에서 진행하는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을 보자. 말 그대로 예술가의 작업실을 개방(오픈)하는 이 프로그램은 서울시창작공간에 입주한 예술가들에게 의무사항으로 주어진다. 예술가는 오픈스튜디오를 위해 자신의 방을 청소하거나, 작업을 적당히 배치하거나, 혹은 평소와는 다르게 색다른 방식으로 꾸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님 — 여기에는 일반 주민뿐 아니라 미술 관계자들도 포함된다 — 이 찾아오면 그들을 환대하고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질의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하는 기관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에 문화적인 무언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우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여긴다. 오픈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실제 진행하는 예술가도, 풍경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주민들도 자신의 욕구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예술가는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하면서 아무런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다. 레지던시 기관은 어쩌면 예술가의 오픈스튜디오 참여를, 작업 공간을 제공받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으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업 공간의 제공 자체가 “작가들의 원활한 작업 수행이 아니라, 서울을 예술적 문화적 장소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입주 예술가들이 어떤 보답을 할 필요는 없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사무실에 책상이 놓여 있는 것에 대해서 사장에게 감사 편지를 쓰는 일은 없는 것과 같다. 당연하게도 그런 장비나 시설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관상 무언가를 지원받은 듯한 입주 예술가는 오픈스튜디오뿐 아니라 다른 다양한 지역 문화 프로그램에 진행자로 참여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런 프로그램은 물론 의무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할수록 레지던시에 더 머무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예술가는 자신의 삶이 불안정할수록 그런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레지던시 기관의 밑바탕에는 이렇게 예술가들의 불안정한 삶이 자리하고 있다. 전략 공통장은 그들의 불안을 먹고 자란다.

예술가는 레지던시에서 혹은 기금을 받아 작업하면서 — 임금을 받는 경우에도(대부분의 기금에는 임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 자신의 작품 외에도 도시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문화적인’ 풍경과 지역에서 공유되는 사회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비임금 노동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원을 받는 이들이 아니라 착취 받는 노동자다. 앞서 말한 것처럼 레지던시와 기금으로 대표되는 예술 지원 사업의 지원 대상이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혜택을 입는다. 그에 따라 예술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수혜자로 인식되고 그러한 인식이 강해질수록 그들의 비임금 노동은 수면 아래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이처럼 ‘예술이라는 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내적 욕구에 따라 활동하는’ 도시의 예술가는 ‘사랑이라는 숭고함,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위하는’ 집안의 여성과 유사한 위치에 있다. 그러한 자연화는 두 사회적 노동자의 노동을 자본이 자신의 공통재로 활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여성이 임금에서 소외되면서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예술가는 불안정한 상태로 유지되면서 국가에 흡수된다. 전자가 공장의 노동력을 저렴하게 재생산하기 위한 메커니즘인 것처럼, 후자는 도시라는 사회적 공장의 경쟁력을 저렴하게 강화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이를 통해 여성과 예술가는 불안정하고 주변화된 비임금 노동자로 (재)생산된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1. 대표적인 사례로 2008년 민선 4기 서울시의 ‘창의문화도시’ 계획을 들 수 있다.

  2. 그래야 “문화시민이라고 하는 인정을 국제사회에서 받아”낼 수 있고, 그래야 “부가가치화”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 인터뷰 기사를 참조하라. “거기에 더해 경제적인 효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문화는 도시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품격 있는 문화이미지는 수출로 살아가야 하는 한국에 정말 중요합니다. 한국의 문화국가 이미지를 만들려면 대표도시인 서울이 문화도시가 되고, 서울시민이 문화시민이라고 하는 인정을 국제사회에서 받아낼 때 그런 부가가치화가 가능할 겁니다. 서울시를 좀 더 문화도시로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합니다. 디자인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오세훈 인터뷰, 문화일보, 2008.12.6.).

이 글은 저자의 학위논문 ‘도시 공통계의 생산과 전유: 오아시스 프로젝트와 문래예술공단을 중심으로’(2019)의 일부를 요약한 뒤 추가로 서술한 것이다.

권범철

도시 연구자라고 쓰곤 하지만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사실 주업은 육아고 다른 건 다 부업이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사회 활동과 멀어져 거의 집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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